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애지시선 16
김해자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해자라는 이름은 시로 먼저 만났다.
'데드 슬로우'란 시를 양철나무꾼님 서재에서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감동이 참 오래 밀려와 가슴에 담겨있다. 

큰 배가 항구에 접안 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 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 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
그대에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김해자, 데드 슬로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8년 여 조립공 시다 미싱사
우유 학습지 배달
시집 무화과는 없다 

1980년대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공활을 거쳐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이 흔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동자로 일생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보면, 멀쩡한 대학교 나와서 다시 노동자로 사는 일은 어떤 지향을 가진 것이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러구러 살아오던 김해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부랴부랴 유용주 등이 그러모은 시집이 이 시집이다. 

그가 노래부를 자리에서 불렀다는 부용산이란 노랫말 참 슬프고 허전하다.
그리고,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람이 월북했다고 해서 한참을 금지곡이었다는 것도 더 허전한 소식이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시 /안성현 작곡 /안치환 노래


안치환의 '부용산' 듣기
http://blog.naver.com/djp2218/80060278642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보고 듣고 있다고,
내가 너희의 고통을 다 알고 있다는 '관'하고 '음'하는 관세음의 마음일까.
그의 눈에는 온갖 세상 앓고 있는 소리가 다 들린다. 

결국 그 자신도 아파서 쓰러지지만... 

김해자가 바라보고 들은 관세음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몸꽃이다. 

그 여자 몸은 도화지
철도 없이 이 꽃 저 꽃 피고 진다네
그 여자 허벅지는 너럭 바위
밤새 울긋불긋 암각화가 새겨진다네
구렁이 똬리 튼 듯 등나무 덩굴 감고 올라간 듯
눈가에는 눈꽃 등에는 등꽃 터진 뱃가죽엔 배꽃
그 여자 남자는 화가
살빛 화폭에 푸른 색채 그려 넣는다네
그 여자 남자는 조각가
꿈틀대는 돌 위에 보랏빛 문양 때려 넣는다네
열 손가락은 끌이 되고 주먹은 망치가 되고
허리띠는 조각품을 묶는 끈이 되었다네
새벽녘 밤샘 작업을 마친 남자는
완성된 작품 안고 뒹굴었다네
용서해 줘 죽도록 사랑해
부풀어 오르는 그림 위에 눈물의 유약 바라주며
밤새 돋아난 몸꽃 어루만졌다네 (몸꽃, 전문) 

이렇게 날카롭게 날선 신경으로 세상을 듣고 보노라면, 어찌 쓰러지지 않을 수 있을지...  

한몸인 줄 알았더니 한몸이 아니다
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 어디선가 삐그덕
나라고 생각하던 내가, 내가 아니다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언제인지 모르게
삐긋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충직하던 손발도 저도 몰래 가슴을 배반한다
한맘인 줄 알았더니 한맘이 아니다
늘 가던 길인데 바로 이 길이라고,
이 길밖에 없다고, 나에게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현재진행형이 나를 흔든다
후배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선배 앞에서는
그가 견뎌온 나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실행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아프지도 않다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마흔 즈음, 전문 )

그의 마흔 즈음은 삐걱거린 모양이다.
마흔 즈음이면 누구나 삐걱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흔들리는 모양이다.
자신감도 없고 더 이상 이뤄야 할 무엇도 없어지는,
그래서 늘 모자란 내가 살아야 함을 알게 되는 나이.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밤... 

고정희의  <사십대>에서 방황이나 고비를 그러 안고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마흔 즈음엔, 마흔에 대한 시들이 눈에 밟히곤 한다.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사십대, 전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0-10-17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김해자 언젠가 시특강 하시면서 살짝 인용,퉁쳐 버리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몇몇 있어요.
그들의 지난한 삶을 알아야 시가 달리 읽히는 시인들.
전 김해자가 그랬고,이면우가 그랬고,고정희가 그랬어요.

고정희는 '제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라고 했는데...
쭉정이든 알곡이든 뭐가 여물어야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글샘 2010-10-17 12:26   좋아요 0 | URL
03:32까지 뭘 하세요? ㅎㅎ
시깨나 쓰는 이들은 다들 삶이 팍팍해요.
그래서 시인을 알아야 시를 안다고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죠.
고정희는 사십대에 지리산에서 삶을 버렸다죠.
뭐, 여물거나 말거나... 조급하지 말고, 제 편지나 하나 읽으시죠. ^^

가을 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