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김수영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민중의 생명력을 쓴 <풀>이나
지식인의 의지를 쓴 <폭포> 등에서 힘들었던 군사독재 시대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도 함께 이야기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까지 나왔구나.
오늘은 신동엽의 <봄은>을 먼저 읽으면서 시작하자꾸나.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 봄은)
이 시에서 대립되는 심상이 둘 나오지?
따뜻하고 밝은 계절, 봄과
춥고 어두운 계절, 겨울.
신동엽이 저항하고 현실에 참여했다건 군사 독재 시대를 계절로 나타낸다면,
이육사가 <절정>에서 일제 강점기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겨울이 될 거야.
겨울에 춥고 어두울 때,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누구나 당연히 갖는 마음 말이야.
자 1연에서 보면, 봄은 <남해>와 <북녘>에서 오지 않는다고 했단다.
일제에 강점당했던 조선이 해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결과였단다.
일본에게 승리해서 찾은 해방이 아니었기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다스리게 되었지.
당연히 이북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내세운 김일성 정권이,
이남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내세운 이승만 정권이 자리를 잡았단다.
그런데, 처음에 이북의 정권은 토지개혁에 성공해서 지식인들의 인기를 얻은 반면,
이남의 정권은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해서 부패의 온상이 되었지.
그런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결국은 남북 분단과 전쟁까지 부르게 된 원인이 된 거란다.

그래서, 봄은,
남쪽 건너 미국이나 북녘 하늘 너머 소련에서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붙였을 거야.
봄은 <좋은 미래>겠지.
그것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온 국토의 <아름다운 논밭> 곧, 풀뿌리같은 민중의 사이에서 움튼다는 기대겠지.
3연의 <바다>와 <대륙> 밖은 1연의 <남해>와 <북녘>과 같은 표현이고,
마지막에 <쇠붙이>를 흐물흐물 녹일 봄은,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했던 구절과 유사하구나.
신동엽은 1960년대 독재 정권의 횡포와 국가의 혼란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외세>에 있었다고 본 것이지.
이런 시들은 그 어둡던 시대에 저항의 불꽃을 꺼지지 않도록 힘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겠지.
유사한 주제 의식을 가진 시, 이성부의 <봄>을 한번 읽어 보자꾸나.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봄)
여기서의 <봄>도 <행복을 기대하는 희망의 시절>이 될 것임은 당연하지.
봄을 '너'라고 불렀으니 <의인법>이 쓰였단 건 초딩도 일 거고.
시대가 얼마나 어두우냐면,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라고 했어.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참혹하게 춥고 어두운 시대겠지.
그렇지만 2행에서 <너는 온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아마 너는 올 거야... 이런 추측이 아닌, 단정.
근데 <희망>인 <너>는 빨리 오지 않고 자꾸 게으름을 부려.
뻘밭,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눈 팔고, 싸움도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대.
그러다 보면, 혹독한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지.
4.19때 마산에서 고1이었던 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르기도 했고,
1987년 민주화 투쟁때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고 박종철 군이 희생되기도 했어.
6월 9일에는 연세대 앞에서 고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지.
이렇게 다급한 사연을 들고 바람이 달려가서 <희망>의 <봄>을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온대.
그렇지만, 금세 오진 않아.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더디게 오긴 하지만 <마침내> 올 것은 온다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고, 세상 이치란 거야.
사필귀정. 모든 일은 올바른 쪽으로 귀결된다는 것.
만약에, 만약에... 더디게 더디게 올 희망의 <봄>, <민주화>를 맞게 된다면 말이야.
눈부셔서 바로 쳐다보며 맞을 수도 없을 거고,
뭐라고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도 않을 거래.
그래서 겨우 두 팔로 껴안아 볼 거라고... 간절한 기다림을 나타내고 있는 시란다.
주제라면 <희망의 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정도가 되겠지.
아빠가 아는 <기다림>의 최고봉은 역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야.
한번 읽어보고 설명을 좀 읽고, 다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화자는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하고 기다려.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니까.
그런데, 그 기다림은, 마음의 조바심을 동반해.
시에서 가장 흔히 쓰는 게 시각이라는 감각이지.
이 시에서 기다림을 어떤 감각을 사용해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가슴이 '애리는', 가슴 속이 알싸하게 뒤집혀지는 듯한 통증을 호소해.
기다림의 간절한 조바심을 촉각적으로 표현한 거지.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아, 얼마나 간절한지, 몇 글자로 다 보이지 않니?
어려서 부모님 오시길 간절히 기다리다보면, 형제들끼리 이제 정류소 왔다, 전봇대 돌았다, 슈퍼 앞이다...
이러고 기다리잖아.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너였다가, 너였다가... 다 너로 보이는 경지.
'사랑하는 이여'란 부름을 기점으로 화자의 태도는 '기다림에 조바심내는' 수동적 태도를 버려.
이제 화자도 그대에게 가기 시작하지.
적극적 태도와 능동적 자세로 그대에게 다가서는 거야.
아직 너와의 거리는 멀겠지만, 그 아주 먼 데서 부터 나는 너에게 가기 시작하고
아주 오랜 세월 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고 그래.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이런 거.
우리의 만남은 <금세>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거리는 <아주 먼 데>기 때문에, 아주 먼 데서부터 서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천천히> 다가서는 기다림의 자세를 마치 마음공부하듯 스스로를 잡도리하고 있어.
네가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일은 못견디게 힘든 일이지만,
내가 천천히 먼 훗날을 내다보며 다가가는 일은 힘겹지만은 않은 일이 되겠지.

자, 여기서 퀴즈, 하나!
위의 시를 쳐다보지 말고, 이 시에서 '문'이 몇 번 나왔을까?
퀴즈, 둘!
그 문은 어떤 어떤 문이었을까?
정답은 퀴즈 1번.
세 번.
퀴즈 2번의 답은,
문을 열고,
문이 닫힌다,
문을 통해... 이런 문이야.
기다림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작가는 '문'을 등장시킨 거야.
그 세 번의 문은, 처음엔 자꾸 열려.
아, 미치겠어.
저 문이 열리면 우리 임이 오시려나.
아냐, 다음 문이 열리면 오실거야... 조바심, 심하면 쓰러지지. ㅎㅎ
두번째 문, 이제 닫힌대. 으--윽, 좌절하지. 닫힌 문 앞에서.
님은 갔슙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슙니다...
기다리던 문이 닫혔을 때, 아, 그 기분은 얼마나 참담하겠니.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면, 시가 아니지.
일기고, 낙서고, 절망의 기록일 뿐이겠지.
여기서 세 번째 문, 통하는 문이 등장하는 거야.
네가 닫혀있지만, 내가 가려고 맘먹고 달려들면, 너는 통할 거야! 이런 희망이 보일까?
황지우가 이 시를 쓰던 시절은 서정주가 좋아하던 전두환이 독재를 하던 때였어.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 그걸 닫힌 문으로 형상화했을 수도 있단다.
그러나, 닫힌 문을 보고 그저 눌러앉아버리면 슬프지.
희망이 없으니까.
그 문을 통해 이성부의<봄>에서 더디게 더디게 오던 속도로,
<아주 먼 데서>, <아주 오랜 세월을>, <천천히> 오고 있는 민주화라면, 열린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기다리는 일에도 마음 조급해 하기만 해선 안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
오늘은 신동엽의 <봄은>, 이성부의 <봄> 그리고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통해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봤단다.
시를 읽으면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느껴도 전혀 문제는 없어.
그렇지만, 그 시가 어떤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탄생한 것인지를 알고 읽으면
또 다른 굵직한 의미가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풀이를 달았단다.
민우가 기다리는 <봄>은 어떤 걸까?
너희 청소년기를 <사춘기>라고 하잖아.
<청춘을 생각하는 시기>
곧 봄을 기다리는 시기란 말이지.
그저 겨울만은 아니고, 그렇지만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시절.
이런 시들을 통해서
더디게 더디게 오는 봄,
그렇지만 꼭 오고야 말 봄에게
민우도 조금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게도 되는구나.

가을이 가고 봄이 오는 시절의 반복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나무의 속에는 여름에 부쩍 자라고 겨울에 느리게 자라서,
여름엔 성글고 밝은 조직을 만들고 겨울엔 조밀하고 어두운 조직을 만드는 원리가 자연의 섭리잖아.
나이를 먹고 어린이가 <성장>하고
청소년기의 <성숙>을 넘어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
겉으로는 모두 같아 보이지만,
저저마다 속으로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이테. 한자로 연륜(年輪)을 생각해 보자.
마음의 나이테,
생각의 나이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