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시를 몇 편 보자.
우선, 이동순의 개밥풀을 한번 읽어 보렴.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동순, 개밥풀>

개밥풀은 '부평초. 개구리밥'을 일컫는 말이란다. 민중을 상징하는 말이라 보면 되겠지. 

화자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밥풀.
개밥풀은 뿌리도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 
수면에 뜬채로 되는대로 떠다니다가 스러지는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개밥풀을 관찰하노라니 화자의 머리를 찌릿하게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지. 

밤중에 일어나 논귀퉁이에 맴도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가벼운 바람에도 밀리는 개밥풀은 방게 물장군같이 작은 생물들이 지나갈 때,
결코 굳게 겯은 어깨(스크럼)를 푸는 일 없이 적군을 타고 앉아 여유있게 휘파람도 부는 것처럼 보인대.
방게(민물게)나 물장군은 억압자겠지.
민중은 억압자가 짓밟으면 움츠러들고 꼼짝 못하지만,
개밥풀은 느긋한 걸 보고 <관조>의 마음을 찾는 거지. 

미약한 개밥풀은 강한 연대의식으로 어깨를 꽉 잡고 산단다.

음력 사월이면 양력으로 오월인데,
개밥풀은 몸을 <버리>고 <자유>를 소중히 여긴대.
민중의 희생 정신과 <자유>를 향한 의지가 드러나는 것 같구나. 

그러다 어느 날 큰비가 내린대. 이제 시간은 여름으로 흐른다.
이 시에서는 봄부터 계절이 변화하는 것이 보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렴.
큰비와 장강은 험난한 세상살이를 뜻하겠지.
장마 끝에 개밥풀은 그림자도 없는 미약한 존재감으로 시련을 이겨낸단다.

가을이 되면 다시 추풍이란 시련이 닥치지.
숨죽이고 우는 개밥풀. 

결국 겨울 논바닥에 말라 붙는 개밥풀.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절망을 외치지는 않아.
오히려, <봄의 번성을 위하여>라는 구절 하나로,
개밥풀의 미약함과 시련의 고난함을 모두 감싸안아 준단다. 

억압당하는 삶은 늘 피곤하고 <상처받은 갈대>같은 존재가 되지.
그렇지만, 개밥풀, 곧 부평초처럼 가벼운 인생살이라도,
<봄의 번성>을 꿈꾸며 말라감을 슬퍼하지 말자는 주제를 담고 있는 시란다. 

이 시의 시점은 두 가지야.
앞부분에선 화자가 관찰하지만,
중간 부분부턴 개밥풀이 <우리>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지. 

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살펴보는 화자를 통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삶이라는 주제를 밀어내고 있는 거야.

관조란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행위를 의미하는 거란다.
다음엔 또 나무를 관조하는 시를 한편 보자.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나목(裸木)>

나목은 발가벗은 나무, 겨울 나무를 뜻하는 말이야.
하늘을 향해 발가벗은 나무가 팔을 뻗고 서있어.
마치 밤에 별빛을 그 나뭇가지(나무의 손끝)로 받아서,
몸통과 뿌리까지 씻어내려는 듯이 말이야. 

때론 살갗이 터지는 시련도 겪게 돼.
나무 허리가 뒤틀리는 고달프고 구질구질한 삶이기도 하지만,
나무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대.
한밤에 눈이 몸을 덮으면 시원스레 털어내곤 한대.
감추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지. 

마지막 부분이 화자가 찾아낸 삶의 이치야.
나무들이 때로 <깊은 울음>을 터뜨리며 오열할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삶은 근원적으로 슬픈 것이지.
누구나 슬픈 법이야.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슬플 때,
세상의 슬픔은 자기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착각하곤 하거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거야.
세상의 슬픔은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음을 인식할 때, 위로받을 수도 있을 거란다. 

벌거숭이 나무를 보고,
외로운 사람과
또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을 상상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렴.
삶은 근원적으로 다 외롭다는 마음이 바탕에 깔린 것 같단다.
다음엔 박목월의 '나무'를 보자.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화자는 유성에서 출발해, 조치원, 공주, 온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행길에서 계속 나무를 만난다.
한 그루 늙은 나무를 통해 묵중한 수도승을,
떼를 지어 선 나무들을 통해 어설픈 과객을,
멀리선 나무들을 통해 외로운 파수병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나무들은 멀리있는 타인이었다. 

그러나, 그 묵중하고 어설프며 외로운 나무들은
서울로 <회귀>한 화자의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단다.
실존은 여기 살아있는 <나>를 뜻하고, 본질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하다는 뜻이란다.
인간은 원래 이런 저런 존재다...하는 설명보다,
여기의 <나>의 삶이 어떤지가 중요하단 것이지.
인간은 원래 고독한 건지, 어울려 살면서 즐거운 건지,
인간은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란다.
<나>의 현실을 살피는 일이 중요한 거지.  

다음엔 최두석의 <성에꽃>을 통해 독재시대의 민중과 저항 정신을 생각해 보자.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 성에꽃>

이 시는 앞부분에서 민중들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어.
버스 차창에 성에가 끼어있는 모습을 <꽃>이라고 미화하여 표현하였지. 

엄동혹한일수록 성에꽃은 더 선명하게 핀다고 해서,
시련을 겪을수록 꿋꿋한 존재도 있음을 드러내고 있어. 

화자는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성에꽃을 감상한단다. 

민중이 피워낸 아름다운 예술을 말이지.
버스는 민중의 발이잖아. 
<차가운 아름다움>은 역설적인 표현이겠다.
차가운 것, 엄동혹한에 피어난 시련의 꽃이면서
그 민중의 숨결이 피워낸 삶이 아름답다는 역설적 표현.

성에꽃은 <한숨>과 <열정>의 숨이 얼어붙은 것임을 생각하다가,
문득 유리창 너머로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 

동지였던,
그러나 감옥에 가서 이젠 면회조차 금지된 친구.
독재 시대의 감옥행은 일상적인 일이었어.
대학생은 툭하면 감옥엘 가곤 했지. 

이 시는 암울하고 막막한 시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각자의 일터나 집으로 가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숨결이
버스 유리창에 ‘성에꽃’으로 피어났다는 발상에서 씌어진 시란다.

그러나 그 성에꽃 핀 창 속에서 문득 발견하게 된
‘푸석한 얼굴’이 군사 독재 세력에 저항하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울림만이 아니라 지성의 울림까지 느끼게 해.

시대의 아픔은 1980년대의 광주에 이은 독재시대뿐 아니었단다.
조선 시대의 아픔도 한번 읽어 보렴.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아낙네 문간에 나와 맞이하네.
띠집 처마 아래 손을 앉게 하고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 오네.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아침에 따비를 메고 산에 올라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슬프다 외딴 살이 어찌 좋으리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
<김창협, 산민>

이 시에서의 ‘산민’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지에서 살고 싶지만
벼슬아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험한 산골짝에서 살게 된 사람이야.
이런 점에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나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가곤 한단다. 

산골 사람들은 나물을 뜯어 연명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충분치 못해 가난함을 면하기도 어려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면서
손님을 위한 대접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 

이 작품에서 ‘산’은 관리들의 횡포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로 그려져 있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웃도 없고 사나운 호랑이가 많은 산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  

당시 백성들의 힘든 삶이 가슴아프게 울려 온다.
이처럼 당시 관리들의 횡포가 산 속에까지 이를 정도로 가혹했음을 잘 보여주는 시야. 

내가 표시한 것처럼,
한시는 넉줄씩 읽어 나가면 뜻을 쉽게 풀 수 있단다. 

오늘은 민중의 삶을 이런저런 면에서 관조적으로 살펴본 시들을 다뤘다. 

요즘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신록을 가득 피워내고 있어.
공부하러 다니면서도 나무의 새싹들을 한번씩 바라보렴.
그럼, 마음도 훨씬 시원해질 거야.
답답한 마음도 올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믿고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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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림 님의 나목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혼자라서 고립된 존재지만, 다들 혼자이기에 그 슬픔을 알고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을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부분입니다. 그저 실존이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것이지 라고 생각했지요.

뒤늦게 글샘님의 시 강의에 빠져있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24 22:5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갈대'의 실존이 '나목'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
슬퍼 봐야 보이는 거죠. 타인의 슬픔이 말입니다. ^^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 했지만, 같은 이유로 '타인은 천국'일 수도 있는 셈이죠.
나와 다른 타인은 지옥이지만, 나와 같은 타인은 반대인 것처럼 말입니다.
동병상련이란 한자 성어를 만든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