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박연서 지음 / 한국문연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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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랑 약속이 있어서 버스타고 가는 길에 읽으려고 집어든 시집이었다. 

시집을 버스간에서나 서점에 서서 읽는 일은 기분좋은 일이다.
시집에 담긴 시어들은 작가가 적어도 며칠 밤을 삭이고 되새겨 뱉어낸 말들인 것들이 많아서,
그런 시 표현들을 만나면, 숨을 쉬기가 가쁘다.  

문간방 노인
가래 끓는 소리 그믐을 반죽한다.<달동네, 부분> 

이런 표현은 곰삭은 젓갈 냄새가 난다. 

너 없는
마당을 홀로 서성인다. 

유령처럼 서있는 고요 <불면, 전문> 

잠들지 못한 시인의 서성임이 오롯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는 불면의 밤을 펜대 끄적이며 머리 쥐어 뜯었겠지만, 읽는 사람은 편안하게 그 불면을 즐긴다. 

너는
잔바람소리에도 새벽잠을 설친다. <벼락, 부분> 

이런 구절은 시인의 불면을 잘 보여준다. 잔바람소리도 깨우는 새벽잠을 가진 사람.
예민하겠다.   

숲이 마른 기침을 시작한다 

담쟁이 넝쿨 뻗는 소리 차츰 가늘어진다 

비좁던 길이 갑자기 헐렁해진다 <가을, 부분>

불볕을 기어오르던
수세미  덩굴
빨래 줄에 목 감은 채 시들어가고
내 안에 어스름 스미는 저녁  <빈집의 저물녘, 부분> 

소리없이 어둑발 내리는
텅 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
네 그림자 <11월, 부분> 

사방이 축축하게 어둠의 그늘로 덮이면
너는 밤바다의 심해어
불협화음의 장단에 맞춰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지느러미를 꿈틀대기 시작한다 <11월의 바람>

나이가 드는 시인은 차츰 가늘어지는 자신의 팔다리를 보는 듯, 세월을 본다.
빡빡하던 삶이 갑자기 헐렁해지는 자신의 삶의 세월을...  

시어들이 간혹 외따로 노는 구절도 있고, 심심한 시도 간혹 보이지만,
오랜 세월 심해어처럼 어둠 속에서 예민한 촉수를 움직여 시를 써온 필력은 펄떡이며 살아 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는 시인들은, 나이에 맞는 소재를 풀어쓸 때 가장 푸근하다.
그의 <설날>은 가장 눈에 마춤한 시다. 

재래시장
좌판대에서 마른 고사리를 샀다
원산지 : 조선
가느다란 줄기를 한 움큼씩 묶은 것이
물동이 받침대 같기도
아니
태극문양 닮았다 

인터넷 창에
빈창자 틀어쥐고 야반도주해
막막한 길로 팔려간다며...
클릭!
화면은 할당된 시간만 잠시 주춤거릴 뿐
자명고 한 번 두들기지 못한다
난파선에 매달려있는 북조선 여자들 

설날 아침
차례 상
삼색나물로 올라와
맛깔스럽게 놓여 있는 고사리나물
위에
화면 속
그 검은 꽃잎들이 자꾸 얼룩얼룩 겹쳐 보인다
이상하다
갑자기
망막이 흐릿해지고
웅크린 침묵이 비만으로 신음을 한다 <설날, 전문> 

그의 <콩>도 나이든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고향 냄새로 가득하다.
고향 냄새로 가득한 추억을 반추하는 나이의 <생인손>이 아릿하게 눈에 밟힌다. 

살구꽃을 배경으로 찍은 어머니의 흑백사진 먼지 낀 액자 속에서 할 말이 있는 듯 웃으신다, 해마다 날을 잡아 장판을 손수하신 어머니, 아궁이에 불을 지펴 습기 찬 온돌 구석구석을 말리고, 초배를 한 다음 그 위에 손질한 부대종이를 바란다, 사각 꼭짓점에는 자신의 길을 치장하기라도 하는 듯, 꽃모양을 예쁘게 오려붙여 종이가 팽팽해지면, 솜털 숭숭한 날바닥을 생콩 갈은 것으로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집안은 온통 콩 비린내로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대개 여름 우기가 끝난 추석 전에 치르던 연례행사, 아침저녁 톡 쏘는 바람살 차츰 배대해지는 사색이 영역을 넓혀 갈 때 통액을 포식한 방바닥은 반들반들 질이 나기 시작하고 구정물 속 찌꺼기는 부패를 서두른다 

고목나무에
꽃망울 맺히는 그런 터는 아니래도
넓은 앞마당과
소나무 우거진 뒷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닮은 울타리 없는 우리 집
비바람이 거세질 때마다
장독대에 정한수 한 사발 떠 놓고 엎드려
격렬하게 출렁이던 얇은 어깨
짓누른
그 무게의 눈금 밟으며
캄캄한 울음
노자 삼아 먼 길 가시더니
휘몰아치는 폭풍우,
뙤약볕 가려주는 든든한 고향집
처마 밑
늘 그자리에서 생인손인 듯 바라본다 <콩, 전문>

충주댐 밑에 수몰되어버린 우리 할아버지 댁.
아버지의 그 고향 마을의 가득한 물구덩이를 내려다보면,
나는 늘 생인손이 아린 느낌이,
애리는 마음이 심장 옆 어느 구석에서 울컥, 밀려오곤 했는데,
그의 생인손을 만나니 다시 울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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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를 기다리며 시를 읽는 남자라 '쪼콤'멋진걸요~^^
페이퍼 중간까지 읽다가 제 식대로 느끼고 싶어,
장바구니에 담고 스크롤을 그냥 내렸어요~

글샘 2010-08-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쪼콤, ㅋ

yamoo 2010-08-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는 시집을 완독한게 한권도 없군요~ 집에 있는 책들 중에도 시집은 한 권도 없습니다..저에게 아직은 시의 세상은 저멀리 있나 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