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난, '파랑새' 이야기는 세상에 너무도 흔하다.

그렇지만, 늘 파랑새의 귀결점은 '우리집'이었다.

우리집의 핵심은 '나'다.

 

왜 읽는가?

저자는 카프카의 한 구절로 답을 대신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카프카)

 

만약 나더러 독서 경험을 나누는 독서회를 꾸리라면 어떤 책을 꼽을까?

나라면, 조르바, 안나 카레니나, 미셸 트루니외, 광장, 법정, 손철주와 오주석 정도가 떠오른다.

시인 김선우나 장영희, 성석제 정도도 이야기할 것이 많을 것 같고.

 

이 책에선 이철수로 시작해서 최인훈, 이오덕, 김훈, 보통, 고은, 김화영, 카뮈, 쿤데라, 한형조까지 자신의 독서 세계를 일람하여 보여준다.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 期必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구절로 독자의 독서 습관에서 '근기'를 중시하여야 하지, '양이나 질'에 매몰되면 안 되는 것을 보여준다.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

어떤 책을 읽는다고 남들에게 보여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 자체가 다 그렇다.

 

이철수 판화야

워낙 명문이 많지만,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심장을 콱, 움켜쥐는 말이다.

탐진치 삼독에 얽매이는,

줄기를 놓지 않는 나를 꾸짖는 소리 같다.

 

핑크 마티니의 <초원의 빛>을 들으면서,

삶의 속도를 생각한다는데...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자연에 대한 관조는 역시 탁월하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결핍이 결핍되어 있는 시대.

이런 말들을 얻는 일은 소중하다.

 

삶에서 만나는 사랑에 대하여,

보통의 이야기 한 도막.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나보다 상대가 중요해진다.

어떤 상대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도 인용하고, 저 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훌륭한 사람과의 대화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한 것이다.

 

감각적 경험의 획기적 기억을 보통은 키스를 예를 들어 이야기한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물길의 소리

                                 - 강은교 -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강은교의 시를 읽노라면, 키스보다 더 진한 감각적 경험이 서로 얽혀드는 몸의 시를 읽게 된다.

허리를 쓰다듬는,

뿌리를 매만지는,

햇살을 핥는, 핥아대며 반짝이는, 

몸을 비비는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육감적 언어들이 얼마나 펄떡거리며 살아있는지...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려고 한단다. 

알랭 드 보통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고 나면 촉수가 더 예민해 지는 것 같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책을 읽을 때는 다양한 사고들이 서로 호환되고 지식이 쉽게 흡수되는 경향성이 

물매가 빠른 바닥처럼 속도감이 나니 말이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에 만난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  (291)

 

나는 지금 '한 사람'을,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 봄날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를, 안나 카레니나를, 한형조를, 카뮈와 김화영과 장 그르니에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인생의 봄날,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과 조우하고 싶은 이라면, 기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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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2-03-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읽으셨군요. 보물 같은 책이죠. 섬은 사놓고 아직 들추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겨울안에 꽁꽁 갇혀있는 느낌이지만, 이제 곧 봄이 시작되겠지요.
해운대에서 누리마루까지 이어지는 동백꽃 가득한 산책길이 그립네요.

글샘 2012-03-25 20:07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책들이 참 좋더군요.
저랑 취향이 좀 비슷한 듯. ^^

장 그르니에의 '섬'은 아무때나 읽히는 책이 아니에요. ^^
도서관에서 1년 중 기분이 제일 나쁘고, 착 가라앉아서 사표를 쓰고 싶은 날,
그런 날 읽으면, 장 그르니에란 남자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말을 걸어 올 겁니다.

화창한 날, 그 남자는 말 안 걸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