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뜻밖에 1미터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한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는데,
인간은 그런 걸 보고 이상기온이라는 둥, 기상이변이라는 둥 난리를 부리지만,
자연 앞에 인간은 좀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 주는 아빠가 1주일간 연수를 가야 해서 집을 비워야겠는데
스스로 할 일을 꾸준히 하기 바란다.
아빠의 문학 수업도 일 주일은 휴식이다.  

오늘은 다사로운 인간성에 대한 시를 몇 편 읽어볼까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떨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잔인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무한하게 넓은 마음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선 복효근의 '석쇠의 비유'를 읽어 보자. 

꽁치를 굽든 돼지갈비를 굽든간에
꽁치보다 돼지갈비보다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
익어야 하는 것은 갈빗살인데 꽁치인데
석쇠는 억울하지도않게 먼저 달아오른다
너를 사랑하기에 숯불 위에
내가 아프다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구는 나는 벌겋게 앓는다
과열된 내 가슴에 너의 살점이 눌러붙어도
끝내 아무와도 아무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고독하게 알고 있다
노릇노릇 구워져 네가 내 곁을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차갑게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나는
너의 흔적조차 남겨서는 아니 되기에
석쇠는 식어서도 아프다
더구나
꽁치도 아닌 갈빗살도 아닌 그대여
어쩌겠는가 사랑은 떠난 뒤에도
나는 석쇠여서 달아올라서
마음은 석쇠여서 마음만 달아올라서
내 늑골은 이렇게 아프다 (복효근,  석쇠의 비유)

제목이 '석쇠의 비유'이니, 석쇠에 고기를 굽는 상황을 보고 뭔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관찰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느니 <관조>라는 건 이제 알아 듣겠지? 
작가는 '토란 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의 작가란다.

꽁치나 갈비를 굽기 전에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다음엔 <억울하지도 않게> 달아오른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좀 억울하다는 이야기다.
굽는 건 꽁치와 갈비인데, 왜 석쇠는 필요도 없이 달아 오르지?
석쇠는 좀 희생정신이 강한 넘인 것 같지?   

농담 하나 할까? 
당구장에서 배울 수 있는 4대 정신이 있대.
다이(당구대)의 넓은 마음,
다마(당구공)의 둥근 마음,
큐대(막대)의 곧은 마음, 그리고
초크(큐대 끝에 미끌림을 방지하기 위해 바르는 것)의 희생 정신. 
뭐, 당구를 쳐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듣겠지만,
당구에는 이렇게 일본어도 많이 있단다.
암튼 희생 정신을 생각해 보자는 거지. 초크처럼 ㅋㅋ  

숯불 위에서 '아픈 나'는 석쇠다.
내가 아프다~고 했으니, 석쇠가 의인화되어 있구나.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굴고 나는 벌겋게 앓는다고 했는데,
앞에서는 사랑한댔다가, 이번엔 미워한댔구나.
정말 미운 건 아니겠지?
너(고기)가 제대로 익도록 하기 위해(성숙,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
나(석쇠)는 벌겋게 달아올라 앓아야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석쇠가 과열되어 고기가 눌어붙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석쇠는 그저 희생할 뿐, 고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석쇠의 고독이다.  

근데, 여기서 과학적으로 보자면 좀 어색한 게 있다.
프라이팬이라면 이 시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다.
프라이팬이 고기를 익히는 원리는 과학에서 배운 <열의 전도>니깐.
고체를 통하여 열이 전달되는 원리를 '전도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석쇠 위에서 고기를 익히는 것은,
숯에서 나온 열기가 고기에 바로 전해지는 것이다.
마치 태양열이 인간에게 바로 전해지듯이 말이야.
그런 열을 <복사열>이라고 한다.
전도는 고체라는 매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매체가 없이도 전해지는 것이니 다른 거지.
그치만, 뭐 여기서 희생정신을 고귀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과학적인 검증은 요정도로 마치자. 

고기가 잘 구워져 식사가 끝나면,
희생한 석쇠는 다시 고기의 흔적을 지우고 식는다.
고기를 사랑하지만 고기의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석쇠의 사랑은 그래서 아프다.
식어서도 아프다. 

이 석쇠와 같이 일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퍼붓는 사랑이 정말 큰 사랑이지.
이런 사랑은 뭐가 있을까?
부모의 사랑이 그런 거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잘 되기만 빌어주는 사랑.
선생님의 사랑도 유사한 면이 있지.
매년 제자들이 잘 자라서 둥지에서 날아오르기를 빌어주는 어미새같은 사랑. 

더구나,
그대는 꽁치도 아니고 갈빗살도 아니다.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석쇠처럼 달아올라서
당신의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이제 당신은 나를 떠난다.
사랑이 떠난 뒤에
혼자 남은 석쇠의 늑골(갈비뼈)는 허전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간혹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는 일이 있다.
그 아비에게 이 시를 보여주면,
석쇠의 늑골을 마음 속 깊이 공감하며 느낄 지 모르겠다.
선생님들도 졸업식장 단상 위에서
졸업생 대표가 읽는 '졸업사'를 들으며 그런 마음을 느낄 수도 있겠고... 

이 시는 이별의 상황에서
당신과의 추억 하나 남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달아 올랐다가 식게 되어
서글퍼진 화자의 상황을,
고기구울 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석쇠에 비유한 것이란다. 

주제는 '석쇠에서 떠올린 사랑과 이별의 의미' 정도면 되겠지?
이번엔 임의진의 '마중물'을 읽어 보자. 

우리 어릴 적 펌프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 대면 그 물이
땅 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불고 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임의진, 마중물)

지금은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집안에서 겨울에 뜨거운 물이 한정없이 나온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처럼 성냥곽같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돗물 받으려고 밤새 양동이를 바꿨던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학교나 회사를 쉬어야 했던 사람들,
좁은 방에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 얼음어는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사람들,
그이들에게 아파트처럼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은 오래 바라던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수돗물은 어딘가 수돗물 공장에서 지하 배관을 통하여 각 가정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물'과 '펌프'는 지표 밑을 흐르는 지하수를 찾아서,
거기다 파이프를 묻어 두고 물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우물에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고,
펌프는 '펌프질'을 몇 번 해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런데 펌프질 하기 전에 펌프통에 물을 한 바가지 미리 부어야 했는데,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다. 

뭔가 나오게 하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또 뭔가 의미를 발견했겠지.
역시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관조'가 되겠다. 

시어도 '데불고(데리고) 왔다', '오졌다(흡족했다, 만족스러웠다)'는 등의 사투리를 정겹게 쓰고 있다.
마중물은 땅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리고 오는 물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그저 슉슉 소리가 나면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펌프 손잡이가 묵직하게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물이 뿜어져 나오곤 했다.
그 무게가 오졌다는 유쾌한 순간의 표현이 멋지다. 

마중물에게서 배운 인생의 교훈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다.
사람이 동그라미라고 할 때, 제각기 따로 노는 원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
동그라미들은 서로 겹치고, 그 물결무늬들이 서로 간섭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외로이 따로 선 동그라미에게 <먼저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은 따스한 인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마중물이 '슬픔의 마중물', '슬픔의 무저갱'으로 표현되었다.
인생의 슬픔이 극심할 때, 마중물이 되어 슬픔의 지옥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무저갱(無底坑)은 '바닥이 끝없는 동굴'이란 뜻으로,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그 밑 닿는 데가 없이 깊다는 구렁텅이란다.
인생에서 그런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사람을 '마중물'에 비유한 것이다.

슬프고 아픈 현실에서,
그는 먼저 눈물 흘렸고, 현실을 꿋꿋이 견딘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 화자는 슬픔을 이겨낼 힘을
그에게서 얻고 있다.
그의 존재가 마중물이 되어서 말이야. 

세상의 어려움에 모두들 무릎 꿇을 지경으로 힘들다고들 하지만,
세상에는 또 그렇게 소중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에 아빠가 권해준 '산동네 공부방'이란 책에서도,
어떤 수녀님이 가난한 동네(부산 감천동)의 공부방 도우미가 되어,
그 힘겨운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세상에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 보이는 부모와 웬수가 되어 사는 아이들도 세상엔 많단다.
소년소녀 가장들처럼 정말 힘들게 사는 아이들도 있고.
그들에게 마중물이 되어주신 수녀님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단다.  

 

<한국의 마추픽츄, 부산 감천동>

만약에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면,
마중물이란 시와 연관지어 쓰면 멋진 글이 나오지도 않을까 싶다. 

이번엔 좀 마음 쓰라린 시를 한 편 소개할게.
우선 읽어 보렴.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어떤 네티즌,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작년에 어떤 용광로 기사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터넷 기사 내용은 이렇다.

*새벽에 일을 하다 실족해 용광로 쇳물에 빠져 숨진 29살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한 네티즌의 조시(弔詩)가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충남 당진군 환영철강에서 근무하던 김 모(29)씨는 7일 새벽 2시께 용광로 위에서 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김 씨는 사고 당시 지름 6m의 전기 용광로턱이 걸쳐 있는 고정 철판에 올라가 고철을 끄집어 내리려다
중심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의 한 동료는 "김 씨가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넣어 쇳물에 녹이는 작업을 하던 도중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고 말했다.
당시 용광로에는 섭시 1천600도가 넘는 쇳물이 담겨 있어 김 씨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업체 관계자 등을 상대로
안전관리 소홀 여부 등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첫 소식을 전한 뒤, MBC 등 일부 언론이 보도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그러나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올린 조시가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김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정웅재 기자
http://www.vop.co.kr/2010/09/09/A00000318761.html 

 

이런 것이 문학의 기능이란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니?
하다 못해 다 타버린 잿덩어리라도 보아야 고인이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용광로 속 시뻘건 쇳물은 섭씨 1,600도가 넘는다고 하니, 사람의 살이나 뼈는 금세 타버리고 말 거잖아.
나중에 고인의 뼛조각 몇 개를 찾았다는 뉴스도 났지만, 정말 황당한 죽음이었을 거야. 

이 조시(죽음을 위문하는 시)는
인정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가슴에
촉촉한 봄비가 되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였단다. 

알지도 못할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마음 아픔을 공감하는 계기를 준 시.
문학이란 이렇게 신문기사보다 더 큰 공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지. 

아빠의 시 해설을 들으면서 민우도 좀더 마음이 넓은 사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물론 아빠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게.
내일 저녁에도 여유가 있으면 한 편 쓸게.
혹시 바쁘면, 일 주일간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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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2-1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쇳물은 쓰지 마라..
한 글자 한 글자 녹아서 쇳물이 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어머니 아들의 얼굴이 됩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청년의, 그 어머니의 도려낸 심장을 만지는 것 같습니다.
슬프고 슬픈 시요, 달래고 달래도 달랠 길 없는 마음입니다.
어쩌자고.. ㅠㅠ

글샘 2011-02-18 21:52   좋아요 0 | URL
정말 아픈 시죠.
방금 운전하고 오는데... 영도 한진중공업 앞에 천막치고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봤습니다.
오늘은 안추워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경찰들은 기업가 눈치보느라 가득 모여서 망이나 보고...
세상 참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