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날이 따뜻하구나. 봄날 같아.
누군가는 지구 온난화가 인간이 저지른 환경 오염때문이라고 하는데,
또 어떤 학자는 지구는 원래 1500년 주기로 냉온의 변화가 생긴다고도 하더라.
아빠는 지구처럼 큰 천체가 인간 정도의 작은 존재때문에 완전히 망가지는 건 아니라고 봐.
물론 대기 오염, 무차별적 삼림 남벌 등도 원인이 되겠지만, 지구는 그 나름의 진행이 있겠지.  

오늘은 참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 정지용의 시를 몇 편 소개할게. 
정지용의 시 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의 힘을 드러낸 시는 역시 <호수1>이야.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1) 

한 행을 다섯 글자로 간결하게 정리했고,
이 간단한 서른 한 자로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참 효과적으로 표현했단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시를 쓴 사람인데, 한국 전쟁 이후에 북한으로 가게 된단다.
본의든 아니든, 해방 후에 이남보다 이북이 지식인에게 더 인기가 있었단 건 전에 한번 일렀을 거야.
그래서 남한에서는 1987년까지 정지용의 시를 읽을 수 없었단다.
시를 보면, 전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냄새가 없는데도 말이야.
교과서에서 배운 '여승'의 시인, 백석도 마찬가지지. 

정지용의 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향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한 시,
시각적 표현과 다양한 감각적 표현을 활용하여 누구라도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시, 향수. 
1927년 3월 일본에 유학가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읊은 시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鄕愁)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도 유명한 곡이지.
한 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말미에 똑같은 후렴구를 붙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 절절하게 한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으로 고향을 그리는 것이 1연이지.
넓은 벌 동쪽 끝에는
옛날 이야기를 지줄대고 떠들듯 정겨운 실개천이 휘돌아 나오는 풍경. 풍경 하니까 '선경'이 떠오르는구나.
앞에서는 경치를, 뒤에서는 감정을... 선경, 후정. 
얼룩백이 황소는 소 중에서 얼룩무늬가 있는 칡소를 뜻한다고 그래. 범소라고도 하는데,
마치 호랑이처럼 세로로 얼룩얼룩한 무늬가 줄지어 있단다.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의 얼룩소가 점박이 젖소는 아니란다.
그 소가 해설프게(뭔가 좀 어설프고 느릿느릿한 느낌이지? 충북 옥천지역 방언으로 여겨진다.)
게으른 울음을 '음메~~'하고 울어.
근데, 무슨 빛?
금빛.
울음은 '청각'적 심상인데, 금빛처럼 '시각'적 심상을 썼으니,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이지. 
2연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도 마찬가지야. 바람 소리를 들은 거니깐 청각인데,
말을 타고 달리듯 시각적으로 표현한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이지.

2연에서는 아버지가 떠오르는구나.
아, 고향~ 하니, 처음 떠오르는 건, 고향의 전체적 풍광. 그 담엔 아버지.
좀 가부장적 시대의 냄새가 난다.
그 담 연에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단다.
흙에서 자란 화자가 풀섶 이슬에 함부로 쏜 화살을 찾다가 함추름히 옷을 적시던 고향. 

그 다음 4연에 가서야 '아내'가 생각난대.
만약 아빠가 외국에 가서 일하면서 고향을 떠올린다면, 1번이 아내고 2번이 자식일 텐데 말야.
시대적 환경이 이렇게 반영되곤 했단다.
근데, 그 아내가 '사랑스럽고 보고픈 그대'가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지. 그것도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떠오른대.
그 발벗은 아내의 얼굴도 아니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는 모습이 떠오르는...
하긴,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어린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시켰으니 그럴 법도 하지. ^^ 

마지막 연에선 하늘의 별과,
두런두런 가족들의 말소리가 은은하게 사라져가는 듯 시가 마무리되는구나.
연극 용어로 F.O. (fade out) 비슷하지. 

이렇게 아름다운 용어로 고향을 그린 이 시인의 다른 시 <고향>은 조금 직접적으로 아픔을 드러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처음과 끝은 역시 수미상관이다. 가운데서는 뭐가 나와야 하지?
고향 상실의 아픔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아픔의 <심화>를 이룬단다.
그게 수미 상관이야. 

이 시의 2연과 3연, 4연과 5연은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드러낸다. 대조적이라 하지.
2연에선 산꿩과 뻐꾸기의 변하지 않음, 그렇건만, 3연에선 마음의 허전함과 떠돎.
변하지 않는 자연과 변하는 인간사의 대비, 대조... 그걸 통한 고향 상실의 슬픔을 쓰는 시란다. 
4연도 흰 점꽃의 인정스러운 불변과 5연의 풀피리 소리 상실, 메마르고 쓰디쓴 입술의 대조.
그렇게 일제 강점기 고향을 잃어버린 아픔을
시각, 청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전에 김광균의 <와사등>을 설명하면서 그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뭔가 현대적인, 모던~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다는 거야.
현대인의 외로움, 서양적인 가로등(와사등)이나 고층 건물, 기차 등...
정지용도 모더니즘적 경향이 드러나는데, 다음 시 <카페 프란스>를 한번 보렴.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카페프란스)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 튤립(tulip).

'카페'란 것도 일제 강점기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겠지.
원래 커피를 '카페'라고 부르는데, 커피집이란 소리지. 뭐 술도 팔고 그런 가게였지만.

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고, '루바쉬카'나 '보헤미안 넥타이'로 차린 이들이
카페에 가서 농담이나 하는 '세태'를 쓴 시란다. 그야말로 '모던~'한 시라고 볼 수 있지.
외국 종자의 강아지는 주인이 기르는지 사람을 졸졸 따르는 카페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지. 

정지용의 시는 이처럼 <향수>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 외에도 <전통>에 대한 동양화적 표현도 하고 있다.
그의 시 <인동차(忍冬茶)>를 보자.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인동차) 

  

인동차는 겨울을 이겨낸, 이런 시련 극복의 심상도 가지고 있지.
늙은 주인(곧 화자)의 내장에 시도때도 없이 인동차 달인 물이 들어간단다. 

자작나무 숯이 타는 불이 붉게 피어오른 방,
방구석엔 무에 파릇하게 순이 돋고,
김도 서리는 풍경이 그려지고 있구나.
'잠착(潛着)하다'는 말은 '밑으로 가라앉다.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똘하게 쓰다.' 같은 의미란다.

산속에서 달력도 없이 '한겨울'을 하얗게 보낸다.
하얀 것은 눈이 많이 내려 시련을 겪는 모습이기도 하고, 화자의 늙은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고요하고 적막한 산중의 고요한 모습 속에서
한세상의 고난을 되새기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중국의 사상사에서 이렇게 고요한 자연에서 조용하게 지내는(은일 隱逸, 숨어서 편안히 지냄) 일은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며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입신양명보다 낫다고 여겨지기도 했단다.
그런 대표자가 노자와 장자이고,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도 발전한 것이 도교란다.
이런 시를 동양적 은일의 세계를 그린다고도 하고, 정신의 여백의 아름다움을 그린다고도 하지.
서구적 이미지로 가득하던 <카페 프란스>와는 대칭적인 위치에 놓인 시란다.
마지막으로 속세와 단절된 고요한 산속의 이야기를 한편 더 읽어 보자.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長壽山) 1>

♣ 벌목정정 : 나무를 도끼로 찍는 소리
♣ 아람도리 ~ 베혀짐즉도 하이 :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베어질 만도 하다
♣ 멩아리 : 메아리
♣ 쩌르렁 :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소리이지만 그 뒤의 고요를 강조하고 있다
♣ 밤이 조희보다 희고녀 : 밤이 종이보다 희다(검은 밤을 배경으로 흰 눈으로 뒤덮인 산의 빛나는 모습)
♣ 이골을 걸음이랸다? : 골짜기를 내가 걸어감
♣ 조찰히 : 조촐하게, 맵시가 아담하고 단정하게
♣ 늙은 사나이 : 웃절의 중
♣ 줏는다? : 본받아 볼까?
♣ 올연히 : 홀로 우뚝한 모양(시적 화자의 지향하는 태도)

이 시의 특징이라면 <산문시>이고,
산속의 <은일사의 삶>을 그린 것이고,
말투는 <옛스런 어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말투의 마무리를
'~하이(하구나), 희고녀(희구나), 걸음이랸다?(걸음일까?), 줏는다?(주워담아 볼까?)'처럼 재미있게 쓰고 있다. 

장수산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문학에서 '지명'은 화자의 마음 속에 담긴 공간이라고 봐야 한단다.
김승옥의 <무진 기행>의 안개 가득한 도시, 무진도 그렇고,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마음의 고향, 삼포 역시 그렇다.
그건 부산, 울산 같은 실제 지명이라 보면 안 되겠지. 

장수산은 '오래오래 사는 산'이란 의민데,
수백 년 사는 사람은 <신선>이지.
신선처럼 세속과 절연된 순수한 삶을 시적 화자는 그리고 있는 거란다.
장수산에는 사람도 없어. 그저 웃절 중이 가끔 와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가겠지.
그런데 눈이 많이 쌓여 종이보다 흰 세상. 보름달이 떴어. 

온 세상이 하얀 겨울...
신선처럼 산 속에 앉았는데, 마음이 편안하진 않구나.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이렇게 표현했으니 말이야.
그럼 해결책은?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이런 것이지. 견뎌 내라! 냉정하게, 곧고 바르게!!! 이런 의지가 드러나지.  

오늘은 정지용의 다양한 시를 다뤘다.
사람의 모습은 한 가지 면만으로 파악하면 안 되지.
정지용을 <향수>의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건 그의 뒤통수만 보고 그를 잘 안다고 여기는 거나 마찬가지야.
사람을 볼 땐, 그 사람의 더 많은 면을 만나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거겠지.
내일 또 쓰마. 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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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1-3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놓고 보니 정지용 시의 다양한 성격이 한눈에 보이네요.

글샘 2010-11-30 21:55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눈이 밝으시니 그렇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