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6월이구나.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추운데,
금세 여름이 될 모양이다.
건강한 여름 맞기 바란다. 

오늘은 김지하의 시를 몇 편 읽어 볼까 해.
중학교때 김지하의 '새봄'으로 국어 교과서를 시작했던 너희라,
김지하 이름은 들어 봤을 거다. 

우선 아빠가 대학시절 참 좋아했던 노래, '새'를 한번 읽어 보자.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 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새>


다섯 연으로 된 시인데,
각 행이 아주 짧고,
전달하려는 내용도 복잡하지 않아. 

1연의 '새'는 자유롭지.
청청한(푸르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부신 산맥,
그 위를 날으는(시적 자유, '나는'이 맞지) 새.
그 새가 화자를 울려.
화자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야. 
<묶인 이 가슴>이기 때문에 새가 부럽단다.

밤새
자신을 물어 뜯는대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
이건 좀 정신이 나간 사람의 행동 같지.
정신질환자들이 자해를 잘 한대.
스스로가 가치있게 여겨지지 않을 때,
스스로를 해칠 때,
살이 아프고,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는 슬픈 역설을 쓰는 것 같구나. 

피만 흐르는 감옥 안.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는 세상.
감옥에 갇힌 자신은 과연 '존재'감이 느껴지는 걸까? 

김지하는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 시 <오적>을 썼다고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단다. 

3연에선 고문을 받고 처절하게 비참함을 겪는 신체의 슬픔을 적고 있다.
발랄하게 걷지 못하는 육신,
땅을 기는 육신이,
너, 곧 자유인 너 - 새를 우러러보면서
낮이면 낮마다 그예 한번은 눈이 뻘겋게 부르트도록 울어대는
그래서 몸부림치게 되는,
함께,
함께 답새라(뜻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새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 같아.). 

육신은 정신을 놓아 버렸지만,
끝없이 어디서 새하얀 사슬 소리가 귓전에 올리는데,
새여,
죽어서 너 되어,
자유를 얻는 날까지를 기다리는 이 나약한 육신의 멀고 먼 기다림이여...

그러나,
화자가 지금 있는 곳은,
낮이 밝아가면 밝아갈수록 침침하게 어두워가는
감옥.
밖의 세상이 밝을수록
이곳은 어둠이 짙어지는
감옥의 역설. 

낮이 밝아질수록
화자의 넋은 침침해지고,
저 짧은 볕발
저 짧은 햇살의 토막난 사각형,
철창 사이로 내려앉은 네모난 햇살 위로
여위어가는 창살의 네모를 스쳐 떠나가는 새. 

푸른 하늘 끝,
푸르른 산맥 너머
덧없이 흐르는
끝도 없이 흐르는 저 구름을 보면
화자는 묶인 이 가슴이 원통하고 한스러워
눈물이
원통한 분노의 눈물이 흐른다. 

이 시는 80년대 어두운 사회에서 불리웠던 슬픈 노래였단다.
이 시는 1연과 5연이 마주보는 수미상관의 형식을 띠고 있고,
파란 하늘과 침울한 감옥 안의 분위기가 대조적인 시구나. 

초기 김지하의 시는 이렇게 억압적 현실에 저항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의 노래가 많단다.
마찬가지 저항시 중 '녹두꽃'을 읽어 보자.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녹두꽃>

<녹두>는 콩보다 작다고 해서 키가 작았던 전봉준을 일컫던 말이지.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시인은,
감옥 안에서
왕조 국가, 양반과 상놈 국가의 질서에 반대하다 죽어간 녹두 장군 전봉준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노래를 떠올렸을지도 몰라. 

앞서 이야기했든,
녹두 장군과 시인은 모두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그들의 '의지'는 죽지 않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
그것을 이 시에서눈 <살아>라는 말로 계속 반복하게 돼. 

빈손 가득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이렇게 말이지.
화자는 감옥의 쇠창살 틈으로 비집고 내려 앉은 햇살을 보고 있어.
거기서 살아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지.
그 햇살은 따스했을까? 눈부시게 따가웠을까?
감옥 안에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빈 손>이었지만,
햇살을 가득 움켜쥔 화자.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이 붉게 비치는 저녁에도 화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화자의 열정은 불타고 있지.
깊은 밤 고문당한 깊은 상처를 이기고,
강한 넋으로 살아 있어.  

모진 매질 아래
날이갈수록 두 눈을 흡뜨면서(치켜뜨면서)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사는 화자와 녹두 장군. 

감옥에 갇힌 화자에게
열쇠 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달콤한 유혹인데,
그 소리마저 사라져버린 밤.
혀는 잘리고 굳고 굳고 굳어.
굳은 벽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있는 화자의 애절한 목소리. 

목이 다 쉬도록 꺼이꺼이 울 것같은 이 목소리가
어쩜 이렇게도 절창이었는지.
그래서 1970~80년대 대학생들은 이런 슬픈 시를 읽고,
이런 시를 노래로 만든 것들을 부르면서 저항의 의지를 다지곤 했단다. 

시구문은 시신이 나가는 문이야.
별이 푸르게 빛나는 밤,
시구문 아래서
횃불 아래서
목 베어진 전봉준, 녹두 장군. 

그를 생각하며
횃불로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마음 가득해.
하늘을 온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분노.
번득이는 총검으로 민중을 비웃는 독재자들.
너희는 화자와 녹두 장군을 육시(살육하는 것)하더라도
나는,
우리는 끝끝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비장감이 가득 묻어있는 시야.
김지하의 <민주주의여 만세>로 유명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으니 한번 더 소개만 할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절박한 상황이 금세라도 느껴질 것 같은 시란다. 

황토의 민중을 노래하던 김지하 시인이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이 나뉘어져있던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착취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곤 했었지만,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아.



그 이후의 시들을 아빠가 관심깊게 본 것은 아니지만,
1994년쯤 상을 받은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단다.
한번 읽어 보렴.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제목이 '중심의 괴로움'이야.
자신이 중심에 서 보니 괴롭더라... 뭐,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한다. 

봄에 꽃대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
가만히 꽃대를 바라보니
꽃대가 흔들리더래. 

흙 밑에서
꽃대를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이
꽃이 피고
꽃이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지려고 하니,
괴롭지만 흔들린대. 

이 시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 시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자신은 무얼 위하여 이적지
단 하나의 <중심>을 위하여 싸워 왔던지...
허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지. 

다들 흔들리는데,
다들 흩어지는데,
자신만 중심을 지키고 서있으려니 말이지.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서,
비우겠다는 생각을 해.
비움으로써 <꽃피움>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김지하가 이런 시를 쓰던 때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던 시절이라면 이런 시를 쓰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으니 말이지.
그렇지만,
이 시대는,
김영삼이 평생 민주화 운동하던 야당 생활을 접고,
광주 학살의 주역들이 창당한 바로 그 당으로 들어가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그런 시기란다.
대학생들은 거기 반대하는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다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죽던 그런 시기.
그 불안한 시기에 자기는 중심을 버리고,
흔들리겠다,
다 비우고,
꽃을 피우겠다. 
이런 이외수같이 도사같은 투의 시를 쓰고 있으니 이전의 시들과는 상당히 달라 보이지. 

내가 보기에 그가 쓴 시 중 가장 이상한 시가 바로 중딩 1년 국어책에 실렸던 그 시야.
기억나지? 

한번 읽어 보렴.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새봄>

푸른 솔은 전통적으로 절개를 상징하는 자연물이었단다.
'매화, 난초, 국화, 대'처럼 추운 계절에도 변치 않는 사물들을 사군자니 어쩌니 하면서 칭송하고 했지. 

그렇지만 일본의 국화인 벚꽃은 화사해서 아름답긴 해도,
시에서 칭송하기엔 조금 주제가 애매한 자연물이지. 

너무 빨리 변하는 바람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지조 없는 정치가를 일컬어서 '철새'라거나 '사쿠라(벚꽃)'라고 풍자하거든. 

벚꽃(쉽게 변함) 지는 걸 보니 푸른 솔(불변함)이 좋았던 화자는,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진대. 

물론, 그저 자연물로서야 벚꽃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것도 찾기 드물지.
1994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로,
서로 경쟁하듯 도로변에 심는 나무가 벚꽃나무인 걸 보면,
벚꽃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할 순 없을 거야.
그렇지만,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
그가 이런 시를 쓰는 일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지.
차라리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든가 했더라면 더 멋진 사람 대접을 받았을 것 같단다. 

세상은 늘 변하는 거지만,
우리는 어떻게 변해갈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세상은 점점 경쟁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어.
경쟁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자기 것을 굳세게 지켜가는 사람도 멋진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단다. 

너의 앞에 놓인 인생길에,
어떤 중심이 놓일지,
어떤 변화가 놓일지,
너는 어떤 시간과 어떤 일에 흔들릴지, 모두 미지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적응하길 바라고,
굳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int236 2011-05-3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는 목마름으로...제 고등학교 시절에 저를 잡고 놔주지 않던 시였습니다. 나중에 학생회장을 하면서 학회에 김지하씨를 초청하려 갔었는데 무작정 찾아간지라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초청은 못하고 몇마디 대화만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아마 출소하신 후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그것을 포기한 것 같아서...뭐 사상의 전환같은 거라고 오해를 했던 거죠...^^아직도 김지하하면 타는 목마름입니다. 그 시로 만들어진 민중가요도 정말 좋아합니다. 어두운 써클실에서 땡삼이 아저씨의 답답한 짓을 보면서 많이 불렀던 기억이....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글샘님 항상 감사합니다.

글샘 2011-05-30 23:32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생명이라...
뭐, 생명이 소중한 거 누가 모릅니까?
그러면, 4대강 반대라도 제대로 하든가... 사쿠라도 나는 좋아... 이건 아니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