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득록, 정조대왕어록
남현희 엮음 / 문자향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바쁠 망(忙)자를 깨어 보면,
'마음 심' 변에 '망할 망'을 쓴다.
곧, 마음이 죽는다는 말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인간은 진면목을 놓치고 살게 된다.
정신이 없도록 바쁜 일은,
그래서 하루라도 웃지 않고 보낸 날,
바빠서 웃음 한 번 머금지 못한 날은, 마음이 죽은 날이다. 

정조대왕 어록인 '일득록'이 영화 '오월愛'에 나왔던 여고생일기를 적은 여자분의 기록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다는 기록을 만난 일이 있다.

일득록은 신하들의 눈에 비친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정조 7년 규장각 직제학 정지검의 건의 로 처음 시작되었는데,
사관의 기록과는 별도로 규장각 신하들이 평소 보고 들었던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에 그 기록을 모으고 편집하여 규장각에 보관한 것이다. 

정조의 시대는 조선이 이미 성리학적 질서를 버리던 시대였다.
정조가 굳이 성리학적 질서를 옹호하면서 돌아가려 했던 시대는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려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래서 성리학적 성군의 관점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가득하다.
성군은 자신을 철저하게 돌보고, 그리하여 백성에게 힘든 일은 덜어주며 베풂을 전하려는 의도를 남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가 사랑했던 학자들의 눈에는 이미 변화하는 세계가 들어오는 것인 바,
서양의 종교와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물져 들어오는 것에 귀를 쫑긋 세우는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간을 읽으려 노력하였다.
성군이 되는 일의 염결함을 스스러운 태도로 쿨하게 드러내는 임금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군주.
그러나, 물결처럼 파도치는 세계 속의 근대 조선의 맹아가 나날이 싹트는 것을 느끼는 군주.
그 사이의 결기 서린 긴장감과 둘러치기의 명수들이 내놓는 언어들은 오히려 세상을 곧이곧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사람을 대할 때 성심으로 대한다면 그 사람도 나를 성심으로 대할 것이다.
이는 서 恕자 공부다.
내가 평생토록 추구한 것은 이 한 글자에 있다. 

용서 서자를 파자하면 '여심 如心'이 된다.
마음이 같다는 뜻.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
나와 남의 공통된 마음, 이것이 서이다.
내 마음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니 성심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박람강기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하다. 겉만 배우기 때문이다. 

정조 자신이 박람강기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폭넓게 독서하는 한편,
깊이 사색하고 치열하게 궁리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일이 손 앞에 닥치면 저절로 그 일을 맡아서 처리할 방도가 생기게 마련이니,
서 있을 때도 눈앞에 나타나게 해야 하고,
수레에 탔을 때도 눈앞에 나타나게 해야한다.
요즘 사람들은 평소 궁리하고 격물하는 공부가 없어서, 그 때문에 일을 당하면 어떻게 손을 쓸지 모른다.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했든,
늘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에 집중하고 골몰하다 보면, 
서 있을 대도 그 일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수레에 탔을 때도 그 일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마련이다.
그렇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보면 세상에는 처리하지 못할 일이 없다. 

사대부는 하지 않는 바(유소불위)가 있은 뒤라야 비로소 나랏일을 처리할 수 있다. 

유소불위... 그게 강직함이다. 

옛사람들은 젊은이가 노인과 같았으나,
요즘 사람들은 노인이 젊은이와 같다.
옛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겼으나,
지금 사람들을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다. 

동안열풍, 동안종결자...  

치세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화평하기 때문이며,
난세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여우니
그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망국의 음악은 슬프고 음울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기 때문이다.(예기) 

한국의 오늘날 음악은 '서바이벌'의 음악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검소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로 가기는 어렵다.

 

날마다 얻는 생각을 기록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나는 왜 날마다 하나씩 얻은 생각을 적는가? 

넓게 읽고 열라 적는(박람강기)가 과연 하루 한 가지 얻음에 도움이 되는가?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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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6-17 09:2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을 읽으면서도 의심투성이인 것은,
요즘 제 독서의 흐름입니다. ^^
조선 왕조 시대는... 왕만 살자고 도망가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였거든요.
성리학적 원리도 아니고, 비겁하던 시대죠.
일이 많아 바쁜 사람도 여러 종류예요.
그 일을 즐기면서 많이 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멍청하게 일을 떠맡아 일이 많으면서 힘들어 죽겠다 하는...
저는 그 후자같아요. ㅎㅎ

마녀고양이 2011-06-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인용구 너무 좋은데요.
어제 낮에 책 주문했는데, 그거 주문하기 전에 이 페이퍼를 읽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저도 이 책 사고 싶네요......... 아, 저야말로 왜이리 가도가도 어린애처럼 뻗대고 실수하는걸까요. ㅜㅜ

글샘 2011-06-17 09:2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거라서 선물드릴 수가 없군요. ^^ 안타까워라.
사람은 갈수록 어린애처럼 실수하는 존재란 걸...
인간 심리 공부하는 마녀고양이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