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 1
요하네스 키어쉬 외 / 밝은누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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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다니던 그 어둡던 시절, 목놓아 부르던 노래들에는 '자유'가 참 많이도 들어 있었다. 그 때는 무엇이 그리도 울적해서 그토록 자유를 목놓아 불렀던 것일까. 밤늦도록 골방구석에서 자유를 부르짖다가 가로등 기다란 그림자따라 돌아오는 길조차도 답답웠던 것일까? 그러나, 그 때 나는 정말 자유롭고 싶었던가? 관념적인 구속과 관념적인 자유에 파묻혀 대학생활 자체를 혐오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는데...

자유를 실천하는 교사가 되리라고 마음먹고 교단에 선지 벌써 십육년째. 날마다 파리한 형광등 아래 수그린 뒷꼭지만 노려보며 졸고 있는 나는, 간수가 아닌가. 자유를 묵살하고, 자유를 구속하는 간수. 학교 어디에 자유가 있다는 말인가. 노예들이 해방되고 걸어들어간 곳은 노동자라는 이름의 갑옷이었듯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좌절하고 자조하던 나에게 어깨를 툭 치며, "자네 뭘 그리 절망하는가.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절망하는 건 비겁한 일 아닌가?"하며 심장을 건드린 책이 발도르프의 자유학교였다. 작년에도 일본 사람이 쓴 슈타이너 학교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었지만, 그 땐 별로 좌절하지 않았던가보다.

우리 아이가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서 밤 열두시 넘도록 학원엘 뛰어다니면서 얻어오는 성적으로 좌절하다가 겨우겨우 들어간 대학이란 곳은 교수들의 밥통 채워주는 사기업이고, 실업자 양성소인 현실에서 무엇을 바라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시 배우러 학원에 가는가. 아니, 정말 뛰어난 어린이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정석을 배운다는데, 그래서 들어간 대학에 도대체 무엇이 있더란 말인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그저 우리끼리만의 경쟁,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른 녀석을 짓밟고 '좀더 비싼 내'가 되어본들, 우리 학교의 경쟁력은 세계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않는다. 진정한 경쟁력은 박찬호나 박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의 저력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이 거론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는 향학열, 교육열은 부끄럽게도 운동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아닌가.

학교는 빌게이츠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 박찬호나 박세리를 기르는 곳도 아니고, 한류 스타를 배출하는 데는 더더욱 아니며, 세계적인 영화감독 김기덕을 가르칠 수는 전혀 없다. 김기덕, 그는 학교와는 연이 없는 가방끈 짧은 사람이 아니던가.

학교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자기의 미래를 꿈꾸게 하는 곳이라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학습은 대학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가지 않아도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하고, 중고등학교 공부가 하기 싫은 숱한 아이들을 학원으로 밀어넣는 행위는 자살방조에 다름 아니다.

슈타이너의 교육학을 대학에서 배웠던 적이 전혀 없었건만, 그의 중심에 '사람'의 '영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지난 십육년간 나는 과연 우리 반 아이들을, 내가 수업시간에 만나는 아이들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났적 있었나. 성적표를 보고, 이 자식은 국어, 영어는 잘 하는데, 왜 이렇게 수학을 못하나 하고 비평만 할 줄 알았지, 얼마나 수용적이고 학생의 미래를 걱정했던가.

오늘 면담한 우리 반 아이에게도 대학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라고 했지, 미래를 위해 긍정적인 꿈을 갖도록 어떤 말을 할 수 있었던가.

"어린이는 자신이 받은 성적 평어라는 것을 이듬해에 매주 한 차례씩 말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서 무의식으로 자기 발전에 대해 직접 배울 수 있게 되어야 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 어떤 충동을 얻어야 한다."

이런 것이 교육자의 할 일이다. 아이들에게 심사원려한 끝에 적어주는 한 마디는 무의식중에도 자기 발전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하고, 학생의 발전을 위해 어떤 충동을 직관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학생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어린이, 학생을 대상으로 보는 태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세다.

이 책 두권은 자유 발도르프 학교의 하나인 루르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의 이야기를 1권에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2권에서는 교육과 학습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깊은 사고의 힘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건물의 설계에서부터, 음악, 율동, 외국어, 문학, 미술과 각종 학습의 방식(오이리트미, 포르멘, 에포트 등)에서 얻은 영감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다만,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너무도 멀리 있어서 자유학교를 꿈꾸기에는 내가 너무 늙은 게 아닐까 하는 좌절이 다시 너스레를 떨지만, 좌절의 끝에서 만나는 희망은 숨통을 조금은 틔어 놓는다. 깊이 공부할 것이 생긴 이 가을 아침이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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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10-0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젊은날 지녔던 생각을 놓치지 않으시려는 모습이 아름다와 보입니다.
말해도 소용없는 우리 교육 현장에서 어떤 괴리를 느끼시고 또 어떤 대안을 찾으시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전 아직 아이가 없지만 ...후에 아이가 생기면 과연 만연한 체제로 부터 소신을 갖고 도전할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무었을 할 수 있을까요? ... 제대로 된 책을 읽고 현실을 한탄하고 현실의 잘못된 걸 지적하고 무엇이 좋고 나쁜줄 알고.....뭐 그렇습니다.근데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앞으로 해야할까요? 늘 궁금합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다른 대안을 꿈꾸면서 미래에 수능과 내신을 위해 아이를 떠밀어야한다면 전 자기모순에 빠지게될 것이고 ..... 머릿속에서 꿈을 꾸며 현실을 쫓으며 부질없는 타협에 남들도 다들 그런다는 자기위안-마스터베이션-을 하며 머리만 큰 기형으로 살아야하는 건 아닐까...심히 걱정되는군요.
저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님의 학교 학생들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