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다. 
성경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금기를 어기고 원죄를 지은 존재로 기록되어있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죄악>임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겠지. 

이런 인류의 죄를 대신 갚으려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은 더이상 죄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인간은 죄없는 존재이니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오지 않은 미래 걱정을 당겨서 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금 착하고 행복하게 어린아이처럼 현재를 누리며 살면,
천국이 곧 저의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란다. 

오늘은 인간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지 못하고
모순 속에서 사는 인간의 한 사람인 시인이 바라본 천국의 상징인 <장미>를 통해
세상살이를 읽어본 오규원의 <개봉동과 장미>를 읽어 보자. 

제목은 '개봉동의 장미'가 아니야.
개봉동과 장미는 서로 다른 개념이란다.
개봉동은 서울의 외진 공장지역 이름이니, 인간의 문명을 대표할 거고,
장미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겠지. 

그 모순된 공존의 현장을 한번 읽어 보렴.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오규원,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장지대란다.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단어지. 
회색 도시로 기억되는 개봉동.
그 흑백사진 같은 골목길. 

거기 붉은 장미 덩굴(또는 넝쿨)이 뻗쳐 나왔어.
흑백사진에 겹쳐진 생명력의 정수, 장미 한 송이. 
개봉동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미. 

쪽바른 길, 도시의 길은
한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어 보인대.
직선의 이미지는 장미 넝쿨이 늘어진 그 작은 사건 덕에
휘어진 곡선의 이미지로 바뀌지.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장미는 길 밖에 늘어져 있어. 

2연에서, 콤마(,) 하나를 통해 세상은 둘로 나뉜단다.
앞에선 보라! 에 이어 장미의 생명력을 노래하지만,
콤마 뒤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에 고인 빗물'같은 신세를 노래하지. 

장미는 이곳 주민,
초라한 흑백 사진의 도시 서울의 주민이 아닌,
시간 밖의 서울,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야.
곧 원색의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세계의 표상이지.
그러나, 이곳 개봉동에선 그대와 나, 일상적인 이야기, 사촌들의 이야기 토막 속에
고인 물처럼 살아가고 있어. 

마지막 연에서 '말해 보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화자의 가치를 드러내려 하고 있어.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까?
화자는 개봉동과 대조적인, 그러나 개봉동 안에 놓인 장미를 보면서,
장미와 <닿>기를 소망하고 있어. 

그러나,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지,
불편한 의문을, 불편한 비밀을 느끼게 된대. 

그래서 개봉동 집들의 문을 두드려 보라고 해.
그러나,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 개봉동 집들의 문.
소통이 되지 않는 도시의 삶.
여전히 회색인 채, 생명력의 본질을 감춘 개봉동의 집들과 골목의 삶. 

이런 문명적 삶의 모순을 '장미'란 생명의 가치를 통해 밝히는 시가 '개봉동과 장미'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개봉동이란 가난한 공장지대에 핀 한 떨기 장미 넝쿨을 보면서,
"야, 참 이쁘네."
이렇게 평범한 한 마디를 던지고 일상으로 걸어갈 터인데,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장미가 삐죽 내어민 골목길이 왼쪽으로 굽어있는 것도 보고,
회색 도시 속의 생명력의 의미도 찾아내고 있어.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지.
그것을 뒤집어 볼 때,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거든.
불편한 의문,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
개봉동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지도 몰라. 

세상 살면서 그저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고,
돈만 모으려고 이전투구(진흙탕의 개싸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불편한 생각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삶이란 것은 이런 불편한 생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란다. 

텔레비전의 <사이렌>이란 프로그램에서 되는대로 살아온 인생들을 보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하고,
인간의 소중함, 삶의 가치 같은 것엔 눈돌릴 틈이 없는 인생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단다.
그것은 꼭 경제적인 가난이나 환경의 불우함이 필연적으로 가는 길은 아니지.
불편한 의문을 가지면서,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삶.
이런 것이 사는 가치일 수도 있단다. 

물론, 그것이 쉽게 보이지 않아 <비밀의 꽃, 장미>라고 하곤 있지만 말이야.
이 시가 실린 시집이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란 제목이었어.
우리는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여서 좀 초라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 삶엔 늘 한 떨기 장미가 길앞에 늘어져 있단다.
그 장미를 보고 비밀을 알아채느냐, 그저 지나치느냐가 문제가 되겠지. 

장미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삶.
소중한 삶의 가치를 눈감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 삶의 의미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 

다음엔 고통스런 세상을 고통스레 바라본 화가 뭉크에게 바치는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이승하의 '화가 뭉크와 함께'야.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동화(同化)야 도 동화(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이승하, 화가 뭉크와 함께>



화가 뭉크의 <절규>는 유명한 그림이지.
피할 수 없는 공간인 다리에서 한 인물이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단다.
저 멀리 바다를 보면 배는 한가롭게 떠있어.
세상은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주인공은 귀를 막고 '절규'를 내지르고 있단다.
뒤따르는 두 인물은 마치 괴물처럼 그를 억압하는 분위기로 느껴지고,
하늘은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차서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바다 역시 이유모를 움직임에 휘말린 것 같고. 

이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하기는 <더듬기>야.
말더듬기를 통해 현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지. 

1연에선,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가 들려서,
화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가 없대. 

2연에서, 공포스런 불안의 이유가 좀더 상세하게 드러나 있단다.
양팔을 벌리고 과녁에 선,
죽음을 앞둔 불안한 생김새들.
그 치욕스런 광경을 보면 화자는 소름끼쳐 달아나고 싶대. 

同化와 童話는 동음이의어지.
힘센 자들은 자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폭력을 쓰고,
아이들의 동화는 이치에 닿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 속의 세계겠지. 

세기말, 뭉크의 절규는 1893년(19세기말)의 작품이었다면,
화자의 세기말은 20세기말의 학살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울음소리, 학살극의 울음소리.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자국민을 향한 학살극은
1980년대를 장악했던 두려움의 소리였어.
1980년대는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 

도망가고 싶지만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데,
자백하라는 공포에 떨고 있는 화자.
꿈 속인지, 화자는 심문당하는 신세인 것 같구나.
얼마나 두려웠을까.
독재 시대의 고문과 공포 정치란.. 

텅 빈 도시는 소름끼치도록 비인간적인 곳이지.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단다.
그렇지만,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일상이겠지.
눈물없이 잠들 수 없는 밤들.
결코 잠들 수 없는 잠을 자는 사람들.
총소리의 환청,
죽어간 벗들의 피묻은 얼굴에 대한 환상. 

마지막 밤의 장갑차 캐터필러 굴러가는 소리와,
끝없이 갈겨지던 연발총 당기는 소리와,
소리도 없이 고꾸라졌을 죽음이 흘리던 신음 소리에 대한 악몽으로 차마 잠들 수 없었던 남도의 기억. 

그 텅 빈 도시를 직접 이야기할 수 없었던 화자는
멀쩡하게도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프로야구나 즐기라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피묻은 손의 가해자들의 웃는 소리에,
끝내 미칠 지경이 된다. 

보트 피플은 베트남 전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바다에서 일렁이던 베트남 사람들이고,
화자는 텅 빈 세계 속에서 웃음 소리를 흘리는 이런 현실을 당하여,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하면서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이 시에선 마침표가 단 하나 찍혀있단다.
마지막에 찍힌 마침표.
이 유일한 마침표의 의미는 화자의 단호한 선언의 심리가 반영되었겠지. 

성경에 예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아느냐고 묻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화자의
부 부 부인은 그런 강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시인은 뭉크의 그림과 함께 세기말의 공포스럼을 다루면서도,
전쟁으로 일그러진 인류의 잔혹한 역사에 더 전면적으로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어. 

같은 시인의 '이 사진 앞에서'란 유명한 시도 한번 읽어 보렴.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을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발견한 타임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승하, 이 사진 앞에서>

이 시는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는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시야. 

1연에선 점점 짧아지면서 '나를 향한' 비판이 날카롭게 집중되고,
2연에서 점점 길어지는 시행이 '반성과 참회'로 이어진단다. 

타임지란 미국 잡지에 실린 사진을 활용해 현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지.
시인이 직접 작품의 화자가 되어 반성하는 어조를 드러낸단다.
휴머니즘이 잘 드러난 시로,
화자의 양심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어. 

오체투지란 불교에서 온몸(머리, 두 팔, 두 다리의 5체, 오체불만족에서도 쓴 말이지)을 던진다는 예법인데,
오체투지하듯 절하는 굶주린 아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인류의 호의호식과 증오심은 결국 인류를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어.
화자는 자정 넘게 취하도록 뭔가를 위에 넣었고,
급기야 그걸 토할 지경이 되도록 엉망으로 살고 있었지.
그의 망막에 비친 저 사진 앞에서 화자는 망연자실...
자기를 잃고 말았던 거야. 

결국 화자는 절대 기아선상에서 고난을 겪는 고통을 외면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화자가 당장 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금을 냈다고 볼 순 없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거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도를 하고 '아멘'이나 외치는 사이비 '교인'과 인류의 '죄악'이 만든 결과물.
결국 가난과 기아 속에서 굶주리는 소말리아 사람들을 향한 화자의 반성이 드러난 시란다.
그런데, 과연 타임지라는 미국 잡지는
정의로운 잡지일까?
타임지는,
그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보여준 이 정도의 아픈 마음은,
소말리아의 오체투지 하는 아이가 폭탄 아래서 평화롭게 죽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아멘'과
같은 소망인 것이나 아닐까? 

이 시의 '타임지'는 그런 의문도 강하게 지닌 소재로 보인다.
결국 화자는 무엇을... 이라는 말을 잇지 못하는 자세로 시를 마치고 만다. 

기아를 방치하는 인류에 대한 일갈은 아래 사진에서도 볼 수 있어.
케빈 카터라는 사진가가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1994년 찍은 사진이지.

세계에는 1년에 수백 수천만의 인간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또한 쇠고기를 위하여 농장에서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 등의 곡물은,
그들 모두를 배터져 죽게 하고도 남는다는 통계 자료가 있단다.
결국, 생산의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불균등과 독재 정치의 어두운 그늘이 문제임을 잘 보여주지.

세계에서 가장 다이아몬드가 많이 나는 라이베리아, 짐바브웨 등의 국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래.
결국 그 비싼 다이아몬드를 팔아 버는 이윤을 군인 독재자들이 독점하는 이유 때문이지.


이 사진은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식량을 얻으러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사진이란다.
그 뒤로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가 있지.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한편, 사진 작가의 윤리에 대한 논란도 일었대.  

소녀를 촬영하기보다는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비판과,
사진이 가진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한 거였지.  
촬영 이후에 곧 독수리를 쫓아보냈고, 소녀를 구했다곤 하더구나.

항상 강렬한 감정에 몰려 극한의 세계를 취재해 온 카터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33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가뭄과 전염병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국제적인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더구나.  

이제 음식 먹을 때도,
아껴먹고 소중함도 생각하며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지?
다시 새로운 한 주 시작이다.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마음으로 한 주를 열자.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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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5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봉동이 이젠 가산디지털단지라는 이름으로 각종 할인 매장이 들어선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져요...
맨 아래 사진을 보니 문득 김기택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데요. 바로 저 사진을 보고 쓴 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글샘 2011-04-25 09:26   좋아요 1 | URL
구로공단역이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더군요. ^^
역사 속에 묻힌 '87년 구로구청 선거부정'이 문득 떠오르네요. 비참했던 진압과정까지... 광주의 연속이었죠.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김기택의 시는 글쎄요. 찾아봐 주세요. ^^

2011-04-25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5 18:12   좋아요 1 | URL
전혀 실례가 아닙니다. ^^ 이렇게 댓글 달아주시면 고맙죠.
완전히 믿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저도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