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거울은 이렇게 세상을 똑같이 비춰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실은 따져볼수록 세상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지.
거울에서 연상된 공포 영화도 많을 수밖에...
다음에 읽어주는 시는 이가림의 시란다.
그의 '유리창'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번 살펴 보렴.임은 부재하지만, 저편에서 오는 빛을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나는 느끼고 나는 보인다. 임의 눈동자가 말이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어때?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처음과 끝이 대응되고 있지? 수미상응.
거기서 <모래알/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고 하고 있어.
유리창에서 모래알처럼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이름을,
눈물 방울처럼 가슴 아리는 이름을 불러 보는 이는 이별의 슬픔을 또는
임의 부재를 서러워하는 마음이라 상상할 수 있겠구나.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이란 구절에서,
영원히 이별할 수 없는 당신을 땅에 묻은 날, 정도로 해석한다면,
임과 사별한 이의 슬픔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겟다.
화자인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은 '사별한 임' 대신이겠지?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는,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와 같이 사별한 임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거기서 떠올리는 상황인 듯.
어디선가 오는 이 투명한 이슬.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느낌이구나.
유리창에 기대어 차가운 입김만 뿜고 섰는데,
물방울로 남은 그대의 이름,
이제 다신 만날 수 없는 그대의 이름을 하염없이 반복해 불러 보는 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 생각해 보는 시였다면,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는
사별한 임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을 만나게 되었다.
이가림의 다른 시 중에 이상의 <거울>을 떠올리는 시가 있다. 읽어 보자.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이가림, 순간의 거울 3>
내가 나를 보는 상황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지.
그런데 그것이 무한 반사 되는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거울에 비친 <가짜 나>는 이렇게 많은데,
거기 <진짜 나>는 없다.
세상에는 <가짜 나> 또는 <분열된 자아> 내지는 <남들이 본 나>는 많지만,
정말 <나>는 어디 있을까?
<내 마음>이란 것은 어디 있을까?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세상에 '없는 나'를 찾아서,
세상을 홀로 헤매는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가 현실의 '나'다.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알기는 참 어려워보인다.
이가림의 '순간의 거울'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상의 '거울'과 함께.
세상의 삶은 자기가 살려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쓴 시가 있다.
<환목어>라고 한다. 우리가 <도루묵>이라 부르는 생선의 이름의 유래가 담긴 시다.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지.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 드렸지.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지.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은 아니라네.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이식, 환목어>
목어(묵)가 푸대접 받다가,
임금이 피란왔을 때 대접을 받아 '은어'라 불렸대.
그렇지만 전란이 가라앉자 다시 '목어'가 되었단다.
(도로 묵이 되었다고 <도루묵>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대.)
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을 마지막 연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단다.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필요하면 칭송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세태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지.
목어는 원래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칠 뿐인데 말이야.

인간은 원래 모두 <부처>라고 했잖아.
그런데 세상에서는 누구는 1등급이고 누군 9등급으로 나누기도 하고. 한우도 아닌데 말이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가>일 뿐임을 안다면 마음을 넓게 가질 수도 있겠구나.
<환목어>같은 시는 세상을 '풍자'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필요하면 등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금세 잊어버리는 세태를 비꼬려고 주워든 이야기니 말이야.
자, 오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다룬 시들을 만나 보았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한쪽 면만 가진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어.
나와 다른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배움도 얻을 수 있겠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좀 푹 쉬자.
새 학기 시작할 때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