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요즘 며칠간 수업에 활용할 요량으로 <철학 우화> 서른 편을 타이핑했다.
다 치고 보니 65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타이핑하다 보면 글을 차근차근 읽게 되어 좋다는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철학 우화인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즐기면서 타이핑하곤 했다. 

김혜리의 이 책은 참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이 지극히 매력적인 사람들이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맛깔스럽기 그지없었고,
<씨네 21>이란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인 만큼 영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는데,
영화보다 사람이 전면에 부상됨을 어찌할 수 없어 그렇기도 했다.
한 사람 읽고 몇 번을 곱씹고, 또 한 사람 읽고... 그랬다. 

이 책을 처음 빌린 것이 방학 전이었으니, 12월 말쯤 처음 읽은 꼭지가 마지막의 <박완서>였다.
그걸 다 까먹고 있다가 20번 구본창을 읽고 나서, 이제 에필로그가 나오겠지, 했는데,
거기 고 박완서 선생 이야기가 있었다.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1월 22일 타계하시곤 박완서란 작가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다시 짠한 마음이 들었다.
박완서는 내게 참 '짠한 사람'이다.
박완서라면 왠지, 자살한 행복 전도사를 아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을 <외톨이>로 추억했다.
그러나 그 외톨이의 추억은 그들에게 상처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상상의 샘물을 길어 올리기도 하고, 그 시절에 떠올린 사색의 바다는 평생 삶의 버팀목이 되거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내가 버렸다고 마음먹었다 치더라도 그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고,
어느 순간 죽어도 아무 남을 게 없으리라던 외로움들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될 것이다.(77, 김진)
 

송강호가 '봉준호' 영화를 논하면서 직지!를 보여준다. 

국가나 사회가 당신들을 지켜줄 것 같아요? 천만에요. 운이 좋아야 해요.(112)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을 생각해 보면, 이것 이상의 감독평은 불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이병헌같이 큰 배우도 고민을 털어 놓는다. 

<아스팔트 내 고향>이란 작품에서 감독이 "넌 이게 데뷔작이자 은퇴작이야. 끝나면 방송국 근처 얼씬거리지 마라.
대체 왜 연기자가 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단다. 욕먹는 게 고돼서 촬영장 나가는 것에 가위가 눌릴 지경이었다고.(145) 힘든 일을 이겨내지 않으면 실패자란 기억으로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조심할 일이다. ^^

김병욱 감독의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무거운 지위와 책임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놀랄 만큼 황폐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때가 많잖아요. 사람들이 모두 속고 있는 거죠. 그들은 설마 나처럼 무책임하거다 미숙하지 않겠지 믿는 사람들의 피라미드인 거예요.(135)" 이런 말이 나오는데, 참으로 세상을 깊이 꿰뚫어본 사람의 하이킥이다. 

연기인 나문희는 <사람은 그냥 다 지나가는 거 같아. 그러니까 만났을 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아무리 누군가를 마음에 둬도보기 힘들 때가 있고... 다 이렇게 지나가는 거구나 해요.(377)> 이런 도통한 소리를 서슴없이 한다. 것도 엄청 밝은 모습으로... 

이탈리아 감독 에르마노 올미는 "카메라 뒤에 서는 일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카메라가 나 대신 당신에게 키스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302)란 고백을 했다고 한다. 어떤 일에 오래 종사해서 우러나는 철학은 누구에게서든 배울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책 디자이너 정병규는 "인간을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한다"는 책의 미덕을 꼽는다. 가난해서 문학을 선망하던 시대. 김우창 이야기를 해서 김우창을 읽도록 만들었던 그가 "나는 도서관을 싫어해요... 도서관이란 책의 존재감이나 물질성은 보지 않고 내용에 실려 있는 기호만 보관하는 곳이거든요. 새 책이 오면 겉표지를 벗겨 신간 안내판에 압핀으로 꽂아놓고... 합법적으로 책을 학대하는 곳이니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도서관은 적이죠." 이런 말을 할 때, 나도 완전 동의하는 마음이었다. 요즘 책들은 작가 소개나 작품 소개를 책날개 안쪽에 많이들 하는데, 도서관 책들은 표지를 날려버려서 그 소중한 자료를 잃어버리게 된다. 왜 사서들은 표지를 날리라고 배우는 걸까?(세실님, 왜 그런 거요?) 

나도 한때 자작나무는 아니지만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즐겨 듣곤 했다. 그의 프로는 '별밤'처럼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던 느낌이 아직 남아있는데, "사람들은 음악 평론을 한다면서 독후감을 써요.... 평론가는 되지 말고 될 수도 없다. 가이드가 되자고 마음 먹었죠." 보통 평론가라고 하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가려가며 평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보다는 음반을 사는 사람은 알고 싶어하는 것이 다르다. 가이드, 큐레이터가 평론가보다 좋다는 그의 이야기에 십분 동감이다.  

김혜수와의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특히 뒷모습 이야기가. "<타짜>에 정마담 뒷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그녀는 고니에게만 자기의 모든 뒷모습을 보여줬어요. 정말 사랑한 거죠.(224)" 자신이 기투하고 있는 분야에서 이런 느낌을 받아야만 진짜,라고 볼 수 있을 거다. 타자는 외로운 사람들, 서로 속고 속이는 사람들이어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긴데, 거기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란... 더 큰 감동을 준다. 

내가 대학 시절 과외하러 갈 때 놓쳐서 가슴이 아팠던 63-1번 버스 이야기를 문소리가 한다.
맨날 버스를 타고 언제나 창밖만 보고 있으니까, 늘 똑같은 거리를 뭘 그리 열심히 보냐? 고 묻더란다.
"똑같지 않아."라는 문소리의 대답이 오래 남는다. 남들에겐 똑같아 보이는 세상을 똑같지 않게 보는 이.
그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 다른 만큼 예민해서 상처도 많고 피곤도 더할 것이다. 그의 상처가 보이는 듯 하여 나도 아프다. 

아내는 빨간 색 계통의 옷, 화려한 꽃무늬 들어간 옷을 아주 선호하는데, 그래서 난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 빨강에 대하여 일가견이 생긴 느낌이다.
정구호란 디자이너가 빨강의 까다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이해가 갔다. 완전 아내 덕이다. ^^
"까딱하면 천해 보이고 잘하면 고급스러운, 천의 얼굴을 가진 색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지는 위험한 색입니다." 고상한 빨강, 톡톡튀는 빨강을 구사하기란 참 쉽지 않은 노릇임을 조금씩 알 것 같다. 

강금실 편에서 놀란 것은 그녀가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문법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구절로 보이지만,) 지금을 항상 종말과 같이, 지금을 내가 죽는 시점과 일치시켜서 받아 들이면 여유가 생길 것이라는 종교적인 관점이 그녀가 이야기하니 조금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다시 나문희 씨 이야기. 

   
 

딸들이 음악을 해서 그런가봐.
우선 연주자가 작곡가의 작품을 표현하려면 10개쯤으로 쪼개보잖아요.
연기자도 마찬가지예요.
한 인물을 표현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의 10가지 성격은 쪼개보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리고 어디에 힘을 주고 호흡을 어떻게 갈까를 연주처럼 생각해야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옆에서 나도 음악 레슨을 들었는데... 재미있었어요.
세상은 눈만 크게 뜨면 얼마든지 배울 게 있어. 그렇지? 

 
   
  
갑자기 반말로 묻는 나문희 씨의 질문이 마치 내게 돌아온 느낌이다.
눈이 작은 나도 눈을 크게 뜨고, 열 명의 성격을 연주하고 싶다.
새 학기를 앞두고, 나도 연기자가 되어 멋진 연기를 펼칠 마음에 간혹 들뜨곤 한다.  
 
김혜리가 인터뷰에 앞서 적은 글들은 참으로 간결하게 그 사람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서 거기서 가리고 뽑은 질문만을 던졌는지,
그리고 인터뷰이의 성격을 열 가지가 아니라 쉰 가지쯤 상상해 보고 거기서 <프롤로그>를 뽑아 올렸는지를 상상하면, 베틀 앞에 앉은 수공예의 달인을 만나는 느낌이 책장을 통해 전해진다. 
 
매 인터뷰의 앞에 가로 1, 세로 1.5 센티미터 정도의 사진이 붙어있다.
주로 손을 찍은 것인데 신선하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손에서 성격이 드러난다는 숨은 웅변으로도 보인다.
결국 박완서에 가서는 '손'에 대한 질문까지도 한다.  
 
나는 내 손을 사랑한다.  
내 손은 어려서부터 희고 여성스러운 것이었는데(한자로 쓰면 백수다.) 
세밀한 작업에 어울리는 내 손을 위해 해준 게 없어 좀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전에 피아노를 손에게 가르쳤던 적도 있긴 하지만... 요즘엔 구박덩어리다.
그런 관심 때문인지, 손에 대한 사진이 매 인터뷰마다 실려있는 작은 사진들이 오히려 정겹고 반가웠다. 
사람은 취향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살면서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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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2-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정말 여러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가봐요

글샘 2011-02-10 19:09   좋아요 0 | URL
이책 재밌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 보세요.
글쓰실 모티프를 잡기 좋을 거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