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없는 서수. 0.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서수,  0번째, 제0교시.(in English, 0th? 0st? 0nd? 0rd?)

그러나 우리나라엔, 유일하게도 세계에서 단 한 나라, 대한민국에는 0교시가 있다.

살인적인 입시 경쟁을 이겨 내려면 0교시를 해야 한단다.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니 옆에 앉아 있는 그애보다 더... 하면서 교실이데아를 부르던 서태지는 벌써 한 물 갔는데, 이 노래를 좋아하던 중딩, 고딩들은 이제 처녀 총각으로 변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아이들은 매일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그 좁은 교실에 우릴 몰아 넣고, 좀더 비싼 녀석들로 변신하려고 노력중이다. 그런데도 여간해서 그놈들은 변신하지 않는다.

-1st교시를 하는데도 변신하지 않는 녀석들은 정말 성의없는 고교생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죽자사자 가르치는데, 왜 변신하지 못하는 것일까. 등신 아냐?

이런 대한민국 특산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날이 올까봐 정말 두렵다. 하루 여섯시간 수업도 지겨워할 새파란 아이들에게, 아침 일곱시 반부터 밤 열시까지 열네시간 반을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으라 하니, 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안쓰럽다. 엄마보다 자주보는 담임 얼굴에 그래도 웃어주는 예쁜 아이들이 정말 안쓰럽다.

요즘은 아파트도 고층에 가리면 일조권을 찾고 난리법석들인데, 우리 아이들에겐 일조권이 없는걸까?

고딩들은 햇볕을 쬘 권리라곤 없는 걸까? 그저 200-300 룩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문제집만 디립다 풀어제끼면 의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벌고, 법관이 돼서 어깨 힘 줄 수 있는 걸까.

어차피 이태백인 세상에, 청년 실업 문제가 해결의 기미는 커녕, 고학력 실업자 증후군이 만성 사회병으로 자리를 떡 잡은 이 마당에, 하위직 공무원뿐 아니라 청소부에도 박사, 석사들이 수두룩하다는 이 희한한 나라에 우리 앨리스들은 토끼를 따라 뛸까, 거북이를 따라 길까.

아니면, 영원히 나이를 먹지않는 피터팬이 되어, 자기 중심적이고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언제까지나 자라지 않는 젖니를 반짝이며 네벌랜드에서 깔깔대고 있을 것인가.

이 고딩들과 그 담당간수들에게 한 시간 여유를 주자고 0교시 폐지를 외치면, 머리좋은 꼴통들은 0-8교시를 1-9교시로 하잔다. 지들은 보충수업 안 하니깐, 목 아픈 줄도 모르고, 다리 관절염 생기는 줄도 모르고, 애들 졸다가 아예 코골고 자는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병 생겨 죽어나가는 것도 모른다.

네벌랜드에서 피터팬에게 저항하는 인간적인 모습의 현실적인 후크 선장은 애초에 패배가 결정된 것이라고나 했던가. 하긴, 후크 선장이 이겼다면 그 얘기 제목이 피터 팬일 까닭이 없지.

담쟁이 장미 탐스럽게 핀, 백만송이의 장미에 둘러싸인 벽돌담 고등학교의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밤 늦게까지 불밝혀진 일반계 고등학교의 형광불빛을 보며 우리 나라의 미래와 교육열과 향학열과 경쟁력을 느낄 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고교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미래를 짊어질 후크 선장들로 가득한 원피스의 세계가 아니라, 모험과 항해가 결투와 획득으로 이뤄지는 삶의 현장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어른이 되기 싫은 피터팬으로 가득하단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

0은 서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0교시는 논리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0교시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엾게도 우리 아이들은 논리도 싫고, 이론도 싫고, 철학도 싫고, 그저 한 시간 늦게 일어나고 싶은 어린애의 칭얼거림만 가질 뿐이다. 누가 그들을 영원한 탈인간의 세계, 네벌랜드의 피터 팬으로 묶어 두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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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5-18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0교시는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퍼가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