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치옹을 가장 좋아한다. 치옹은 윤오영 선생님의 호다. 바보같은 늙은이.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데도 그 분은 스스로를 바보같다고 질타하신다. 아니.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신게다.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온 화두. 너 자신을 알라. 에 대한 답으로 그 분은 바보라고 답하신 거야. 피천득의 수필을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분이 등장하는 수필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되고 만다.

피천득의 수필 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필이 인연이다. 우리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 아스라하던 청년들의 가슴에 일제시대에 있던 일을 교과서에서 사랑이란 감정으로 배웠던 씁쓸한 기억이 남는 수필. 인연. 아사코가 어린 시절 헤어질 때는 아사코가 목덜미에 매달리면서 입맞춤을 해 주었고, 아사코가 대학 다니던 시절 만났을 무렵에는 아사코와 손을 잡고 헤어졌고, 마지막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류의 잡문. 윤오영 선생님이 보았더라면, 치열함이 부족한 덜떨어진 글이라고 일갈을 던지셨을 지 모른다.

광고영화 여친소에 이 책이 등장해서 이 책의 회사 샘터에서 돈을 주었나? 하고 생각 들 정도로, 영화와는 별로 관계 없는 수필집.

피천득이 아직도 우리나라 수필계의 일인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정말 학같고, 난같고 청초한 부인같은 글들은 윤오영 님의 글인데 말이다.

그나마 내가 위안 받는 건, 전지현이 피천득을 몰랐던 것에 대해서다. 여경진이 피천득을 몰라줬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지 않게 했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초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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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6-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아든 치옹이든 ....글쓰기에 1인자가 있기는 있나요? 가끔 그런류 질문 받습니다.제게 질문한 사람들은 무안한 답변만 듣기 일수죠. 예를 들면 "누가 최고의 락커냐? 세계 3대 기타리스트는 누구냐? 한국 최고의 소설가는 누구냐? ...누가 최고의 영화감독이냐? 누가 최고의 지휘자냐? 어떤 여배우가 가장 예쁘냐? 등등....고딩땐 그런거 가지고 마구 핏대를 올렸던 거 같습니다. ^^ 자신의 주관적인 감동을 객관화시켜 대중의 동의를 구하고 자신의 안목이 결코 그릇된것이 아님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심리때문이겠지요.근데...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객관적인 평가와 동의가 꼭 필요한건가 모르겠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태준 님의 수필을 좋아하는데 꼭 한국최고 뭐 그런말 안써도 섭섭하진 않습니다.

글샘 2004-06-1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1인자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금아의 사상 없는 글들이 이제껏 미화된 측면이 너무 컸던 것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은 늘 어두운 곳에서 꼿꼿한 성깔 하나로 버텨왔던 반면,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서 광채를 입었던 글들이 한결같이 미국의 세례를 입은 자들이라 쓰디쓴 입술만 축일 뿐인 거지요. 이태준 님의 수필도 좋지요. 그분의 글에는 반드시 시대가 반영되어 있거든요. 금아의 글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싫고, 그런 사람의 글은 우리 문단에서 순수문학으로 과대포장된 우리 역사가 서글퍼서 한 소리랍니다.

드팀전 2004-06-1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시대적 고민이 반영되지 못한 금아의 글들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살았고 그 어두운 시대의 무게에 눌려있덨다고 시대의 고민이라는 거대담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그건 순수문학이 문학의 예술성만을 주장하는 몰상식처럼 일상영역의 문제를 거대담론으로 무시하는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기때문입니다.저도 개인적으론 그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진지한 성찰이 담긴 글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집니다.하지만 일제시대에도 한국전쟁 때도 사람들은 해가 뜨면 쌀을 씻어야했고 또 지나가던 아가씨가 예쁘면 눈길을 보냈습니다.이러한 일상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을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고 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되고 맙니다.그건 너무 감상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오류가 있습니다.

글샘 2004-06-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점을 이분법적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실증주의자들의 오류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도를 잡고 있을 때는 개별성을 주장하다가, 세력이 없어지면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숱한 이론들의 원천이 아니었던가요.
제가 금아를 욕한 게 아니라, 치옹이 문단의 중심이 아니었음을 한탄한 것임을 아시겠지만, 저는 중도, 상대주의를 믿지 않는 쪽이랍니다. 옳은 것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