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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특정한 목차의 순서가 있을 수 없다.
인생 도처에서 만나는 문화 유산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부터 늘어놓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오랜 외도 끝에 다시 문화유산 답사기를 냈을 때부터 이 책에 침을 발라두었는데, 이런 저런 일이 겹쳐 이제서야 읽는다.
유홍준 답사기의 장점은,
자신이 직접 다양한 답사를 인솔하고 다녀본 사람이기에,
글에 꼭 맞는 사진을 읽는 사람에게 제시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글 속에 사람들의 삶의 온기가 살아있는 말맛을 살릴 줄 안다는 것.
무엇보다도 도처에 숨어있는 절경들을 소개해 주면서도 뒷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줄 줄 안다는 것.
이런 여러가지 덕목들이 그의 글맛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제 6권에서는 경복궁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넣어 두었는데 내가 정말 읽고 싶은 것이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절집 선암사 이야기도 멋지고,
올 여름이나 가을쯤 답사를 갈 예정인 부여에 그가 터를 잡고 살면서 느끼고 본 것들 이야기도 맛깔스럽다.
마치 오랜만에 푸짐하면서도 저렴한 시골할머니 밥상을 만난 횡재의 느낌이랄까.
다음 달에 서울 출장갈 일이 있는데, KTX 덕에 시간 아껴서 경복궁이나 한번 돌아보려고 맘먹은 참에 참 잘 읽었다.
그리고 유홍준이 어디서 끌어다 인용하는 멋진 글들도 남겨 두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도,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161. 김수근 선생의 건축 수상집 제목)
깊은 산 속의 깊은 절이라는 산사의 미학적 표현도 멋졌다.
거창 양민 학살같은 대목을 짚어주는 것이 유홍준 답사기의 미덕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마지막에 '울리고, 울리고, 또 울리고, 울리고'라는 울림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런 한 구절은 백 마디의 웅변을 뛰어넘는 울림을 남긴다.
302쪽에서 인용한 황매산 화강암에 대한 기근도 교수의 설명을 얻어 듣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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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화강암은..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특징, 그리고 분해될 때는 확실하게 부스러져 모래사장을 만들어 주고, 물을 빨아들여 맑게 걸러 주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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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복감은 마늘종(마늘쫑)을 뽑을 때 바늘로 찌르고 뽑는 것을 공과대학 교수가 <응력 집중>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의 통쾌함을 얻는다.
그가 문화재청장을 역임하면서 노력했던 바가 글의 곳곳에 남아있다.
물론 비판적 안목은 학자시절 더했겠지만,
정책적 실제의 자리에서 집행하는 입장에 서 본 그로서는 현실의 냉엄함도 많이 배웠으리라.
경복궁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경복궁이 임진왜란때 불탔던 사연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조수정실록에선 난민이 열받아 불질렀다고 나오니 그것이 가장 믿음직한 주장인 것 같지만, 다른 왜인들의 기록에선 조금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아는데, 유홍준이 아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에서 아쉬움이 못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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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 모든 건물이 불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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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마디로 원인도 설명하지 않고 전란으로 불탄 것처럼 기술한 것은 아쉽다.
이 부분은 이덕일(이런 사람은 학자들은 싫어한다. ㅋ 웃긴 나라다.)의 '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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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하다'라는 글에서 거가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는데,
이 두 부서는 공사노비들의 문서가 있는 곳이다 라고 전하고 있고,
임진록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또, '내탕고(왕실 재산 관리하던 곳)에 들어가 금백을 약탈했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불태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다 적이 이르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류성용은,
'처음 일본군이 입성했을 때는 백성들이 다 도주했으나 차차 돌아와 마을과 시장이 가득 차서 적과 서로 섞여 장사했다.'면서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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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이미 조선은 끝장이 나버린 왕조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역사에서 자꾸 빠트리는 이유는, 미필적 고의가 아닌 <고의>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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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간혹 참고 자료 사진의 설명과 본문 내용이 어긋난 부분이 여럿 있어 아쉬웠다.
물론 참고 사진을 찾고 편집하는 것은 편집자의 몫이겠지만, 그런 세세한 곳도 틀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문화재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 아닐까 싶다.
56쪽. 효명세자를 '의종'이라고 잘못 썼다. 59쪽에서는 '익종'이라고 바로 불렀는데.
그리고 이왕이면 56쪽을 '효명세자(익종)'이라고 했으면 59쪽도 '익종(효명세자)'라고 순서를 바꿀 필욘 없어 보인다.
199쪽. 선암사 뒷간 현판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라고 오기하였다.
221쪽. 도동서원 석축 조각 디테일 설명에서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거북이'라고 오기하였다.
307쪽의 영암사터 멋진 돌계단을 보고 사인 12도라고 부르는 건 좀 웃긴다. 내가 보기엔 사인 72도쯤이면 맞을 거 같다.
312쪽. 본문 설명에선 분명히 북쪽과 남쪽의 돌거북 설명이 나오는데, 그림에 붙은 설명에선 동쪽과 서쪽으로 적혀 있다.
뭐, 방위가 북동쪽이고 남서쪽일 수도 있으리라마는, 통일시키는 것이 좋겠다.
361. 녹채 설명에서 '목채'라고 표기된 것은 '목책'의 잘못이다. 본문에서는 목책이라고 바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도처에서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쌍자음을 쓰고 있다. 쎄미나라든가, 씨드니라든가...
그런 것들은 그런대로 봐줄 법도 하지만,(나도 외래어 표기법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니 말이다.)
152쪽의 '꾸바'(쿠바)라든가, 281쪽의 '샹하이'(상하이), '도오꾜오'(도쿄) 등은 눈에 거슬린다.
281 쪽에서 '빠리'와 '파리'가 함께 뒤섞여 쓰이는 것을 보고 원칙을 무시한 편집자의 무신경이 아닌가 싶어 적이 기분이 상했다.
유홍준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금세 새로운 판을 짤 것이니, 그때는 수정될 것을 '창비'를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