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경림의 시를 몇 편 살펴볼까 한다.
신경림은 '시인을 찾아서 1,2와 같은 책도 쓰신 분이고, 민요에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란다.
원래 이 땅에도 이런 시 말고, <민요>라는 것과 <시조창> 같은 것이 있었는데,
민요는 보통 노동요로서 경쾌한 일꾼들의 노래이고,
시조창은 느릿한 절제의 미학을 갖춘 노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문화에 기가 눌린 일본놈들은 일체의 조선 시가를 금지했어.
다만, 술집의 기생들에게만 허용해 주었더란다.
그래서, 지금도 간혹 텔레비전에 한복입은 국악인들이 민요를 부르기도 하는데 거의 만나기 힘들지.
1970년대만 해도 명절때면 꼭 등장했고, 1980년대에도 민속 씨름 등에서 볼 수 있었으며,
전국 노래자랑에서도 간혹 시조창을 부르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이제 씨가 말랐다 볼 수 있지. 

신경림의 초기 시 중, 가장 멋진 작품은 역시 '갈대'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갈대는 사진처럼 '갈색 대'의 일종이야. 억새랑 다르지.
억새는 은빛으로 반짝이고 산중턱에 살고, 갈대는 갈색이며 물가에 많이 자란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이런 노래도 있고,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한 적도 있다.
그만큼 갈대는 '흔들리는' 속성으로 비유되는 소재구나.
여자의 마음은 잘 흔들리고, 인간도 나약하게 흔들리는 존재라고 말이야. 

화자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지.
산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뭐, 이런 것.
그것을 석자씩 묶어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있는 것 

이렇게 정의한 것이구나. 

인간은 자의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
민우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한국에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야.
철학 용어로,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것을 <피투성>이란 말을 쓴단다. 입을 피, 던질 투, 성품 성 해서 피투성.
내던져짐을 입은 존재의 성질. 

그래서 산다는 일은 원래 슬프고 고된 것이야.
바람이 흔들어서도 아니고,
달빛이 슬퍼서도 아니야.
제 조용한 울음...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힘들어 죽겠어요~~~ 이렇게 징징댈 순 없잖아.
누구에게나 삶은 이렇게 속으로 조용히 울고있는 상태임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어.
시험에 나오는 말로 쓰자면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나 <숙명적 비애>에 대한 깨달음... 뭐, 이런 말로 쓸 수도 있다.
힘들 때 누구나 그렇다는 이런 시를 읽으면 힘이 되지 않을까? 

문학 교과서에서 배운 <농무>를 간단히 보자꾸나.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 

농무 農舞는 농사꾼의 춤, 곧 농악놀이를 의미한단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 놈들은 조선의 모든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농악놀이 역시 마찬가지 말살의 대상이었지.
농촌 공동체가 한데 어울려 고된 일을 나누고 이겨내는 의식은 저항정신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해서,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독재 시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금지된 것이었단다.
그래서 <남,보,원>처럼 자기 주장을 하는 자리에서 북같은 것이 등장하는 거야. 

농악놀이를 해 보지만, 도통 신이 나지 않는구나.
6행에서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한> 심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그래서 꽹과리를 앞장세우고 농악을 한바탕 울리는데,
건장한 남정네들은 농촌에 없고 꼬마들만 졸랑거리고 처녀들이나 킬킬댈 뿐이야.
농촌은 이미 <막이 내리는> 시대인 거지.
하강의 이미지. 

196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에는 도시의 공업화는 가속화되었지만, 농촌은 말라죽고 만단다.
농촌의 인력을 도시로 끌어낼 수밖에 없었지.
도시는 엉망으로 더러워졌고, 도시 빈민 문제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단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처럼 말이야. 

조선 왕조 때, 농민에 대한 핍박에 저항하고 일어선 이 중에 '임꺽정'이 있었지.
'서림'이는 양반 나부랑인데 '모사꾼'이라고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 
조선 왕조 때 더럽던 농부들의 처지나,
산업 역군 시대의 볼품없는 농부들의 처지나, 거기서 거리라는 의미로,
꺽정이와 서림이가 등장한단다. 

쇠전(소시장)을 지나 도수장(도살장) 앞에 와서 농악놀이를 벌이는데,
점점 신명이 난대.
이 사람들이 정말 신명나는 노래일까?
아니랬지? 화나고 짜증난다 그랬잖아. 직설적으로. 6행에서.
근데 신명난다고 했으니, <반어법>
또, 어떻게 보면, 도살장 앞은 죽음의 공간인데 거기다가 <신명>을 덜커덕 붙였으니 <역설법>으로 보기도 해. 
제목도 그렇고, 신명나는 농악놀이인데,
그 농촌의 삶을 보면 참 팍팍하고 힘들다는 것을 담고 있단다.

암튼, 이 시는 몰락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농악놀이'를 통해 그려낸 시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이런 구절에서는 쓴웃음을 짓는,
스스로 비웃는 듯한 <자조적>인 의식을 읽을 수 있어.
상당히 현실 참여적이고 비판적인 시라고 볼 수 있지. 

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시 중에 이런 아름다운 시가 있었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모르겠는가?가 의미를 담은 한 부분으로 본다면 대충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단다.
가난해도 잘 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설의법>이 쓰인 부분이지.  

가난해도, 외로움을 알아.
몰락한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 젊은 청년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단다.
그러고도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했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골목길에 달빛이 부서지는 늦은 밤.
젊은이들은 한없이 외로웠을 거야. 

가난해도, 두려움도 있어.
뭐가 젤 두렵겠니? 새벽 두시가 되었는데 어쩌다 호각소리나 장사꾼 소리에 잠을 깼더니...
멀리서,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어.
그 당시엔 기계만 돌아가지 않았지. 밤새워 철야 작업을 하는 끔찍한 작업장...
어휴, 생각만해도 무섭대. 

가난해도, 그리움을 잘 알아.
가난한 공원들(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렀지)은 1년에 휴가라고는 설과 추석에 4,5일 정도 가는 게 두번이 다야.
일요일이라고 푹 쉴 수 없었고, 지금처럼 교통도 좋지 않았단다.
10대 후반의 공원들은 늘 고향을 그리워 했을 거야.
보름달 쳐다보며 고향의 새빨간 감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도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했겠지.
<새빨간 감바람 소리> 바람소리에 빨간을 합친 공감각적 표현(청각의 시각화)이란다. 

가난해도 사랑을 알지.
울고, 웃는 사랑의 마음.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대.
가난한 넘은 외로움을 느끼는 건 사치고,
두려움 따위 모르고 열심히 근무해야 하고,
그리움 같은 배부른 고민 버리고 일해야 하고,
사랑 따위 사치스런 감정 느낄 필요 없다는 현실.
오로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죽도록 기계처럼 일만 해야하는 이웃의 젊은이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시란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전태일 열사가 온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이란 법전을 끌어 안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하고 외치며 산화해 갔단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인정되고, 임금 협상이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 

경찰들은 사장님의 말을 잘 듣고 노동자를 탄압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을 때,
올림픽 개최지라는 시선때문에 노동자를 총칼로 짓누를 수 없었단다. 
그때 노동조합도 합법화되고, 상당히 임금도 많이 올랐지.
노동자도 이제 일요일에 놀러가고, 자동차도 살 수 있었단다. 해외 여행도 가고 말이야. 

그렇지만, 그때부터 세계화 시대가 시작되었단다.
가난한 나라들이 조금 잘살게 되면서 부자 나라들이 독점하던 이윤이 줄어들게 된 거지.
세계화 시대는 한 나라의 빈부격차를 세계적 범위로 확대시킨 거라 보면 된다.
그 이전에는 한국 내에서 가진자, 못가진자였던 것이 이제 세계적인 빈부의 격차로 확대된 거지.
주식회사들도 외국인들이 주식을 많이 가지게 되고, 결국 외국인 회사가 되니까, 이름을 다 영어로 바꾸게 되는 거야.
국민은행도 KB 이렇게, 포항제철도 posco... 이렇게 말이야.
노동자들도 단결하지 못하도록 <정규직> 조금과 <비정규직> 많이... 이렇게 구성이 바뀌고 말았어. 

1988년에 발표된 가난한 사랑 노래의 시대는 갔지만,
아직도 <비정규직의 사랑 노래>는 계속되고 있는 거란다.
이때부터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공부, 공부> 노래를 부르게 된 거야.
워낙 직장이 불안해 지니깐 말이야.
너라도 열공해서 <정규직> 직원이 되거라~ 이런 시대가 온 거지.
학원이 마구 생기고, 과외가 엄청 늘어난 시대...

신경림의 1970년대 노래, <목계 장터>의 떠돌이 시대가 다시 올는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노마드>인데, 이게 곧 유목의 시대, 떠돌이의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거든.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각 행은 읽기 좋게 4음보로 구성되어 있단다.  

하늘은 나에게 '구름, 바람, 잔바람, 방물장수, 떠돌이'가 되라고 그래.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자의 이미지잖아. 

신경림의 고향은 아빠와 같은 충청북도 충주란다.
지금은 충주댐으로 막혀서 배가 다닐 수 없지만,
예전엔 단양 - 충주 - 팔당 - 서울까지 뱃길로 다니던 곳이었단다.
목계 나루터는 그 중의 한 나루터겠지. 

아흐레 나흘에 장이 서니 5일마다 장이 서는 거지.
오일장에서 박가분(박하분이라고 한단다.) 파는 방물장수라도 되려는 듯.
그렇지만, 그 방물장수가, <농무>의 농민보다, <가난한 사랑 노래>의 노동자보다 불행할까? 

오로지 돈을 더 벌려는 농민, 노동자보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떠도는 방물장수가,
3년에 한 7일정도는 천치처럼 멍청하게 있어도 먹고 사는 일에 크게 변화는 없는 삶. 

물론 부유하고 풍족한 삶은 아니겠지만,
문학 시간에 배운 김동리의 <역마>의 주제도 그런 거잖아.
운명에 대한 순응. 

굳이 큰 돌이 되어 우뚝하니 솟을 필요 없이,
잔돌이 되어 시류에 맞게 살아가는 인생. 그것을 보잘것없다고 무시할 수 있을까?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맵고 차고 모진 시대를 만나면,
소심하게 들꽃이 되어 풀 속에 얼굴 묻고 살기도 하고,
바위 뒤에 붙은 잔돌처럼 살기도 하자...

이렇게 떠도는 민중들의 애환, 그 생명력... 이런 것이 이 시의 주제란다.
목계 나루를 배경으로 한 풍물과 토속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억센 생명력을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는 작품이지. 

민우야.
삶은 언제나 만만하지 않단다.
맵고 찬 시대가 올 수도 있고, 물살이 모질게 빨라질 수도 있고 그래.
그렇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세상을 이겨낼 힘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민우가 무엇이 되든 너를 응원할 거란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도,
한국의 학생들이 지나치게 공부란 노동에 내몰리는 배경도 오늘 다 이야기를 했구나.
물론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없다.
다만, 네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안다면, 스스로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제 기말고사 1주일 전이다.
어디 서든, 얼마나 가든, 성실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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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의 작품은 엉뚱하게도 과거에 TV에 많이 소개되었던 <시인을 찾아서>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신경림 씨가 시인인줄 몰랐었습니다.
그러다가 <목계장터><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접하면서
그 분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가난한 사랑 노래>를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언제나 다시 읽어도 가슴이 짠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