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 세계 문학 주인공들과의 특별한 만남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어제 애도예찬을 읽으면서 다양한 소설을 통해 죽음에 접근하는 이야기들이 여운이 남아 집어든 책.

뜻밖의 수확이랄까?

우연히 집어든 책 치곤 어제의 독서에 이어지는 맛이 감칠맛을 더했는데,

분석은 유사하면서, 방향은 조금 다른, 그래서 더 읽는 맛이 더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커리큘럼을 따라서 독서 클럽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

물론 책을 읽어와야 하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많을 듯 싶다.

 

<소통에 대한 간절한 희구> 이런 것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다.

<사랑>도 이 소통에 대한 치열한 한 방법에 불과하 수 있다.

넓게 본다면, <소통에 대한 간절한 희구와 좌절의 스토리>가 이 책의 테마를 포괄할 수도 있겠다.

 

내 말을 들어줄단 한 사람의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맘을 속속들이 알아줄 독심술의 귀재는 없을까?

내 마음을 읽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사랑이 필요하고, 오해가 생기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순애보(따라 죽는 사랑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의 희망 사항이면서도, 하느님도 이뤄주기 힘든 요구사항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걸고 붙잡아야 할 노릇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그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싱클레어(데미안)와 홀든(호밀밭의 파수꾼)의 힘겨운 방황이 끝난 후 그들이 얻은 것은

인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처절하게 방황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 눈부신 자유의 속살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고통이었음을 깨달은 그들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 가장 그리운 존재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난다 해도,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속에서, 이미 떠나간 그 사람의 그리운 모습을 발견한다.

저 멀리 내가 꿈꾸던 그 어딘가에서 삶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순간, 이 공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39)

 

사랑에 대한 매력적 소설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첫사랑의 매력은 사랑의 성공이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 매혹된다는 것,

사랑이 선사하는 아주 사소하고 디테일한 매혹의 매순간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첫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에 철저히 미숙하기 때문에 고수들보다 오히려 더 예민하게 사랑의 진풍경을 낱낱이 느끼는 것.

 

그래서 사랑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랑은 '독자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어서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보다

사랑 그 자체를 더욱 사랑하나.

그 순간 파괴되는 것은 <단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의 내면>이다

 

이런 사랑은 집착이 되고, 현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쉽다.

 

천국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지옥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지옥 속으로 함께 들어갈 유일한 동반자를 찾는 일.

 

그런 집착에 대한 이야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오페라의 유령이다.

이야기들은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애석하게도 슬픈 결말을 맺는다.

 

사랑에 빠지기 전,

사람들은 한번도 자신의 날개를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는 새들처럼 '자신의 전부'를 알 기회가 없다.

막상 사랑에 빠지면, 숨을 곳이 없어진다.

어떤 에티켓과 매너로 치장을 해도, 아무리 냉철한 척 포커페이스를 연출하려 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그 숨길 수 없음이 우리를 끝내 해방시킨다.

오만과 편견, 자존심과 자격지심은 사랑에 빠지기 전에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사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자존심을 챙길 여유도, 자격지심을 돌볼 계제도..

오만을 가꾸고 편견을 관리할 시간도 당연히 없다.

사랑은 내게있는지도 몰랐던 내 날개의 빛깔을 내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천변 만화한 빛깔로 매 순간 반짝이는 내 안의 날개를

세상 밖으로 한껏 펼치게 만드는,

오직 '나와 너'사이에서만 유효한 해방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와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아가씨들의 모습에 대한 변명이다.

소설 속 아가씨들보다, 정여울의 변명이 더 아름답다. 멋진 글이다.

 

<적과 흑>과 <춘희>의 안타까운 사랑을 보면서 '경이'와 '연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사랑은 한쪽의 경이 또는 다른 한쪽의 연민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 저토록 대단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이 '경이'의 본질이고,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슬픔이 '연민'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는 경이와 연민이 동급의 감정이다.

그의 사소한 눈길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의 하찮은 우울조차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그에 대한 경이가 커질수록 연민 또한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 이렇게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구절들만 훑더래도 세계 문학이 추구했던 삶의 증명들, 그 철학적 함의에 대한 논의들이 충분할 것 같다.

 

<동물농장>과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규칙이 사람을 만드는 끔찍한 역설과,

인간보다 훨씬 나은, 인간 중심주의를 위협하는 우월한 존재들에 대한 경탄을 읽어낸다.

인간은 생태계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똑같은...

생태계란 그물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그물코'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

 

반어와 역설로 가득한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가치.

 

야만인 존은

눈물없는 세계, 비극 없는 세계, 저항 없는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세계는 곧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이며 과잉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 감정의 과잉 혹은 잉여야말로 이야기의 원천이며 저항의 원천이고 나아가 예술의 원천이 된다.

 

세계는 갈수록 합리적 이성을 휘두르는 폭력주의자, 군산복합체 사회구성의 폭력에 길들어간다.

세계는 감정을 통제하고, 과잉을 제재한다. 빅 브라더의 시대가 이미 도래한 모양이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의 무대책 자유론... 숨 쉬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존재의 이유를 이렇게 외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셴바흐의 행보도 읽어둘 만 하다.

 

영감을 떠올리기 위한 도구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쉼 그 자체를 위한 쉼이었다.

무언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비우기 위한 여행.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계산없는 휴식임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눈에 띈 곳만 골라 추려 봤지만,

더 멋진 구절들도 많을 것이다.

 

소설들을 차근차근 읽고,

이 글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휴식을 가지다면,

정말 멋진 세계문학 기행이 될 수 있겠다.

 

이런 멋진 책을 권해준 멋진 친구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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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6-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좋은데요. 시립도서관에 비치해달라고 신청해야겠어요.

어제 나의 삼촌 부르스리 1권을 대출받았어요.
지금 다른걸 읽고 있는 중이라서 목요일에 하루 월차 냈는데 그때 확~ 다 읽어 버릴려구요.
너무 기대가 되요. ㅎㅎㅎ

글샘 2012-06-19 09:35   좋아요 0 | URL
네. 애도예찬이랑 이 책이랑 참 좋더군요. ^^

나의 삼촌 부르스리 1권으로 월차가 메워질까요? ㅎㅎㅎ
여행이라도 가시지~

아무개 2012-06-19 10:27   좋아요 0 | URL
전 지하철 타고 책 읽는거 엄청 좋아하거든요.특히 여름 평일엔 시원하고 조용하고 아주 좋아요.
그래서 브르스 리를 가지고
여기 제가 사는곳 1호선 끝에서 전철타고 저쪽 끝 인천까지 갔다가
월미도 쫌 울쩍한 맘으로 봐주시고,
차이나 타운에가서 짜장면 먹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

왕복 5시간정도 걸리니까 쉬엄쉬엄 읽어도 1권은 다 읽을수 있을꺼 같아요~

글샘 2012-06-19 13:1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여행일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리와 함께하기엔 너무 공공장소인데요. ㅋ
혼자서 좀 정신나간 듯이 웃을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