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싼 인연
이홍섭 지음 / 해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스님이 아닌 사람이 절간에서 쓴 글은 드문데, 저자는 절간을 친숙하게 넘나들며 감상을 담아내고 있다. 8500원이란 가격도 책의 크기에 비해 좀 비싼 편이고, 사진이 예쁘긴 하지만 지질이 너무 무겁다. 삶은 이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거늘...

상쾌한 가을, 따가운 햇살 맞으며 원색의 점퍼 차림으로 등산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몸은 속세의 쾨쾨한 골방 형광등 아래서 밤까지 아이들 닦달하는 처지이다보니 책으로나마 가을 소풍의 호사를 누린다.

절집들에 얽힌 숱한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내 마음 속의 찌끼들이 가벼이 녹아 내리는 듯 하다. 그래서 난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 이런 글들을 즐겨 읽는다. 내 마음의 욕심과 헛된 상념들을 버리지 못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글을 통해서라도 정신적 다이어트를 체험한다고나 할까.

제목부터 예쁜 책이다. 곱게 싼 인연이라. 마치 향기나는 추억을 담듯이 곱게 싸는 인연. 아름답다거나 화려함과는 다른, 곱다는 말이 주는 단아한 품세가 내용을 한결 경쾌하게 한다. 물론 전문적으로 불교를 논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서 나처럼 허투루 절집들을 구경다니는 이들에게 어울린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큰 대자로 누우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만사휴의다. 고행의 극한 상황들을 연상해본다. 설산에서 6년간. 눈이 떠지고 허리가 펴진다. 얼마가 지나면 또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골고다의 십자가. 눈이 떠지고 허리가 펴진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 다시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뒷방에서 잠자는 스님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번쩍 뜨인다. 수마도 고통도 물러갔다. 화두가 앞장 서며 빨리 가잔다. 길은 멀고 험하지만 쉬자 않고 가면 된다면서... 이런 용맹정진의 구절들은 내 정신에 찬물 세례를 퍼붓기도 하고...

비치코머(beachcomber)가 되어 모래사장을 빗으로 긁듯이 한적한 삶의 여유를 꿈꾸게 해 주기도 하고...

줄탁의 인연. 줄이란 병아리가 알 속에서 다 자라 세상 바깥으로 나오려고 알 껍질을 쭉쭉 빠는 것을 말하고, 탁이란 어미닭이 그 순간을 알고 바깥에서 알을 탁탁 쪼는 것을 말한다. 줄탁동시란, 이 두개의 동작이 일치하는 순간, 그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눈물겨웁지 않은가. 줄탁의 인연을 맺은 병아리와 닭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록 병아리는 줄탁동시의 그 순간을 잊게 마련이지만, 닭에게는 그 순간을 추억함으로 노년을 보내는 것이 아닐는지...

임제선사의 일갈... 질질 땅에 끌려다니지 말라.

변소에 단청하지 말라.

惺惺歷歷密密綿綿하라. - 오직 또렷이 깨어 역력하고, 은밀하고 끊임없이 하여야 한다.

무릇 공부할 때는 닭이 알을 품듯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고, 애기가 엄마 생각하듯 해야 한다.

살아있을 때는 삶, 이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밥을 먹을 때는 몸과 마음 전체가 밥이 되어 밥을 먹어라.

눈을 뜨자. 아니, 누가 내 눈을 감겼단 말인가.

가도 가도 본래의 그 자리요, 왔다 왔다 해도 출발한 그 자리다.  行行本處 至至發處.

이런 절절한 말들을 쉽사리 듣다가도 간혹 심장에 가시가 되어 걸린다. 하긴 매일 똑같은 걸음으로 걸을 수 있으랴. 조금 아파서 쉬는 날도 있어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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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2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하신 말씀 같습니다. 갈 길이 멀군요..^^

글샘 2004-11-2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에게 쓴소리를 적어 본 겁니다. 비치코머가 되어 백사장을 쓸어 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