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글렌 굴드 정도면 충분히 '기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저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듣는 글렌 굴드는 뭔가 좀 다르다.
선입견을 가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왠지 구부정하게 수그린 포즈로 녹음실에서 혼자만의 음역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음들. 

   
  6월의 아주 따뜻한 날이었는데, 굴드는 외투에다 모자, 목도리, 장갑 차림으로 도착한다.
장비로는 그가 늘 들고 다니는 악보 가방은 물론 타월 한 무더기와 큰 생수병 2개, 알약병 5개, 그리고 아주 개성적으로 특수 제작된 그의 의자...
사실 여러 장의 타월은, 글렌이 피아노에 앉기 전에 20분 동안 더운 물 속에 팔꿈치까지 손과 팔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수도 필요했는데, 글렌이 뉴욕의 수돗물을 마시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 온도 조절을 맡은 기술자는 녹음 제어 장치를 운전하는 기사만큼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45) 
 
   

괴짜로 소문나기에 충분한 조건인데,
32세에 연주회를 그만두고, 50세에 녹음을 그만둔다. 그리고는 임종. 

   
 

음반을 듣는 사람의 집중에 비해 연주회의 청중은 아주 부주의하게 흘려듣는다는 이유로,
또 20만의 청중을 얻을 수 있는데 2천 명의 청중 앞에서 연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고 물으면서 제한된 연주홀을 거부하는 이 고독은 분명 오만한 것이었다.(65)
그는 매우 가혹한 말로 연주회를 규정짓는다.
"도덕적으로 비열한 짓, 속임수, 솔리스트에게 주어지는 권력과 지배의 위치, 대중에 대한 배굴한 의존.
무대에선 언제나 사형 장면이나 원시적 장면의 기미가 느껴진다고.
거기서 그는 피와 땀을 본다. 그렇다면 독주회는?
2999명의 타인들의 땀 냄새가 각자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임(93)

 
   

가끔 연주회에 가서 연주자들을 바라보며 가슴 졸이노라면, 속삭이는 소리, 웅성대는 소리, 사람 움직이는 모습, 휴대폰액정에 불이 들어오거나 진동 울리는 소리, 기침소리까지 신경이 쓰인다. 관객인 나도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는데, 연주자 자신은 얼마나 신경에 거슬르겠는가. 특히 부산처럼 객석이 절반 이상 텅 비게 된다면 말이다. 글렌 굴드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옳다는 생각도 든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 가 아니라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은,
피아노가 되는 것. 그것이 잘못 제어되었을 땐 마치 자신의 몸에 탈이 난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음색 속에서 자신의 기분의 건반을 되찾아 내고, 눈을 감고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에게만 던진 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남모르는 미소를 짓기도 한다. (76)
방심, 나는 이것을 혐오한다. 다른 예술가가 이런 방탕에 빠진다면 난 그를 비난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내겐 필요하다. 노래를 하지 않으면 연주가 더 나빠진다.(79) 그렇게 그는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한다. 
 
   
   
  굴드를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선율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느 이 오블리가토, 때론 애원하거나 황홀경에 든 듯한 목소리,
기도자나 신들린 자의 이 목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음악은 단어들에 대한 우리의 보복이다.
익사한 말엔 더 이상 울림이 없다. 단지 목소리를,
말이 없는 목소리를 우리는 기쁨 속에서, 혹은 고통 중에 들을 따름...(82) 
 
   

글렌 굴드의 피아노 음률을 듣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의 리듬은 아름답다. 역자의 솜씨도 뛰어날 것이다. 

   
 

그 누구도 굴드처럼, 수없이 연주를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불시에 습격을 당하는 듯한 그런 힘을 내게 행사하지 못햇다.
시간이 지나가도 그의 연주가 내게 가져다 주는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숯덩이가 되어 버린 이 세상,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고 완전한 동의와 상실 속에서 음악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그가 내맡기는 방식.
아름다움은 견딜 수 없고 냉혹하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우리의 눈길을 후려치고, 귀를 유혹하고, 대기중인 우리의 말들을 낚아챈다.
전광석화의 속도와 느림의 뒤섞임, 스스로 자족하는 그것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도록 우리를 부르며,
우리도 모르는 답변을 듣고 싶어한다.(105) 

 
   

굴드의 연주를 듣고 이런 감상을 적을 수 있는 작가 역시 심미감이 가득한 귀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런 작가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굴드의 연주 세계를 머릿속에 상상할 정도로 풍부한 어휘력으로 이 책은 가득하다. 

그가 말한 '세상 안에 있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바로 자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굴드의 연주는 바흐가 아니라 브람스란다. 

   
  브람스의 간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d단조...
음에서 전해져오는 이 놀라운 원경, 저녁의 씁쓸한 표면, 마지막 결렬, 가슴이 서늘해지는 극한으로의 접근,
항구의 한없이 슬픈 모습, 추억이 음악으로 변하는 건지 음악이 추억으로 변하는 건지...
마치 '먼 데서 들려오듯이'... 이런 지시어처럼... 가장 내밀하며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른는 듯한 음악들을...
우리 안에 있는 음악은 세상에 완전히 속해 있지는 않은 무엇이다.
황량하고 벌거벗은 세상조차도 아닌, 그것은 세상의 부재이다.(180) 
 
   

그의 글렌 읽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글렌 굴드의 피아노 음들이 책갈피 사이사이에서 간간하게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명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시간은 우리가 되고자 애쓰는 인간을 저버리며,
죽음은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른 인간을 드러내 보인다.(193) 
그는 스스로를 '여러 다른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일종의 르네상스 음악인'으로 규정지었으나,
해설가들은 일찍이 존재한 가장 위대한 두세 명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명일 따름.
이 반피아니스트가 실제로는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피아니스트였던 것. 
 
   

굴드가 말한 '기법면에서 나는 호로비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경지는 어떤 것일까?
굴드의 피아노 테크닉의 견딜 수 없는 순수성을 호로비츠에게서 찾으려고 해보아야 헛수고라는데... 

마지막 청교도, 어쩌면 마지막 낭만주의자... 글렌 굴드를 읽는 일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를 듣는 일은 과연 어떨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피아노 앞에 앉는 시간을 갖고 싶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고,
조용한 날, 헤드셋을 끼고 그의 음반이라도 듣는 시간을 가지고 싶게 부추기기도 하는 마력을 가진 책.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6-0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또 하나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