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사샤 스타니시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스타~라니...흠흠...
표지는 좀 이상하다. 제목은 더 이상하다. 작가 이름도 또 이상하다.
이 소설은 읽어봐야, 아, 새로운 이야기꾼이 하나 탄생했구나. 사샤 스타니시치는 발음이 좀 어렵지만 외워둬야 하는 작가겠구나, 특히 언니들은 책날개의 저자 눈빛에 한 순간 매료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멋진 재능은 창작이고, 가장 귀중한 재산은 상상력이란다. 명심해라 알렉산다르.(12) 

이런 말을 남기며 요술 모자를 씌워주던 할아버지는 스피디하게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39)을 하고, 이제 창작과 상상력의 마법을 부릴 주인공은 알렉산다르가 되었다.   

티토의 사진이 내려지는 유고슬라비아, 민족과 종교가 얽힌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에서, 아직도 마음은 피오네르(공산 소년단원)인 소년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선생님들의 충고, 앞으로도 그렇게 상황 파악 못하면 매일 방과 후마다 남아야 할 거다. 

'나의 조국' '창밖으로 우리 마을을 바라보면 나는 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가' '공화국의 승리는 왜 나의 승리인가' 같은 작문 주제가 '아름다운 여행'처럼 바뀌는 것(112)을 알렉산다르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알렉산다르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누구나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말해지지 않은 생각이나 거짓으로 말해진 말, 또는 말해야 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지 않은 생각이나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은 중요한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긴 인용 부호를 써야 하는 걸까? (115)
생각했던 것을 말할 수 있었던 시대가 가고, 거짓을 말하거나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버린 아이는 더이상 꼬꼬마는 아닌 셈이다. 전쟁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전쟁을 겪는  어른들도 '온 세상은 아주 짧은 다리에 불과하며, 다리 밑의 심연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뼈저리게 배운다. (137) 

전쟁은 '손톱 밑에 때가 낀채로 빵을 집는 것(148)'처럼 교양없는 것이며,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과 아무 것도 좋지 않은 시절 모두를 기억해야 함'을 배우는 일이다. 
'응원할 국가대표 팀이 다섯 개나 되어서 기쁜(207)' 사람들에게 전쟁은 결코 기쁨만은 아닌 반어적인 것이다.

더 나았던 독일의 벽이 무너지자 나쁜 것들(USA, AIDS)은 모두 우리에게 온다.
정전마저도. 소리가 사라지고, 텔레비전이 딸깍하더니 까맣게 변한다.
사람이 살아있다가 갑자기 더 이상 살아있지 않게 되면 꼭 이와 같을 것
(234)임을 아이들도 배우게 된다. 전쟁을 통하여...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자란다. 키가 192센티만큼 자랐고, 같은 페이지에서 키코는 축구공을 192번이나 튀긴다. 한 페이지가 온통 무의미한 숫자세기로 가득하다(242). 하긴, 전쟁 중에 모든 것은 의미없는 것이며, 또한 살아있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인 셈이다.  

아이들조차도 '추억'을 얻게 된다. 전쟁을 통하여...
수염달린 메기의 콧등에 세아드 아저씨의 뿔테 안경이 걸쳐져 있던 날, 그 메기를 놓아준다.
여기서 넌 무엇을 얻었니? 아이는 말한다. '그날이요.' 아, 아이도 추억을 배우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이에게는 '오늘 이 순간, 여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심리학의 주장인데... 

프란체스코와의 추억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다. 남자아이가 남자를 좋아하면 안된다는 편견의 압박으로. 부끄러움에게는 부끄러움만의 심장 박동이 있다.(261) 프란체스코가 찾아왔을 때, 아버지와의 대화를 엿듣는 알렉산드로. 내 귀와 머리통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간색만큼 그렇게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색깔은 없을 것이다.(261) 친구는 이런 편지를 남겼다.
인생은, 나의 알레산드로. 단지 우연의 문제란다.
아, 어린 아이에게 인생은 너무 무겁다. 

그러나 마법사 알렉산드로의 서사는 계속된다.
집들은 지붕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화염 속에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것이다. 건물에 생긴 총알구멍 흉터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다시 아물 것이다.(268)
마법사 알렉산드로의 서사는, 결국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임을 그도 안다는 역설이다. 

피란을 가야하는 상황, 아버지가 일러주는 내가 싸야할 물건들의 목록을 보면서 아이는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287) 어린 아이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하다. 사람은 자는 동안 자란다.(286) 그런데, 전쟁은 사람들을 잠들게 하지 못함을 이 소설은 외치고 있다.

사람은 이야기에서 거짓말을, 기억에서 허위를 깎아낼 수 있는 정직한 대패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대팻밥을 수집하는 사람이다...(359)
허위로 가득한 어른들의 전쟁터에서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이란 책을 쓰는 아이는 거짓말과 허의를 깎아내는 대패를 만들고 싶어한다. 진실만이 통용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 

소설의 제목,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지...
원 제목도 그렇다. Wie der Soldat das Grammofon repariert'
군인은 축음기가 고장나면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갈겨버린다.
군인에게 지금 당장 욕구의 충족 이외에 필요한 것은 없을 것 아닌가. 

전쟁은 사람의 유전자를 꿰뚫고 달려간다.
달려가는 시간과 날아다니는 포탄 사이로 이야기들도 흘러가고 인생은 엮인다.
사샤 스타니시치는 '증언 소설'을 '성장 소설'과 혼합시켜 '안네의 일기'와도 같은 수준의 이야기꾼이 된다.  

다만,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아서, 간혹은 그의 이야기를 멈추고 싶어질 때가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겪은 사람들의 쏟아붓고싶은 조급증을 잠시 멎게 하고, 고요한 음악 한 곡 듣는 여유를 함께 누리고 싶다. 

그리고, 그가 찾고있는 이야기들의 빈칸을 조금 더 천천히 메워도 좋지 않을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을 실제로는 <모든 것이 파괴된 시절>로 가득 채우는 슬픔을 겪기 전에, 다시 음악 한 곡 듣자고 그를 잡고 싶은 것이다. 

하긴, 포포비치 선생님과 맥주 한 모금 하면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그 부인은 이렇게 되뇌는 것인데... 이 끔찍한 현실한테 날마다 뺨을 맞는 것보다는 기억 속에 숨어있을 수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363) 

잠시 멈춘다 한들, 그의 이야기는 쭈--욱 이어질 것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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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0-01-0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인이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지 진짜 궁금했는데 소총으로 갈기는군요.ㅋㅋ
글샘님 글 보다보면 보고싶은 책은 쌓이는데 이미 집에 있으면서 안 읽는 책도 쌓여있고...ㅠ.ㅠ

글샘 2010-01-16 15:03   좋아요 0 | URL
보스니아 내전은, 정말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면서 아는 체하는지를 보여주는 부조리의 극치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