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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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만세 

이것이 원래 시인이 제시한 시집 제목이었단다.
그런데, 편집자들은 편집증적으로 그 제목을 거세했다.
삶이라는 직업이라는 제목은, 이 시집을 관류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인의 말대로 어차피 언어는 <통, 영> 진의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고,
어차피 그 게바라는 저 게바라랑 다른 거니깐, 아무래도 상관 없겠다. 

지포라이터로 짙은 담배 연기를 풍기는 체 게바라의 사진을 떠올리듯,
이 시집을 읽노라면 어느 항구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끊었던 담배라도 물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설이라고 몇 자 써붙은 강정의 '줄타기 광대' 이야기는 그래서 다른 이야기면서,
또한 한 순간에 몰두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프로의식, 장인 정신이 드러나는 이야기로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사라지자,
그 빈 자리를 보러 오는 관람객의 수가 두 배로 늘었더란다.
'부재'에서오는 '존재 증명'이라고나 할까.
삶이란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직업인 '삶'에는 부재함의 대척점에 선 존재함의 부조리가 항존하는 법이다. 

일단 담배를 피워물 것,
무한대로 연장되는 아침 햇살을 볼 것.
환등기 불빛을 조절하고
커피 물을 끓일 것.
음악은 그것으로 끝. 
스웨터의 체온으로 차가운 사랑을 덥힐 것
무릎엔 무릎 담요
잠들지 않고 재잘대는 상념엔 수면 양말
커튼을 살짝 걷고 하늘의 채널을 맞출 것.
대상을 확대하거나 축소할 것.
시는 절대 완성하지 말 것.
지그시 담배를 피워물고
모든 시간의 저녁만을 사용할 것.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꿈꾸면서 죽어갈 것. (마 리베르테 중) 

시인이 추구하는 바는 그런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자유로운 삶.
그곳은 시베리아 벌판이기도 하고, 만주 벌판이거나, 사막 또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이기도 하다.
문명의 세례 따위는 받지도 못한 곳에서
삶의 운명에 따라 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그러면서도, 하늘의 채널과 주파수를 맞출 것.
그것은,
시인 박정대의 <문명에 대한 혁명>이다.
그래서 그는 체 게바라 만세!를 시집 제목으로 붙이고 싶었던 것일게다.
물론, 어쭙잖은 문명은 그의 동지를 거세하고 말지만 말이다. 

거기 완성, 따윈 필요 없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그대와 나는 세계의 가장 충분한 심장이다.
삶이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나의 플럭서스) 

* 플럭서스 : 전위 예술

삶은 모두 유일하다.
삶에서 '일반'은 필요 없다.
그렇지만, 다들 '일반적'으로 살라고 하고, '이반'을 개무시한다.
허 참, '이반'을 플럭서스라고 한다.
삶은 모두 유일하다니깐! 

손을 내밀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으면
세상의 한 끝이 내 손위로 내려와 차갑고도 부드럽게 녹는다.
나는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바라본다. 누운

사랑은 멀리에서 이렇게 나에게로 당도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운명처럼 다가온 눈송이, 
눈송이 녹은 물, 눈물
누운 물
눈 녹은 물조차도 일반적이지 않다. 유일한 눈물, 누운 물을 바라보는 눈. 시인의 눈. 

그래서 그는 <시인>이란 삶이란 직업에 대하여 프로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는 <클리셰에 대한 저주와 증오>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의 살아있는 오감에서는 바람조차도 풍부한 냄새를 머금고 있다.
<바람에서는 안나푸르나의 젖가슴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욕망이 바람처럼 나를 관통한 그 거리엔 고독만이 텅빈 한 켤레의 신발로 남았다.
나는 이제 신발을 벗고 또다른 나의 고독 속에 들어가 눕는다.  
고독이 황홀하다면 그건 정말로 고독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도 이런 황홀이 필요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성'을 지닌 인간에게,
클리셰를 허용하지 않는,
풍부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시인에게,
고독은 운명처럼 감겨든다. 

그래서 그는 리스본, 아바나, 포탈라, 그리고 운명의 노래 파두(Fado)를 읊조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칠월엔 당신의 우산이 되어 드릴게요
(그럼 팔월엔, 구월엔 누구의 우산이 될 건데?)
나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영원은 모든 순간 속에 있었다. 

그래, 본질적인 혁명이란 어쩌면 불멸의 시로 불멸의 혁명, 그 불꽃을 피워올리는 거 

일회성, 매 순간을 칼날 위의 달팽이처럼
끈끈이 액으로 면도날을 덮어야 사는 것처럼,
베이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날카로운 절정에 서야하는 것처럼,
순간을 살아야 영원을 삶을 생각하는 시인에게,
시란
본질적으로 혁명이고,
그것이 불멸인 거.
그 불멸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거. 

낙타는 사막의 시예요.
온몸으로 온 발바닥으로 이번 생을 횡단하는 가장 뜨거운 시.

견디기 힘든 사막의 열기를 꾸벅꾸벅 받아내는 낙타야말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시 그 자체로 보이는 모양. 

글쎄라는 표현은 내 영혼의 클리셰. 

이 글은 단지 시간의 허공 위에 수놓인 무늬처럼 남을 것.
그러니까 결국 이 글은 흑백사진의 뒷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날 것. 

한켠 겸손하고, 한편 솔직하다.
정답은 모름이고, 표현은 글쎄,다. <통, 영> 모르겠는 듯.
보여달라면, 사진의 뒷면이랄까.  하~

   
 

세월은 아무도 모르게 자작나무 속에서 자작자작 자신을 쌓아갑니다. 

눈발들의 모스 부호를 고독고독 해독하고 있는 여기는 무가당 담배 클럽 다락방 분소 

시는 무력하지만 너무도 무력해서 무력무력 혁명의 불꽃을 피워올리기도 

 
   

담배 하나 꼬나물고,
풍산개 휴전선 넘나들듯,
되는대로 적어대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모국어는 이렇게 켜켜이 쌓여있던 것이다.
비록 브레히트를 빌려서 <매일 아침 밥벌이를 위해, 나는 허위가 매매되는 장터로 간다. 희망에 차서 상인들 사이에 끼어든다>고 하고는 있지만. 

사방의 고립, 마음은 독립
고립이 사람의 내면에 불씨를 지핀다는 것 아는 사람은 안다 

이런 그의 마음은 파디스타의 별,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남긴 이런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파두(Fado)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무리 발부둥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
왜냐고 물어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삶의 진실이란,
결국 순간이며
그래서 영원이고,
일회성이며 고독이고,
나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은
오직 나일 뿐인 것.
누구에게나 옳은 '일반적'인 것은 없는 그런 것.
유일한 순간적 삶에 대한 영원한 이야기... 

 

<ebs 지식 프라임, '삶의 영원한 슬픔, 파두' 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0208617  

<포르투갈의 위대한 파디스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듣기>

http://cafe.daum.net/daum1000/KF6L/4631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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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8-1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선물 받아서 가지고 있는데, 좀 어려웠어요.
별점이 아주 후하신걸요~

글샘 2011-08-21 13:41   좋아요 0 | URL
때로는 시인의 시집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저는 그럴 때, 어떤 낱말 몇 개, 상황 몇 장면만으로도 위안을 받곤 한답니다.

박정대의 이 시집에서도 저의 현재와 맞물린 단어 몇 개가 감동적으로 달려들었던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