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엔 폭설이 내린다 하고,
어딘가엔 추위가 닥친다 하는데, 우리 사는 여기는 추위나 눈과 무관하게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참 좁은 지구인데,
곳곳에서 겪는 일은 참 다르구나.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민우가 살아가야 할 시대엔 세상이 참 좁아질 것이다.
이제 서울까지 세 시간도 안 걸린다.
세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삶의 중심도 빨리 이탈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심을 잡으며 사는 일은 그래서 더욱 힘들 것 같구나.
더 잘 사는 삶을 위하여,
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을 배우기 바란다.
오늘은 김명인의 '소금바다로 가다'란 시를 읽어 보자.
시나 영화에서 일상 생활에서는 쓰지 않는 '기본형'을 쓰는 일이 있다.
'번지 점프를 하다' 이렇게 말이야.
그건, 과거형을 쓰는 것보다 조금 더 멋지고 신선하게 보이기 위함이지, 별 다른 뜻은 없단다.
화자는 '소금바다로 갔다'는 경험을 곰곰 생각해 보기 위해 과거형을 버리고 기본형을 썼을 거야.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水車)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김명인, 소금바다로 가다)
네 연으로 이뤄진 이 시의 화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한다.
3연 마지막 부분에서 '뿌옇게 흐린 눈'으로 화자는 소금바다를 보는데,
이 시를 읽는 나는 마찬가지로 '뿌옇게 흐린 눈'을 하고 화자를 보게 된다.
<소금>의 이미지는 '타인도 썩지 않게 하는 것'의 이미지를 담고 있단다.
우리 삶은 손보지 않으면 금세
때가 타고,
녹이 슬고,
살짝 맛이 가려고 하는 것이어서, 늘 <소금>으로 썩지 않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그런데, 또 우리 삶은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사는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그 피곤하고 무의미하기까지 한 삶을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힘에 겨운 여행>에 비유하고 있구나.
먹장은 시커먼 그을음과 연기가 가득한 탄광의 마지막 <막장>의 의미고,
매연으로 가득한 세월동안 우리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힘겨운 여행을 하는 나그네인 것으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고 있단다.
인생은 늘 <자연>과 대비되어 표현되곤 한다고 했지?
자연에서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인간도 <한줌 낙엽>이 되어 살겠다는 <사유라도>하며 살기를...
그래서 <한줌 낙엽>이 되어 제 몸을 <길바닥에 떨굴> 수 있다면...
인생이 그저 힘겹지만은 않고, 따뜻하리라...
이런 이야기로 1연을 맺고 있어.
그러나...
2연에서 '그러나'로 시작하는 걸 보니...
인생은 자연에 동화되는 자연스런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할 것을 예측할 수 있겠다.
화자는 <푸른 엽록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광합성을 하며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너덜거리도록 찌들고 풍화된 삶>을 쉰 살이나 살았음에
'후회하는 한탄', 곧 회한(懷恨)의 감정을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 후줄근하게 퇴근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허망함과 자괴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지.
그런 회한을 '춥구나' 하는 촉각적 심상,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는 거야.
쉰 살이 넘어 피폐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화자의 시선에 뭐가 보이니?
그래.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염전은 바로 소금밭이지.
바닷물을 가둬두는 저수조에서 위의 사진에 있는 수차를 돌려서 바닷물을 공중으로 뿌리곤 했단다.
(물론 요즘엔 이런 작업은 펌프로 다 하지만...)
그래서 농도가 진해진 바닷물은 이제 증발지에 옮겨 두고 햇볕을 쪼여가며 점점 농도가 짙게 만든다.
(비가 오면 묽어질 수 있으니 '함수류'라는 곳도 만들어 두고 비닐 지붕을 덮기도 했단다.)
이렇게 햇볕에 쪼여 만다는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하고, 혹은 불로 구워 만드는 곳도 있었단다.
정말 오랜 시간을 두고두고 노력해서 결과가 조금씩 조금씩 보이는 작업이 소금 만드는 작업일거야.
그렇게 소금 만드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지.
그 사람은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어.
제 잘났다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모습이라 볼 수 있겠지.
그 사람은 하루 종일 노동을, 그것도 아무 재미도 없이 심심한 반복인 <무료한 노동>을 하지.
날이 밝아서부터 날이 저물때까지 수차를 밟고 또 밟을 뿐인 그 사람은,
온 몸을 땀방울로 짜게 적시면서 노동을 한단다.
그 모습을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에 빗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어.
시지프스는 벌로 산꼭대기까지 매일 둥근 바위를 밀어올리게 되어있단다.
그렇지만 다음날이면 그 바위는 반대편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다시 그 일을 해야하는 거지.
이 소금 굽는 사람도 수차를 밟으면 수차는 내려가고
그 구렁에 떠러지지 않으려고 다시 밟고 올라서지만, 다시 내려가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거야.
인간의 삶은 이렇게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단다.
매일매일이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반복일 뿐이지.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것처럼 결과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날그날의 삶이란다.

그런데 3연에서 다시 <하나>가 등장한단다. '그러나'와 같지.
앞에서 자연은 생명력으로 넘친다. <그러나> 화자는 부질없는 삶을 살아서 맥빠진다는 이야길 했지.
여기서 <하나>가 나왔으니 이제 다시 '의미를 찾는 과정'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자.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소금의 결정이 뿌옇게 엉기는 것이란다.
삶도 이렇게 소금 결정이 시나브로 엉겨붙는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결과물을 맺는 건지도 모른단 이야기야.
구워진 소금이 어느새 썩어가는 살에 저며오는데,
뿌옇게 흐린 눈으로 그 소금바다를 바라보게 한대.
뿌옇게 흐려진 눈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이지.
자신의 맥빠진 삶도 그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님을 염전의 노동자를 통해서 깨닫고 있는거야.
그래서 뿌옇게 흐려지는 눈이 되는 걸게다.
삶에서 흐르는 눈물.
또는 삶의 무의미함과 부조리성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화자는 힘겨운 삶이었지만, <하나> 뒤에서 의지를 품게 된다.
그간 겪었던 눈물을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쳐서 결정을 이루기 위하여...
이제 다시 삶의 바다, 그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고 있어.
이제 화자는 삶과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힘을 되찾고 있는 걸로 볼 수 있겠다.
민우야.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보렴.
누구나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 간단다.
그 매일에서 의미를 찾는 일보다, 힘들다고 생각하기 훨씬 쉬운 거야.
그렇지만, 인간은 그 매일을 살아가야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존재지.
전에 아빠가 '센과 치히로' 이야기 들려준 적 있지?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매일을 힘겹게 생각하는 센의 이야기.
힘들때 한번씩 생각해 볼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오늘 시도, 힘들다고 생각할 때, 한번씩 읽어 보렴.
혹시나, 소금 굽는 그이를 통해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야.
날이 차다.
감기 조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