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안준철의 교육에세이
안준철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그는 '천상' 선생님이다.

 안준철 선생님이 쓰신 글을 전에 인터넷을 통해 읽은 적도 있고, 아이들에게 소개해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책으로 읽게 되니, 역시 사랑이란 것도 급수가 있고, 경력이 있고, 체계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선생님은 역시 나보다 한 끗발 위시다. 한 급수 높으시고, 한 경력 하신다. (여기서 한 급수는 무한급수이다.)

제목에 '아이들'이 크게 인쇄되어 있다. 마음이 뭉클해온다. 선생에게 아이들은 존재의 이유 아니던가. 사소한 포인트의 차이에서도 아이들은 존재론적 가치를 드러낸다.

난 오늘도 가녀린 여자애들 팔뚝을 뭉툭한 30센치 자로 찰싹찰싹 때려 주었다. 어제 수업에 도망간 죄로. 덕분에 오늘 오후 자습 시간엔 교실 가득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공부하는 애들 뒤에서 안준철 선생님의 글을 읽자니 도저히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 혹시 애들이 이 책을 어깨 너머로라도 읽고 '선생님은 뭐하는 거예요?'하고 묻는다면, 난 사표라도 내야 할 판국이다.

그러나, 역시 사표를 낼 필요는 없다. 안준철 선생님의 글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아이들의 이야기는 늘 성공하고 있는 해피엔딩인 것으로 보이지만, 선생 경력 십오년이 넘은 내 눈에는 행간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고민들이 더 인간미로 다가왔다. 선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받게 되는 아이들의 상처와, 교사 중심의 학교에서 당하는 아이들의 패배, 굴욕, 굴종, 반항, 증오의 보이지 않는 커리큘럼들.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 새로 받을 때의 서운함과 설레임, 날마다 패배하는 교사의 무거운 어깨와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는 빈 심장의 사랑. 졸업식 마치고 아이들을 다 돌려 보낸 뒤 빈 둥지를 잠그며 느끼는 우울증.

난 실업계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없지만, 아이들이 두렵다. 내가 아이들을 포기하게 될 것이기에 두렵고,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에 두렵고, 무엇보다 삶에 지기만 한 아이들을 만나서 싹을 틔울 자신이 없어서 두렵다.

안준철 선생님의 들풀이란 시를 분필통 뒤에 오년을 붙이고 다녔더니 너덜너덜해 졌다. 가끔 뒤집어져 있는 분필통을 보며 나를 부끄러워했는데,

들풀을 보면 생각난다. / 마음으로 불러 준 적 없는 아이들../ 마음으로 읽고, / 눈빛으로 알고, / 따스히 흘러 / 빗장을 열게 하는 사랑 / 나눠 준 적 없는 아이들. / 그런 사랑 받아 본 적 없어 / 더 가슴 태웠을 것을./ 더 다가오고 싶었을 것을. / 들풀을 보니 생각난다. / 화사하지 못하여 / 키에 가리워 / 먼 발치로만 서성이던 아이들 / 한번 더 다가섰으면 / 꽃이 되었을 우리 아이들...

여름방학도 없이 매일 아침 여덟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학교에서 형광등 불빛 밝히며 형광지공을 쌓는 우리 반 마흔 명의 꽃송이(아, 한나는 수시1로 합격했으니 39명)들에게 내일은 맛있는 점심이라도 사 줘야 겠다. 그리고 해운대 바닷가 가서 미니 소풍이라도 시켜주고싶다.

샛별이, 효정이, 미희a, 미희b, 민정이, 수빈이, 수영이, 이은이, 현주, 희야, 수진이, 재희, 혜성이, 인혜, 자영이, 민혜, 예원이, 지선이, 혜란이, 선애, 세령이, 지윤이, 햇님이, 소연이, 유리, 혜림이, 또 혜림이, 근영이, 선아, 지영이, 지윤이, 혜진이, 수민이, 지현이, 이슬이, 나혜, 미나, 혜원이, 40번 지선이까지(서른 아홉 명 외우느라 한참을 걸렸지만, 번호대로 외운 게 대견하다.) 마지막 여름 방학을 잘 보내고 올 가을엔 머지 않아 열매 맺은 가을을 향하여 좋은 결실 가지길 기도한다.

내가 대학 시절에 이상석 선생님의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읽고 감동에 젖어 저자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답장도 받았고.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나의 '교사 성적표'는 정말 볼품 없다.

십오년 동안, 주변의 선후배들의 나쁜 점은 곧 배웠으며, 좋은 점은 비판하는 교사였고, 불평이 많았으며,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교사였다. 그러나, 이제 좀 알만도 하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나를 얼마나 가르쳐 왔던가를, 그리고 정말 교사는 어떻게 살아 보여야 하는지를 요즘 몸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한 십년 정도만 더 배우면 나비가 되어 아이들에게 날아가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안선생님처럼 꿀벌처럼 벌집을 만들어 로얄제리를 만들진 못할지라도, 그저 나비로 꽃들의 가루받이에 나풀나풀 옮겨다니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 that's why they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지만, 오늘은 선물이라고, 그래서 오늘을 프레즌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아이들과 날마다 온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돼서 행복한 밤이다.

내가 초임 시절에는 방학 때, 아이들이 그리운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면서 방학에는 아이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개학이 두려워지기도 했고... 요즘은 방학이 없는 일반계 있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다.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기다려 질 때도 있고... 이제서야 철이 들어가나 보다.

어떤 상품 광고처럼, 정말 "교사라서 행복해요"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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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4-07-3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라서 행복해요.. 라고 '아직도' 말할 수 있다니 진심으로 마음 깊숙히 부럽습니다. 초심을 잃는 것이 두려워야 되는데, 아이들이 두려워 교실로 돌아갈 것이 두려운 저는, 영원히 덜큰 미숙한 교사인가 봅니다. 그래서 늘, 두렵고 우울합니다. T.T

책읽는나무 2004-07-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라서 행복하시다구요??
글샘님의 반 아이들은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드네요...^^

글샘 2004-08-0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방학 중인 토요일. 방학중인데도 매일 학교를 나오는 방학아닌 방학. 우리 반 아이들 두 명이 수시 1학기에 합격을 했습니다. 지영이랑 세령이랑. 나도 기쁘고, 합격한 아이들도 기뻐서 울고, 옆의 친구들도 감격해서 같이 눈물을 뿌리고... 그런 모습이 아름다워 모두 같이 닭갈비집 가서 점심을 볶음밥으로 먹었습니다.
자기들 즐기기도 벅찰텐데, 아무 것도 해 준 거 없는 담임한테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한 통이랑 5천원짜리 도서상품권 한 장 사서 쥐어주더군요. 고맙다면서.
십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보다 더 귀한 도서상품권 한 장.
오늘은 정말 교사라서 행복했답니다. 삼천원짜리 밥을 사십명 사 줘도 십만원이면 되는데, 아이들과 느끼는 밥맛은 억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꿀맛이었답니다.
이제 남은 서른 일곱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피곤해도 힘을 내야죠.
제가 초심을 잃지 않은 걸 대단하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일 아닐까요. 가능성 덩어리인 우리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일.

해콩 2004-09-1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충, 야자, 수능, 결국은 대학.. 실업계 4년 근무 후, 인문계로 옮긴지 2년째 인문계 담임 경력 1년차인 제겐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아이들이랑 '살아가고 싶은데, 삶을 나누고 싶은데' 어떤 아이들은 제게 자신을 감시하고 감독해 달라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더 많은 자유를 원합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중심 못잡고 늘 갈팡질팡하는 담임입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지는 못하면서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를 떨치지 못하는.. 희망과 노력과 성공을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아이가 있는 것 같아 (혹은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실업계 아이들이 생각나서 더 그럴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어차피 그런 곳이라고 하기에는 안준철 선생님의 글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인문계 아이들도, 실업계 아이들도 행복한 오늘을 살아갈 수 없는 현실...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