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휴전선 아래 최북방 연평도에 폭탄이 터져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고 다치기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올 봄에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처럼 이번 연평도 사건도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는 일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언론에서야 북한의 도발이다.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고 야단들이지만,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처럼 여러 번 거짓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단다.

항상 남한은 북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하고, 북측은 반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실은 늘 숨어 있거든.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사는 현실은 이렇게 고달프다.
뉴스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일.
사람의 말은 (人+言) 합쳐져서 '믿을 신' 자가 되어야 하는 건데... 

오늘은 분단과 관련된 시를 몇 편 추려볼게.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어서는 안 되겠지만,
사소한 군인들의 실수였을지도 모를 일을 전쟁의 위협처럼 뻥치는 넘들도 있을 수 있으니 가증스런 노릇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휴전선 이북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전쟁은 그들을 뿔달린 도깨비로 그리게 한다.
이북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남 사람들도 마찬가지 괴물일 것이다. 

우선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를 한번 보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이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심상은 두 가지다. '물'과 '불'
이 둘 중에서 '생명력'을 가리키는 것은 무얼까? 물이지?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물이 있어야 한단다.
메말라가는 나무도 물만 있으면 자랄 수 있고,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도 물 속에 동동 떠 있지.
그렇지만 '불'은 '파괴', '소멸'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심상을 <원형적 심상>이라고 불러.
<물>은 '생명'이라는 원형적 심상을 불러오고,
'소멸, 전쟁'의 원형적 심상을 가진 말은 <불>이 되지.
<어머니>란 존재는 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대 문학에서든 보통 '사랑,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듯이 말이야. 

이 시의 1,2연에서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하는 존재야. 서로 메말라 있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가물어서 비를 기다리는 집에서도, 바다에서도 다 물을 좋아하지. 

3연의 시작, <그러나>...
우리는 물로 만나지 못하고, 불로 만나려고 하고 있어.
바로 오늘과 같이 남북이 전쟁이라도 벌일듯이 을근들근 다투는 형국과 같지. 

그렇지만, 4연에서 그대를 부른단다.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만날 때, 불로 만나면, 서로 소멸되고 말겠지.
그래서 화자는 <흐르는 물>로 만나자고 그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니라 '푸시식푸시식' 불꺼지는 소리를 내는 물의 만남. 

아~ 이제 전쟁 따윈 다 좋아하는 넘들 줘 버리고,
불꺼지는 물로 만나자는 평화의 노래.
땅은 비록 휴전선으로 반쪼가리 났지만, 남과 북은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만날 수 있겠지.
마치 중학교때 배운 이강백의 희곡 <들판에서>의 싸이코 형제처럼 민들로 씨앗을 날리면서
화해하는 분위기가 떠오르는구나.

이 시를 꼭 남북 분단의 상황으로 보지 않아도 돼.
메마르고 건조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도 있고,
그런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황폐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생명력의 원천 '물'의 힘으로 대립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제야. 

보통 전쟁이나 분단을 소재로 이야기하면,
고통, 한스러움이 드러나기 쉬운데, 이 시에선 만남의 기대가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단 특징이 있어. 

아빠가 알고 있는 시 중에 가장 섬찟한 시가 김종삼의 <민간인(民間人)>이란다.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 

제목은 '민간인'이란다. '군인'의 상대적인 말이지.
민간인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사람이란다.
미군들이 맨날 이라크에 폭격을 퍼붓고는 한다는 소리가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겠다는 뻥을 치곤 하지. 

1947년이면, 일본이 패퇴하고
위도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군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때야.
쉽게 말해 미국의 식민지였던 셈이지. 

심야. 이북의 황해도 해주 앞바다 용당포란 조그만 포구에서
사공이 조심스레 노를 저었어. 어디로? 이남으로 가고 있겠지. 
이북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대.
땅을 무상으로 나눠줄 때만해도 이북의 분위기는 좋았는데,
지주와 친일파, 가진자들을 처참하게 숙청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어.
일제 강점기, 식민지 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일본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겠는데,
과연 누구까지 죽이고, 누구까지 벌을 줘야 하는 걸까?
그런 데서 이북은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판단해서 이남으로 도망을 친(월남한) 사람이 많았단다.
<정의>를 가장한 피의 학살 앞에서 말이야. 

그렇게 몇몇 가족이 조심조심 배를 타고 남하하고 있는데,
울음을 터뜨린 '영아(갓난아기)'가 있었어.
처음엔 입을 틀어막으려 했겠지.
그래도 소리를 줄일 수 없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니? 

이십 몇 년이 지났으니 1970년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분단은 지속되고 있고,
그 바다에 빠뜨린 영아에 대한 진실은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시다. 

민간인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지.
특히 그 중에서도 '영아'가 무슨 사상적 대립이 있을 것이며, 무슨 주장을 했겠냐고.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영아가 생매장되었던 곳.
그 <삶을 위한 죽음의 현장>이었던 이야기를 짧은 글 속에서 비극적으로 엮어내었단다. 

자, 이 시에서는 소설처럼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
이런 시를 <서사적>인 시라고 그래.

전쟁 중의 시를 두어 편 보자.
모두 가톨릭 계통의 '구 상' 시인의 시야.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 공산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구 상, 초토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전쟁 중인데, 이 땅은 모두 불타버린 땅, 초토(焦土)가 되어버렸어.
전쟁 중이어서 적군은 모두 쏘아 죽이고 찔러 죽이고 터추어 죽이곤 했지만,
불쌍해서라기 보다는, 시신이 썩으면 거기서 벌레가 꼬이고, 결국 전염병의 근원이 되고 말아.
그래서 적군이지만 시간이 있으면 끌어 묻어버리곤 하는 거지.
시간이 없으면 무리지어 놓고 불을 질러버렸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3연의 이 역설적인 표현이 이 시의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야.
살아서는 적군이 되고 원수가 되지만, 죽고 나서는 싸울 일이 없으니 말이지.
그런데 이 역설 속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는지...' 이런 의혹이 일어나게 되지. 

마지막 연의 '은원'도 마찬가지 역설이란다. 은혜와 원망이라니...
우선, <원망>은 적군이어서 싸우다 죽이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겠지. 전쟁에 대한 증오심.
그렇지만 <은혜>는 '죽음'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삶'에 대한 소중함, 되찾은 평화... 이런 것이겠지.
다투다 죽게 되어 참으로 <원망>스럽지만, 죽음 앞에서 더이상 적군은 없다는 <은혜>로운 깨달음. 

죽음 앞에서 진정한 화해와 통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은혜입은 것이란 거야.
동족의 상잔이란 비극 앞에서 그저 원한 만을 갖게 하는 시보다는 이런 시가 깊은 뜻을 담았다고 생각해. 

물론, 증오심으로 가득한 시도 있단다.
박두진 작사의 6.25의 노래가 그런 것이다.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케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후렴>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고 또 싸워서 다시는 이런 날을 오지 않게하리 <후렴> (6. 25의 노래)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고 이 <나라>와 이 <겨레>를 빛내겠다는 원한으로 가득하지.
슬픈 역사에서 나온 노래지만, 이런 노래를 다시 들고나오는 시대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가진 못할 망정,
외국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참 밉다. 

구 상 시인의 <초토의 시 1>도 한번 읽어 보렴.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구 상, 초토의 시 1> 

하꼬방은 판잣집을 일컫는 말이야.
전쟁 중에 제대로 집을 짓지 못하고 어디서 박스같은 것을 주워다 급조한 집이지.
피란민(전재민) 집은 그렇게 볼품없었을 거란다.

그 하꼬방의 유리창이랄 것도 없는 곳에서 해바라기처럼 뭔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여럿이다.
그 볼품없는 아이들의 얼굴이지만,
아무리 전쟁중이어도 아이들은 이 세상의 미래다.
그래서 햇빛마저도 경의를 표하듯 눈부셔서 돌아서고, 화자도 그러지.

울상이 된 그림자... 전쟁 중의 아이들을 바라본 화자의 참혹한 심정이 드러나는 말이다.
전쟁 중의 가난과 참화는 빛나야 할 어린아이들의 얼굴에 어둡게 가리워졌음에 침통하려는 순간,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는 개나리가 휘어지듯 망울이 져 있다.
전쟁 중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는구나.
5연에서도 같은 발견을 한단다.
언덕배기를 달려 내려가는 체니(처녀, 소녀)의 앞니가 빠진 모습, 아, 죄 없음.
천진무구함,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그 모습의 발견.  

전쟁통에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었고, 온통 먼지투성이인 비극적인 세상에서,
화자는 <개나리의 망울>을 발견하고, <소녀의 죄 없는 순수>를 발견한단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술 취한 듯>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단다.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45년 살면서 느낀 건데,
텔레비전에 나온 말을 그대로 믿는 건 바보란다.
그럼 어떻게 볼까?
글쎄. 그것이 고민인데, 그래서 책도 보고, 생각도 하는 것이겠지. 

사실과 진실은 늘 다른 것이거든.
지난 봄에 바다에 <천안함>이란 배가 두동강 나서 가라앉았고, 마흔 여섯 명의 젊은이가 죽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렇지만, 바다에 빠져 죽은 젊은이들을 갑자기 <영웅>으로 만들고,
모금까지 해서 큰 돈을 유가족에게 주면서, <천안함>을 피격한 것은 북측의 <어뢰>라고 밀어붙인 주장은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 국민을 우롱하고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야.
그들은 <진실>이 밝혀지면 많은 것을 잃는 사람들이겠지.
아니면 <진실>을 은폐해서 많은 것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거나.
암튼, 오늘의 연평도 사태도 워낙 군사지역이어서 <사실> 자체가 무언지 알기 어렵구나.
오로지 국방부의 발표만이 유일한 발언인 시점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따지기 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좀 지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언론, 방송의 문제를 풍자하는 <당나귀 길들이기>란 시를 한번 읽으면서 마치자.

당나귀 한 마리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아침, 저녁으로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당나귀의
불온한 상상력을 거세(去勢)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도 쉬지 않습니다.
간혹 당신의 성급한 채찍에
뒷발질로 날뛰는 당나귀가 있더라도
안심하십시오, 그 놈들의 습성은
당근 뿌리 하나에도 이내 아픔을 잊고
부드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온순한 짐승으로 돌아갑니다. (오종환, 당나귀 길들이기 -TV론) 

오종환 시인은 당나귀를 길들이는 <우화>를 통해서 <방송>을 비꼬고 있단다.
이런 시를 <우의적>, <우화적>, <풍자적>이라고 하지.
당나귀에게 반복해서 이야기하기.
주말에도 반복하기. 그래서 상상력을 거세하기.
억압에 저항하는 당나귀가 있더라도,
그놈들은 당근(유혹)에 금세 익숙해질 것이란 이야기. 

제목에 TV론, 이라고 부제를 붙여 둔 걸 보면,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방송을 장악하고,
거기서 반복적으로 거짓된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국민을 무지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상황을 풍자하고 있단다.
<불온한 상상력>은 사실은 <비판적 사고력>이 되겠지.

<우민 : 어리석은 백성>을 만들어야 저항이 줄어드니
맨날 <늑대가 나타났다>를 외치는 거야. 그렇지만 양치기 소년은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단다.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백성도 때가 되면 깨닫게 되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
이 굴레는 한국 국민의 깨달음에 역시 질곡(수갑과 족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읽고 공부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
오늘은 좀 딱딱한 이야기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니 한번 이야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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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1-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종환 시인의 '당나귀 길들이기'라는 시는 처음 접하네요. 이분의 시를 좀 찾아봐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