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외딴'은 '외딸다'란 동사가 활용된 관형사형이다.
영어 사전도 같이 보여서 읽어보니, 혼자인, 고독한, 고립된... 이런 뜻이 담겼다.
1. (be) alone 2. solitary 3. isolated

신경숙의 '외딴 방'은 '외딴'이란 동사의 관형사형과 '방'이란 명사의 합성구가 아니다.
그미의 '외딴방'은 그의 삶(이 소설이 95년에 나왔고, 그가 63년 생이니)이 32세에 이르도록
마치 블랙홀처럼 그의 삶에서 정신적으로 증발해버렸던,
신경숙의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 그 시절을 상징하는 하나의 '합성명사'다. 

삶의 궤적에서 증발해버린 듯이 보였던 그 4년간을 길어올리는 펌프질은 그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종의 마중물을 부어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심중을 흐르던 지하수는 영원히 표층으로 솟구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박민규가 '한국인에게 청춘은 없다, 다만 청춘으로 보이는 시기가 있을 뿐'이라고 썼듯,
신경숙의 외딴방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청춘들은 없다.
그들은 우물 속에 잠긴 쇠스랑처럼 우울하고,
신혼부부의 살림방에 붙여둔 검은 도화지처럼 암울한 삽화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잘 짜여진 플롯 따위는 없었던 채로,
에피소드의 나열로 이뤄진 인생의 한 시기가 있을 분이었다. 

작가의 과거 한 시절 이야기가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외딴방'의 시절이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의 지점에 놓여 있다.
그의 '외딴방'에는 가족 부양의 원죄를 짊어진 장남과,
집안을 일으켜야 하지만 데모꾼이 되는 삼남과,
매끈한 아가씨지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외사촌과,
삶이 계란보다도 팍팍했던 열여섯 어린 여공, 이렇게 넷이 살고 있었던 공간이지만,
이 소설 속에는 하계숙, 미스 리, 미스 명, 안향숙, 윤순임, 연탄불 피우던 아저씨 등 숱하게 많은 이들의 삶의 궤적이 녹이 있어, '외딴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 넷을 초월하여 <만인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만인보에서 추리소설보다도 스릴러물보다도 더욱 끈질기게 서술자의 심기를 놓아주지 않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재희 언니다.

   
 

손이 기억했다. 

열쇠통을 잠글 때의 감각이며 문이 잠기며 냈던 딸깍, 소리들을, 나는 손을 내려다본다. 

몸의 기억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마음보다 정직해서겠지. (403)

 
   

작가의 마음 속에 원죄처럼 남았던 죽음의 공범자로서의 서술자.
결국 재희 언니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을,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픈 추억만으로 글을 쓸 사람은 아니다.
그의 자의식을 잠근 자물통은 여간 튼튼한 것이 아니어서,
어지간한 펌프질로는 뿜어올리기 힘든 기억이었을 것이다.  

   
 

"국수 삶아줄게. 배부르면 마음이 좀 나아질 거야."(375)  

 
   

이렇게 흰 국수를 삶아 주던, 마음씨가 국수 사리처럼 하얀 이의 기억을 몸이 저장하고 있었기에,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긴, 이 기록을 정직하게 남길 수 있었을 게다.
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영원히 방 안의 검은 도화지를 떼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앙칼진 소리를 질렀을 테다.
"내 방으로 들어오지 마!" 하고.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어쩜 수미상관을 염두에 둔 듯,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 구절을 집어 넣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며, '살아남은 기억의 기록'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라면, 

   
  ......  아, 은행이나 우체국이나 그런 데들. (259)  
   

이런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꿈'이란 곧 '먹고 사는 일'과 동의어였음을 말이다.  

박수근 화백의 터치처럼 '납작납작'한 삶을 살았던 광어같은 인생들의 희망이,
고작 은행이나 우체국이나 그런 데들에서 일하고 싶었던 기억을 말이다.

   
 

우리가 그 집에 살았을 때라든지, 혹은 옛날에 우리가 닭을 길렀을 때,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이 글 속에 그런 행복이 잠겨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긴다. 

 
   

이렇게 애써 희망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세상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런 행복에 잠겨 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삶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아파트'이다.
70년대의 '골방'과 '단칸방', 곧 그들 모두의 '외딴방'의 볼품없음을 가릴 수 있는 곳이 <아파트>이며,
'내 방에 들어오지마!' 이런 말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아파트>다. 

'시-댁',
'장-남',
'친-척',
'연-좌',
'연대-보증'
'화-병'
이런 얽히기 싫은 단어들과 가장 손쉽게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채택된 곳.
이렇게 <타인>이 곧 <지옥>임을
삶은 계란보다 팍팍한 것임을 온몸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선택한 곳이 <아파트>란 공간이다. 

70년대 그의 [외딴방]은 이제 [공중 부양 공간]이자 [가장 확실히 잠긴 공간]으로서의 [아파트]로 재구성된 것이다. 

청춘은 없었던 사람들이,
제 자식의 청춘들마저 담보로 잡힌 세상.
마술 피리는 아이들을 학교로, 학원으로, 유학의 길로 모두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초등학생이 유서를 쓰는,
기러기 아빠가 유서를 쓰는,
홀로 남은 노인이 유서를 쓰는,
그러나 '국가는 해주는 것이 없'고 그저 '각개 전투식 보험'으로만 삶을 유지하라는 현실. 

YH 신민당사 농성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김경숙만큼이나 흔한 이름을 가졌던 작가는,
그의 '외딴방'이 21세기에도 다른 이름의 [외딴방]으로 전이되어 여전히 존재할 것임을 미리내다봤던 것일까.
21세기 그 땅에서 '구로공단'이란 지명이 사라진 자리를 뒤덮은,
피시방, 노래방, 키스방, 보도방, 방...방...방... '방자'의 전성시대이며,
그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여전히 산업 역군(?)이 되어 그곳들에서 일하고 있음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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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0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바닥에 엎드려서 <외딴방>을 읽던 때가 떠오르네요. 이 책은 다시 읽는다 해도 서늘한 냉기가 전해지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읽게 될 것 같아요. 잘 봤습니다^^

글샘 2011-05-03 10:42   좋아요 0 | URL
댓글이 기형도의 엄마걱정같네요. ^^ 내 유년의 윗목이 생각나는...
정말 서늘한 유년의 윗목을 적은 글 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