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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섹시하다. 무지 섹시하다.
난 이런 책을 보면 흥분해서 주체를 못한다.
그래서 끌어안고 쓸어보고 다시 안아보길 멈추지 못하는 거...
표지는 선명한 빨강, 이다.
그 빨강의 윗부분으로 10% 정도의 그라데이션이 주어지고,
빨강을 돋보이도록 도드라진 코팅처리조차 섹시하다.
그 아래,
제임스 딘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돋보이는
애인이 담배를 꼬나물고,
트렌치 코트 차림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지은이는 강신주다.
이 섹시한 남자는 편집자 김서연을 저자 이름 옆에 떡하니 앉혔다.
이 사람이 내 여자친구다! 이러고 온 세상에 공표하듯이. ㅎㅎ
그 마음이 정말 섹시하다.
속표지 또한 섹시미의 전형인데,
짙은 장밋빛 레드 속표지에
제 눈을 가리키며 '나는 시인이다!'를 힘주어 말하는 듯한,
강한 시선의 김수영이 화면 가득이다.
책 읽기도 전에 짜릿, 하다.
한국 시의 최고봉은 단연 서정주다.
한국어를 어쩜 그렇게 감칠맛나게 구사하는지... 정말 서정주는 매력적이다.
근데... 이 사람 시는 좋은데... 그의 인생은... 결코 훌륭하지 않아 치욕적이다.
강신주, 한 마디로 서정주를 디스(disrespect)한다. 통쾌하다. ㅋ
감성의 차원에서는 구원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문정신이나 이것을 지키는 차원에선 구원될 수 없다. (167)
뒤에 가서 아도르노를 빌려 뒤통수를 한번 더 가격한다. 보낼 때 확실하게 보내야 한다.
분단과 독재의 시대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191)
고은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여러 해 꼽아왔다.
노벨 문학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수상 경향을 띠는데,
고은이 수상할 만큼 한국의 정치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고은의 시는 올곧지만, 서정주만큼 언어 구사가 유려하지 않다.
고은의 걸어온 발자국 - 민족문학 작가회의- 을 높이사는 프리미엄이 그의 이름에 붙어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시편(poem) 또는 시(poetry)라는 것에서 가장 탁월한 성과를 획득한 이라면,
역시 김수영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서 늘 폄훼되어 왔고,
김수영의 시를, 그의 글들을, 그의 사상과 인간상을 총체적으로 '해석'한 책으론 이 책이 최고다.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한 절절한 연애 편지다.
러브레터의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큰 구절은 첫 문장이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문장,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이성복)
이 문장이 가진 무게는, 육중하다.
이 책 전체를 끌고 가기에, 연애편지론에 충실한 첫문장을 품었다.
여느 책들은 모두 특정한 '체재'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선 강신주가 '정신적 키를 한 뼘은 키워준 김수영을 그리며' 쓴 절절한 연애편지이므로,
서술의 '방법'은 없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므로...
김수영, 그의 정신은 '자유'다.
인간에게서 '자유'만큼 섹시한 인문 정신이 또 있을까?
자유는 매혹적이다.
그렇지만, 자유의 향기에 매혹되는 자,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자유'를 이야기하는 순간, 독고다이로 맞설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므로...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자유'라면,
그 자유가 관통하는 인간은 '단독자'이다.
한국처럼 굴곡진 근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뇌 속엔 자유에 대한 본능적 공포감이 총탄처럼 '장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만세!
그래서 강신주는 이 시를 들이민다.
독자는 누구라도, 이 시구에 대하여 금세라도 '장전된 총탄'을 발사할 듯 긴장한다.
사포처럼 살갗을 도려내는 일상의 적들과 싸우느라......
얼마나 아팠을까, 그 사람.
이 책의 편집자가 김수영 전집을 넘겨주며 속지에 적었다는 이 말,
역시 러브 레터에 필수 요소인 '짜릿한 구절의 인용'이다.
이 책을 잘 읽으면 러브 레터에 통달할 수 있겠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간접 체험으로도 어느 정도 다가갈 수 있으나, 딱 하나
제 '온 몸'으로 겪어내기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이다.
그 지독한 이름, 사랑의 방식 이외에는 김수영을 설명하고 번역하고 해석할 수 없었다는 듯,
이 책은 치열한 그래서 아름다운 러브 레터로 창작되고 있는 거다.
러브 레터치고 섹시하지 않은 글은 없는 법이니까.
러브 레터를 쓰는 사람이 품지 않는 생각. '이만하면' 이다.
이만하면 잘 썼지?
이만하면 만족하겠지?
이런 인간, 사랑은 못해본 종족이다.
사랑에 빠져 러브 레터를 써본 사람이라면, '이만하면'이 불가능한 어법임을 알 거다.
'책은 도끼다'란 책이 있다.
카프카의 말에서 온 거다.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이 섹시한 강신주의 김수영은...
도끼였다. 사랑이었고, 죽음이었고, 추방이었고, 자살이었다.
김수영은, 삶과 죽음 그 자체로 <상처>였고, <자극>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섹시는 미완인 채로 완성된다.
남루한 것을 남루한 것으로 긍정하지 못하고
번지르르한 기름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하는 것(350)
삶은 이런 섹시하지 못한 돼지들 사이에서 비비적대게 된다.
그래서, 섹시 코드로 무장한 이런 책이 세상엔 인문학의 이름으로 가득차야 한다.
이 책의 섹시함의 완성은 그림에 있다.
내용과 꼭 맞춤한 그림들이 한 페이지씩 차지하고 있어,
김수영에 대한 연애 편지를 읽는 사이사이,
그 사랑을 한눈에 담지할 수 있게 하는 관조의 순간을 통찰하게 해 준다.
러브 레터가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배우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마음에 담아 보라.
그리고 품고 살아보라.
삶 자체가 러브 레터의 번역이자, 사랑 그 자체인 단독자로 오롯이 설 수 있는 행운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 섹시한 러브 레터를 읽고 나면,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하게 된다.
그걸 질병으로 말하자면, <벅찬 영혼 신드롬>쯤 된다.
이 질병은 불치병이다.
그리고, 전염성이 강하다.
가난한 영혼이여,
벅찬 영혼 신드롬에 전염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섹시한 러브 레터를 읽지 않고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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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틀린 맞춤법을 찾아내는 일은 마음아팠다.
연애 편지에서 맞춤법을 운운하는 건 쫌 치사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강신주가 제 옆자리에 떡하니 여자친구라고 앉힌 김서연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사랑을 위해서라도 굳이 밝혀야겠다.
독자로서의 애정을 가득 담아서...
이 책이 1판으로 절판될 것이 아닐 것이므로...
(편집자님이 연락을 주셔서 오탈자는 지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