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펭귄클래식 코리아가 100권 출간을 기념하여 선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겨울 방학과 봄방학을 이용해 읽었다. 

이번 책은 프랑스의 뒤퐁록과 랄로가 주해를 붙인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시학을 세 번째 읽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내가 국어교육과엘 간다니깐,
쪽집게 국어선생님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야쥐~ 이런 말을 한 마디 날리셨다.
그리고 책을 사 봤는데, 도무지 그 선생님이 이 책을 읽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시절, 무슨 강의에선지 기억도 가물거리는데, 암튼 시학을 읽었다.
우울하던 시절에 그냥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의문으로 남았던 것은,
<시학>에서 왜 <서사시와 비극>만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시>는 언제 나오는 건지...
하다가 결국 <시학>에는 <서정시>가 없다는 사실만을 기억했던 추억이 있다. 

이번엔 제법 두껍고 주해가 빡빡하게 달린 책을 읽으면서,
<시학>엔 시가 없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가래떡>엔 가래가 없고(우엑..),
<칼국수>엔 칼이 없고, <곰탕>엔 곰이 없고, <국화빵>엔 국화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알았다. 

시학이 쓰여지던 시대, 기원전 4세기 경에는 <서사시>와 <비극>만이 서양문학의 전부였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탄생한 문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그리스의 고전 <비극>이 다였던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동양에선 한자로 시를 남겼고,
각 지역에서 종교적인 금언들과 영웅 서사시가 풍미했지만,
<클래식>이란 것이 '전쟁이 나면 배 한 척 정도 희사할 수 있는 계급'에서 나온 말이라 하니,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서사시와 비극>이 곧 문학이란 개념의 대체였다 볼 것이다. 

그러니깐, 이제 읽고 보니, 이 책은 '제목이 시학일 뿐', 내용은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의 문학 개론'인 것이다.
'시학'이란 제목에 홀려서 계속 '시'를 탐했던 독자가 어리석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과 <서사시>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내가 생각하는 <서정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된 것이다. 참 큰 공부 했다. ^^ 

이문세 노래 중, '시를 위한 시'란 노래가 있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이게 노래의 전부다.
화자는 곧 눈감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천상병의 노래처럼 '노을진 구름 언덕'으로 곧 돌아갈 소풍객이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면 화자는 눈감고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띄우겠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시>가 있다는 건지... 시를 위한...이 무슨 의미인지...
병마와 싸우다 숨진 작곡가 이영훈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쓴 노랫말 같기도 한데...
저 '시'는 혹시 영문 'C'가 아닐지... 마치 뜨거운 감자의 김C처럼...
<C를 위한 시>라면, 이영훈의 이니셜에도 C가 없으니, 작곡가의 composer의 이니셜인가 싶은 곳까지 상상이 미쳤다.
나는 아직도 <시를 위한 시>를 <Composer 작곡가 자신을 위한 시>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듣는 이 노래는 눈물을 꼭 동반한다. 특히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이런 구절을 이문세 목소리로 들으면,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이 노래는 작곡가 이영훈이 병석에서 쓴 노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제가 생각하기로 말이죠.)
<시를 위한 시>의 후자는 우리가 보통 쓰는 <노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만, 앞의 것이 좀 복잡해요.
저는 때 시 時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時를 위한 詩>라구요.

이제 곧 저는 <눈 감고 바람>이 될 거래요.
그 때가 되면, 당신은 마음 아파할 거 아녜요? 그러지 말래요. 마음아파하지 말래요.
꽃이 떨어져도, 나의 별들이 가을로 사라져도, 이 생명 이제 저물어도... 날 위해 울지 말래요.

그 때 時 가 되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는 갈 거거든요.
천사들이 나를 데려갈 거거든요.
그 때가 되면, 내가 눈 감고 바람이 되면요...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다 띄울게요.
나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갈 거거든요.

그 때를 위한 노래, 그 때를 위한 시,가 이 노래의 의미가 아닐까 해요. ^^(어딘가 내가 썼던 글)

다시 시학으로 돌아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문학 개론서>이다.
다만, 문학 literature이란 용어 자체가 구술성 orality 과 대비된 문자성 literacy에 기반을 둔 용어로 훨씬 나중에 개발된 용어임을 고려하면 함부로 <문학 개론>이란 말을 쓰기도 어렵다.

서양의  literature를 일본인들이 문학으로 번역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이라는 통상적 정의나,
<문학>의 갈래로는 서정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 있다는 장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이야기하던 시대와는 개념 자체가 천양지차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한 번은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문만 읽었고,
다음 번엔 주해까지 밑줄치면서 읽었다. 
물론 읽으면서 지나치게 전문적인 부분을 따질 때엔 휘리릭 넘어가는 방법을 쓰곤 했다. 

시학을 읽으면서 <그리스 대표 희곡선>을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쉬운 점은 아직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읽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작품들은 워낙 유명해서 줄거리를 많이 읽었고,
다이제스트로 많이 접해서 마치 <고전 홍길동전>을 한번도 읽지 않은 아이들도 홍길동 이야기를 꿰고 있는 것처럼 친숙했기때문에 읽는 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정도는 함께 읽어야겠다는 야망은 남아 있다. 

고전은 오래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의 '개념'을 최초로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되기 때문에,
거기서 다양한 <언어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데 가치가 있다.
<미메시스 - 모방 또는 재현>같은 용어도 거기서 출발했고,
<뮈토스 - 줄거리나 플롯>, <카타르시스> 같은 용어들이 탄생한 모태가 된 작품이어서 가치가 크다.
그의 <서사시>에 대한 이론이나 <비극>에 대한 이론들은 무성하지만, 잠시 이야기가 되다 만 <희극>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관심들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시학의 2권, 즉 '희극'에 대한 상상이 무한대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 이런 구절이 적힌 페이지에 독약을 묻힌 수사 호르헤의 이름은 <호르헤 Jorge>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모든 독서는 해석이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작업의 변명을 붙여 두며 시작한다.
이 책 역시 <시학에 대한 해석의 일단>에 불과하다는 겸손의 변명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원본과 번역이 상당히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학의 원문만 읽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하는 바가 읽히기 때문이다.
사실, 서사시와 비극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는 독자인 나로서는 주해 부분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책을 독파하려 마음먹은 이라면,
적어도 <그리스 비극 대표 컬렉션>이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정도는 함께 읽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힘이 닿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또는 <수사학>이나,
플라톤의 <국가, 정체>도 함께 읽는 것도 당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사시는 <줄거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 되어있고,
비극은 <분규와 해결>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분규와 해결 사이에는 <반전>이 놓인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강의 노트를 작성하였다.
이 노트는 출판용보다는 강의용이었기때문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분류가 일관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당시의 문학을 생각하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학의 분류와는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 옮긴이의 해제도 간결하고 깔끔하다.
리쾨르의 논문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번역의 어려움을 '낯선 것의 시련'으로 표현한 부분도 재미있고,
언어 번역에서 만나게 되는 '저항과 망설임과 거부'의 과정을 적고 있는 부분도 사족같지만 오히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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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0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를 위한 C'가 되려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그 지방 사투리여야 제대로겠는걸요.^^
님의 리뷰를 보면서 이 책이 이렇게 재밌게 읽힐 수도 있구나 싶어, 용기를 내보려구요~

글샘 2011-03-02 03:26   좋아요 0 | URL
時를 위한 詩...일는지도 모르구요.
떠나야 할 때를 위한 시인지도... 암튼 저는 저 제목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이 책은 재밌게 읽힌다...고 제가 쓰진 않았는데요. ^^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고 썼잖아요. ㅋㅋ
2500년 전의 '문학개론'이니 지금은 별로 재미가 없답니다.
다만, 워낙 저런 문학의 시원을 밝힌 책이 되어놔서 읽어둘 법은 하지요.
뭐, 용기를 낼 거까진 없구요.
저처럼 읽기를 권합니다. ^^
먼저 원문을 주루룩 읽으시고, 틈나는대로 해제를 읽으시면... 훨 쉬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