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백오십 년 전의 소설을 이제 읽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의 시간을 사는 사람과 백오십 년 전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의 삶 사이에,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만이 놓여있다면, 그걸 읽는 일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렇지만...
백오십 년 전을 뛰어넘는 생각이 작은 글자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올 때,
내 머릿속에 그 글자들이 각인되고,
그 시대와 현 시대의 유사성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질 때,
소설을 읽는 일은 시간 죽이기가 아니라,
역사를 읽는 것 이상의 사고에 대한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위대한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벨리코프는 자기 생각마저 상자 속에 숨기고 싶어했어요.
그 사람음 무언가를 금지하는 상부의 명령서와 신문 기사만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죠.
하생들이 저녁 9시 이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명령서나,
육체적인 사랑을 금하는 기사 같은 것은 그 사람한테 아주 분명하고 명쾌했어요.
금지되었으니 그걸로 끝인거죠.
하지만 허락이나 허가에는 늘 뭔가 의심스러운 요소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언가 끝까지 말하지 않은 불분명한 게 숨겨져 있다고 느낀 거죠.
온갖 종류의 위반이나 일탈, 규칙 파괴 때문에 그 사람은 절망감을 느끼곤 했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말이에요.(상자속의 사나이 중, 149)

이런 구절을 읽는 동안 나는 어느 수련원에서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훈련소와 같이 규정이 정해져 있고 교관들이 따라다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그렇지만, 이런 소설 속에서 백오십 년 전의 어느 남자가 뇌까린 말이,
지금 우리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아니,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구절에서,
밑줄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락하는 일의 불분명함과 금지하는 일의 명확함. 그 사이의 성찰은 대문호의 작품이 가지는 위대함으로 불릴 만 하다. 

행복한 사람이 평안한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없이 자기 짐을 지는 덕분이라는 게 명백하니까요.
불행한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행복이란 불가능하겠죠. ...
만족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모든 인간의 문 뒤에 누군가 작은 망치를 들고 서서 계속 두드려대며,
이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고,
그가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삶이 언젠가는 자기 발톱을 드러내 병, 가난, 상실 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그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듯이,
아무도 그의 불행을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될 거란 점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망치를 든 사람은 없고, 행복한 사람은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거죠.
사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일상의 소소한 걱정거리들이 그를 조금은 동요시키겠지만,
모든 게 아무런 문제없이 잘 흘러가죠.(산딸기, 183) 

이런 분위기는 프랑스 혁명의 부산물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7년 불행한 사람들이 자기 짐을 내려놓으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었을까?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랑에 관하여, 202) 

이렇게 근대적인 애정관을 표출하기 시작하는 것도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 시대는 찢어지게 가난한 시대였고,
굴 하나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목숨을 잃던 시대이기도 했다. 

"뭔가 방도를 찾아 보자고."
"어떻게..."
"어떻게?"
그러자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229) 

안톤 체호프의 많은 작품들 중 몇 작품의 몇 구절로 그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찾으려 노력했던 비상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소설로 분명히 이해할 수 없지만,
진창같이 추악한 일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적어도 그는 그만의 '벚꽃동산'을 찾아 헤매었던 사람이었던 것을 읽는 일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음은, 그의 '벚꽃동산'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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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28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에요 정말... 더군다나 요즘처럼 세월이 하수상할 땐 조용한 곳에서 체호프의 소설을 읽고 싶어져요^^

글샘 2011-03-28 11:59   좋아요 0 | URL
조용한 곳에서 체호프의 소설을 읽는 일... 참 좋더군요. ^^
벚꽃동산은 좀 있어야겠습니다. 학기초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바쁘네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