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랗다.
봄바람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콧등을 살랑거리고,
햇살도 피부에 따끔거리도록 와 닿는다. 

봄이 문득,
칸을 옮겨 여름으로 이사가는 느낌인 요즘.
이제 다시 평가원 모의고사를 앞두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겠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한용운 스님의 시를 두어 편 보자.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한용운, 찬송(讚頌)>

척봐도 이 시는 제목 그대로 '님'에 대한 찬송이지.
예찬적 태도로 님을 극찬하는 시야. 

각 연의 처음엔 '님이여,'로 시작하고, 마지막행은 '님이여, 사랑이여, ~~~이여.'로 마치지. 
그 사이에 '님은 ~~~이다.'라는 은유법이 하나씩 들어가 있고 말이야.
수능에 쓰이는 용어로 이렇게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른단다.
잘 외워두렴. <통사 구조의 반복>
우선 1연부터 읽어 보자.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이래.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동안 천국의 사랑을 받기에 마땅한 존재가 '님, 당신'이지.
금은 순수한 금속인데, 백 번이나 단련하였단 건,
불순물 제거를 위하여 그만큼 여러 번 수고를 거친 <금결>이니 대단한 찬송이지.
아침 햇살은 참 환하고 밝아 반가운데, 그 아침 볕의 첫걸음처럼 그대는 환한 존재란 이야그지. 

다음 연에서 당신은 <의리가 중요하고 재물은 가벼움을 잘 아는> 존재래.
그래서 거지의 거친 밭, 가진 것 없고 소외되는 자들에게
복된 씨를 뿌리는 존재로 그리고 있지.
오동 나무는 전설 속의 봉황이 깃든다는 신비로운 나무인데,
오동의 숨은 소리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시어구나. 

마지막 연에서 님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한대.
이 시가 씌어진 일제 강점기는 <겨울>이고 <암흑>이고 <폭력의 시대>였지.
그러니 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찬송가는 바로 독립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아니겠니? 

관세음 보살 이야기는 전에 한 적 있을 거야.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보고 觀>, <듣는 音> 자비로운 관세음보살.
눈물로 이어가는 우리 민족에게 자비의 눈물을 뿌려달라고,
그래서 얼음 바다에 봄바람처럼 우리에게 오시라고 간절히 비는 시란다.

이 시에서 우리 민족을 비유한 시어는 무엇무엇이 있을까?
바로 거지와 약자란다. 

이 거지와 약자를 <지고지순한 님, 의로운 님, 자비의 님>이 보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만해 시에서의 '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그리워하는, 사랑하는)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게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대.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지.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야.
그래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으니 조금 어려워 보이기도 한단다. 

다음엔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읽어 보자.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을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도 '님, 당신'이 나와.
총 4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앞부분에서 <좌절>하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희망>을 보게 되는 구조란다. 자세히 한번 볼까? 

1연에서 나는 당신과 이별한 후 당신을 잊지 못한대.
그런데, 그것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 좀 이기적인 거라고 한다.
뭐,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모든 사랑도 다 이기적인 것이겠지. 

2연에서 나는 <땅이 없어 추수가 없는> 존재야.
<찬송>에서 '거지, 약자'로 대변되던 조선의 민중이겠지.
저녁거리가 없어서 좁쌀이나 감자라도 좀 빌리러 이웃집에 갔더니
이웃집 주인이 '거지는 인격이 없다. 생명도 없다. 너를 도와주는 건 죄다.' 이렇게 말해.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 가장 좌절스러울 때
화자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만난대. 

정말 쪽팔리는 상황이고 절망적인 상황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좌절스런 상황에서 <님의 존재>를 확인한대.
비록 님은 나와 이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님은 침묵한 존재지만,
님이 거기 계심을 의심하지 않게 된단다. 

2연과 3연은 비슷한 구조야.
집도 없고 그래서 민적(호적)도 당연히 없지.
'민적이 없으니 인권이 없다. 정도를 지킬 것도 없다.'
이렇게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단다.
2연에서 이웃집 주인과 같은 존재지.
그에게 항거한 뒤에
격한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고 슬픈 마음이 솟구칠 때,
다시 당신을 만나게 돼. 

가장 억울하고 가장 분노하고 가장 슬픈 시점에서,
만나게 되는 당신.
그 당신은 <찬송>에서와 같이,
우리의 슬픔을 모두 보시고,
우리의 아픔 소리를 모두 들으시는, 그분이 아닐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일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라면 관세음보살일 것인 당신 말이야. 

마지막 연에 '아아'가 나온다.
님의 침묵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아'가 나오지.
아아~ 하는 비탄과 함게 주제의식이 드러나겠구나...하고 추측해 보자. 

화자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가진 자,
곧 권력자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대.
우리가 보통 윤리, 도덕, 법률은 약자를 지켜주는 거라고 착각하잖아.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있는 체 하는 것들은 모두 <칼과 황금>을 향하여 있다는 거지.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연기를 내서 대상을 숭배하듯,
모든 <윤리, 도덕, 법률>은 <권력자의 힘>을 향한 숭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거. 

영원한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화자는 다시 당신을 만난대.
영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어쩌면 죽음이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역사가 이만큼 흘러왔는데,
그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해서 다 뭉개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들어있지.
술을 마시는 것은 자포자기와 좌절의 이미지겠고.  

님과 이별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화가가 바라본 님.
그것은 화자를 포근히 감싸안아주는 그런 님이겠지.
님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것.
힘든 절망적 삶을 극복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시라고 보면 되겠다. 

일제 강점기의 시들이 <한>이 맺힌 시들이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시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의심으로 가득한 시들이라면,
한용운의 시들은
역설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힘있는 시들이란다. 

한용운의 시들은 대부분
여리고 여성적인 화자들을 차용하고 있지만,
결코 소극적으로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헝클어진 세상을 똑바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끈질긴 저항의 마음과,
희망의 줄기를 찾아내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연애편지를 쓰려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될 정도야.
그렇지만, 그의 시가 가진 힘은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는단다.
늘 이별에서 시작하지만, 극복 의지와 희망을 끌어들이거든. 

이런 것이 불교적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란 말이 있잖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금세 사라질 것들임을 잊지 말라는 거야.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음을 힘주어 쓰는 시.
이런 시가 삶의 힘이 되기도 할 거다.
박카스 한 병 마시듯, 시를 통해 한 모금의 힘을 얻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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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2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을땐 잘 모르다가 없으니 더 절실하고 반드시 계시는,
힘든 상황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
희망이란게 그런거죠~ 절망속에서 더 빛나는 존재감 말입니다^^;

글샘 2011-05-25 16:44   좋아요 0 | URL
원래 희망이란 놈은,
어두운 데서 빛나는 속성을 가진 모양입니다.
어두운데... 희망의 상자가 꽉 닫혀있다면...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