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 천천히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책
풍경소리 글, 정병례 전각 / 샘터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얄팍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리고 글자가 적은 책을 읽고 싶었다. 한 페이지 읽고, 가슴에 책을 얹고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책을 만났다. 천천히 나를 들여다 보게 되는 책, <풍경 소리>

말하지 않으면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수없이 뇌까려야 하고, 너 없으면 못산다고 말로 주절거려야 하는 이 "빠롤(실현된 발화)"의 시대에, 이 책은 말하지 않아도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들, 있어왔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샘터 같은 책들에 간결하게 실렸던 글들인 듯, 특별한 주제의식 없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실어 두었는데,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아이들이 12년간 학교를 다닌 것을 불과 언어60문항, 수리30문항, 영어 50문항, 사회/과학 80문항의 220문항으로 판가름 한다는 것이 언어도단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아파 한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다고 한다. 아이들이 아픈 이유는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배를 타면 배멀미를 하듯이. 배멀미는 파도치는 대로 흔들리는 배와 흔들리지 않으려는 몸의 관성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뱃사람들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뱃사람들의 전정기관에는 파도치는 대로 흔들리는 배와 같은 리듬의 움직임을 느끼고 예정대로 흔들 수 있음에. 그들은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육지에 다다르면 멀미를 한다고 한다. 수험생은 온 몸이 밥이 되어 밥을 먹는 정신으로 시험과 하나가 되어야 아프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일 저녁이 되면, 60만 이상의 수험생은 이제 겨우 적응된 바닷생활에서 뭍으로 내려오게 된다. 육지멀미. 이것은 또 얼마나 심할 것인가.

최선을 다해 온, 우리반 서른 다섯 명의 수험생들이 내일 아침, 모두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뜻한 것보다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반 간뎅이 큰 IMSSO말대로 '수능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지녔기 바란다. 내일 아침 고사장 앞에서 아이들 손이나마 잡아주고 나면 조용한 절에라도 가서 서른 다섯 이름을 되뇌며 그들의 마음에 안정이 깃들기를 기도해야 하리라.

원효 스님의 말씀 중, 옷을 짓는 데는 작은 바늘이 필요한 것이니, 비로 기다란 창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비를 피할 때에도 작은 우산 하나면 충분한 것이니 하늘이 드넓다 하더라도 따로 큰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 그 타고난 바와 생김생김에 따라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다. 간혹 나더러 당신은 왜 선생님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답할 수 있다. 나의 쓰임이 선생님이라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온 힘을 바친다. 이것이 성패의 갈림길이다. 중요한 것은, 온 힘을 바친다는 것이다. 세상의 오욕에 나부끼지 말고, 온 몸이 바위가 되어 온 몸을 바쳐야 사소한 하나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더럽고, 불공평하다고 투덜댈 것 없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수레를 탓해야 하는가, 소를 다그쳐야 하는가. 내 몸을 바쳐 내 마음을 다그쳐야 탁한 세상에 앞으로 나아갈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부처냐고 묻는 물음에,

"부드러운 사람이 부처지"

어떤 것이 부드러움이냐고 재차 물으니,

"여유롭고 한가하면서도 고요하고 섬세한 것, 서걱거리는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것, 원만하고 원융한 그것이 부드러움"이라는 가르침은 골수에 새겨두고 반추해야할 화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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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11-1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힘을 바쳐야 한다..나는 너무 게으르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글샘 2004-11-2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둥아리만 살아서 적어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작 온 힘을 바쳐야 할 때, 세상이 너무 슬퍼서 아이들을 외면하고, 저를 다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수레가 나아가지 않는 현실에서 수레를 탓하지 말고, 소를 다그쳐야 할 때입니다. 내 온 몸을 바쳐 다그쳐야 할 때입니다. 진심을 모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