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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고은초 글.사진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스물 하나.
스물 다섯.
스물 아홉.
이 나이들에 난 뭘 했는지...
스물 하나엔... 대학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고,(학사경고 이후 급 소심 모드로...)
스물 다섯엔... 공산권이 무너지는 걸 외롭게 지켜보면서 군부대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스물 아홉엔... 이미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버린 어린 남자가 삶의 부대낌에 상처받고 있었다.
물론 시대가 그렇게 불편한 대학 생활과, 불쾌한 군대 생활과, 불안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만든 탓도 있지만,
어쩌다 결혼을 일찍한 우리 시대엔 이런 자유,를 꿈꿀 머릿속 자유도 없었다.
올림픽 이후 여행 자유화 바람을 타고, 동굴 속에서 우상만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드디어 햇빛을 본다.
그 이전까지 서울대라는 우상만을 바라보았고, 대기업이라는 안전망만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우상은 서울대도 대기업도 아니었다.
그 우상을 깬 것은 서태지와 함께 왔고, 더이상 '아이돌'은 '우상'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우상은 꼰대들의 멋대가리 없는 구태의연함이고, 아이돌은 형체가 규정되지 않은 싱싱한 펄떡임이었다.
운전과 '드라이브'도 동의어가 아닌 게 되어버렸고,
지식과 '지식 검색'은 지식의 개념 자체를 뒤바꿔 버렸다.
인터넷 하나만 있으면, 온갖 지식의 통로를 순식간에 헤집고 다닐 수 있게 되어버린 것.
그 틈을 타서, 온 세상을 누빈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천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고은초처럼, 이름은 은방울처럼 초롱초롱하지만, 대책없이 사고뭉치인 준비성 제로의 무대책 처자 이야기는 처음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이 꼬마는, 툭하면 사기를 당하고, 강도를 당하고, 도난을 당해서 주저앉아 운다.
그렇지만, 이 무대책 꼬꼬마는 울다가 금세 파란 하늘을 보고 뛰어나가고, 푸른 카리브의 바다만 보이면 모든 걸 잊는다.
인터넷에다가 '나 강도당했어염.'하고 올리면,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들이 입금을 해줘서 세계여행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가상 현실'은 이미 '실제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 세상이 도래해 버린 것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
고은초를 보면, 마치 게임 속 아바타가 온갖 대륙을 여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 장면을 보고있는 것 같다.
그의 이 책은, 한 마디로 '하드코어' 그 자체다.
하드코어는 음악에서 1980년대 나온 용어로, 극단적인 의사 표시를 드러내는 괴성과 굉음을 뜻했는데,
만화에서나 영화 등에서 피비린내나는 징그런 영상물을 나타내고, 에로물에서는 기존의 포르노처럼 달콤함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장르를 일컫기도 하는 용어가 되었다.
여행에서 하드코어는 이 이상 되기 어렵다.
여행에서 아프고 길을 잃는 귀여운 여인의 행태는 당연히 소지하고 계시면서,
돈이나 카드, 심지어는 강도와 함께 ATM 기계로 동행하셔서 카드를 손수 넣어주시는 과감함도 보여주신다. 으~~~ 미치도록 사랑하기엔 멍청해 보이지만, 뭐,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를 찍어서 달려든다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렇게 멍때리는 시츄에이션이 있기에,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암튼, 여행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 책처럼 용기를 주는 책은 없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에, 혼자서 비행기표 구해 외국을 날아다니고,
다 털리고도 살아올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진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행간에서 그 비법을 전수받는 자도 있을지 모른다.
가장 좋아하던 세계사 선생님이 말리는 바람에 고고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여학생.
아, 그 세계사 선생님이 말리지만 않았더라도, 하드코어는 좀 더 소프트해졌을지 모른다.
아무 생각없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는 무지막지함.
그러나, 아무 생각없는 그를 팔레스타인의 따스한 온기는 바로 '의식화'시키고 만다.
이것이 여행의 힘이다. 가보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고집이고 가식일 수 있다.
그러나, 가보고 나면, 마음 속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떡볶이 사먹고 민생 운운하는 양촌리 둘째아들이나 대통령은 결코, 그 떡볶이를 비빈 아주머니의 가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없는 지경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과 수교가 맺어져 낯선 나라 시리아의 '팔미라'를 작은 사진으로 봤지만, 감동적이었다.
이런 무식한 여행객 덕분에 누리는 호사다. 팔미라를 알게 된 것은...
<팔미라>
멕시코에서 만나는 비운의 화가 프리다 칼로를 만나는 일이나 콜롬비아의 옥색 해안을 보는 일... 여행객들의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는 발에 물집 하나 없이 호사를 누린다.
<프리다 칼로>
호주의 미션 비치, 터키의 카파도키아, 이집트의 다합을 '시간을 잊은 채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꼽는다는데, 치명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끈다는 대체불가능한 분위기로는 '다합'을 꼽는단다.
<미션비치>
<카파도키아>
<다합>
'대체불가능한 존재' 인 <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온 세계를 누빈 그녀의 삶에도 온갖 고초들은 지나간다.
그렇지만, 대체불가능한 존재라는 믿음은 그 고초들을 헤치고, 좋은 직장도 제치고, 그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한다.
작은 자유인.
비록 멋지기보다는 엽기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그의 여행기였지만,
그를 따라 우유니 사막의 하얀 소금바다를 보는 일이나, 잉카 트레일을 따라 걷는 무모함을 산소탱크 기다리며 읽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우유니 소금사막>
길을 나서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 무모한 도전기를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