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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고향을 그리는 마음... 향수, 향수병...
좀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말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숨겨져 있다.
한국 사회에는 지금 2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이 이주노동자로서 한국이라는 곳을 돈벌이할 곳으로 여기고 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고,
많은 여성들이 노예 비슷한 결혼을 해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남자와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
유학을 와있거나, 한국에 외국어 강사로 와있는 경우는 제법 고급노동자라 자의에 의한 것이라 큰 문제가 없다
많은 수의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누구나 외국에 나가 살고 싶어하는 낭만적 마음이 있을 건데, 그건 어디까지나 낭만이다.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르거나, 이주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은,
늘 고향으로 달려가는 마음에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향수병이다.
불과 30년 전까지도 농업 사회였던 한국 사회,
무지 빠른 기울기로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다들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왔다.
아직도 명절이면 도로가 막힐 걸 알면서도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역시, 향수병의 연장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향수를 느끼던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가고싶어하던 그곳은... 정작 그토록 그리던 그곳이 아니더라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이 제 살던 곳을 버리고 수십 년간 다른 곳에서 정착해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려졌던 고향은,
이제 자기가 정착할 수 없는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는 증명이고,
결국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방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샤갈의 그림에는 땅이 없다.
인물들은 늘 땅에서 소외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
샤갈의 고향 벨로루시는 소비에트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
밀란 쿤데라의 고향 프라하 역시 소비에트의 지배로 1968년 프라하의 봄은 탱크에 짓밟힌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을 떠나 떠돌다 그를 사랑하는 '칼립소'란 여인과 7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고향의 여인 페넬로페에게로 돌아가지만...
페넬로페와 그는 칼립소에 비하면 깊은 사랑이 아니었고, 돌아간 고향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디아스포라>라고 이름붙인 사람들은,
고향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그 향수의 결말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 각자의 삶을 그토록 탐욕스럽게 지배했던 것이 20세기 특유의 현상이다.(16)
슬픈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해야했던 밀란 쿤데라에게
공산주의란 폭력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그토록 탐욕스러웠던 현상.
이십 년 동안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귀환만을 생각했다.
그런 일단 되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삶, 그 삶의 본질, 그 중심,
그 정수가 이타카 밖에, 이십 년 동안의 방랑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38)
오디세우스의 영웅적 행적을 고향 밖에서는 다들 궁금해하고 칭송했으나,
막상 그토로 그리던 꿈의 이타카에 돌아온 그에게 돌아온 건 무관심 뿐이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서있지 않은 곳(U-topia, 없는 곳)을 지향하게 마련이지만,
그 향수의 내용은 낭만적일 뿐, 현실은 냉혹한 것임을 오디세우스는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여 프라하를 뜬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돌아온 곳 프라하에서,
그들은 <침묵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레나는 프라하와 빠리에서 사랑에 빠진다.
우연, 그것은 '운명'을 말하는 다른 방식이다.(105)
그녀는 '드디어'라는 말을 듣자 너무나 기뻐서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여기에, 나와 함께, 내가 있는 이곳에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라고...(106)
인간이 느끼는 운명, 우연, 사랑, 이 모든 것들은 <여기에, 지금> 있기에 의미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여기에 나와함께 드디어 네가 내가 있는 이곳에' 있을 때만이 의미를 갖는 것인데,
수십 년 떠나있어야 하는 이들에게 사랑이란 하나의 고집스런 상징물에 불과할 것이다.
<향수> 역시 그러한 감정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고...
작별을 놓친 사람은 재회에서 별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138)
작별을 잘 해야 한다. 이별할 때, 분명한 이별의 이유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재회의 기약을 가져야 한다.
버리듯 떠난 작별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상태로, 재회하는 상황은 더 어색해지고만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이런 일련의 감정들을 모두 겪으며 아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틀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인가?
인간은 진정으로 현재를 알 수 있는가?
그것을 심판할 수 있는가?(146)
그리하여 인간의 어떤 판단도 행복한 미래를 예약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향수 역시 그러하다. 고향으로의 귀환은 행복한 예전으로 자신을 되돌릴 것이라는 판단은,
늘 오류 앞에서 비틀거리게 마련인 것.
프라하를 떠나 덴마크에서 살았던 조제프에게 곤란한 질문이 떨어진다.
덴마크가 정말로 너희 나라라면, 너는 거기서 어떻게 살았니? 누구와 함께?, 말해봐, 너는 행복하니? 말해봐, 말해봐~!(161)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이주 노동자들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마찬가지로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주 결혼 여성들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하는 질문은 잔인하지만,
한국 사회 전반에 거쳐 나누어야 하는 질문과 대답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그들이 겪는 곤란으로 제한되지만, 곧 그 아이들이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 투입된다.
그러면 다시 제2계급으로서의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게 될 터인데,
그때 발생할 사회적 비용을 지금 미리 투입하는 지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다른 별들로 여행을 가는 꿈이 그녀를 매혹했다.
우주 멀리로.
삶이 이곳과는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며 육체가 필요 없는 곳으로 타루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우주 로켓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코 우주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짧은 인간의 생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검은 죽음의 장막으로 변할 것이며,
인간은 항상 거기에 머리를 부딪히며, 살아있는 모든 것이 먹고 먹히는 땅으로 다시 떨어질 것이다.(197)
이 우주의 비유는 오디세우스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더 환상적인 세상을 향하여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곳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미지의 우주라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짧아, 우주로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그 땅으로 떨어진다. 그 땅 역시 그를 반겨주진 않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쉽지 않다.
그의 주인공들은 일련의 사건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의 은유는 비슷하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과 그의 서술은 산만하다.
이러한 문체는, 그의 정신 분열적 사고를 반영하는 것일게다.
향수를 제정신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역설적 표현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인물들은 망명한 나라, 거기서 자리잡고 튼튼하게 잘 사는 것이고,
근데... 맘이 허전하기 그지없는 거라.
그러니 샤갈의 그림이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밀라 쿤데라의 글이 한 방향으로 쏠려 나오지 못하고,
그저 허방다리를 짚는 마음,
그걸 빛으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예술의 책무이리라.
그렇게 달려간 고향이었는데,
거기 20년만에 갔더니, 자기 삶의 터전은 거기가 아니더란 걸 깨닫고,
마음 아파한단 그런 이야기.
누구나 어디 살든,
거기가 낯설어 보이고,
더 좋은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어하지만~
자기 사는 곳이 가장 삶의 터전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 잘 살잔 이야기.
세계화의 미명 아래, 자기 살던 터전을 잃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세계인>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정신적 이해는,
아직도 관심 밖이기 쉽다.
이런 지점에서 밀란 쿤데라의 <향수>는 유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