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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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추악하게 그려지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정치싸움에서 졌다는 것과 그들이 성적으로 방종의 극치를 달렸다는 점이 있다.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데리고 놀았다는 이야기나,
신라 포석정이 궁녀들이랑 노닥거리던 곳이란 이야기나,
고려 말의 신돈이나, 북녘 땅의 김정일까지... 그들을 아주 성적으로 치졸한 인물들로 그리면서 이런 되도 않은 것들이 인간이냐... 이런 오류를 역사에선 종종 범하곤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입소문들 역시 그렇다.
추잡한 목걸이에 얽힌 탐욕과 자식을 둘러싼 근친상간의 모욕이 그의 죽은 이름 위에 뒤덮이곤 했던 것인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왕비의 이름 위에 덮인 욕된 이름들을 걷어내고, 추잡한 혁명의 속에서 빛나던 구세대의 장미를 살려내기 위해 힘을 짜내듯 이 책을 쓴다.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를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아무리 어정쩡하고 우유부단했다고 하더라도, 루이 16세의 권력에 도전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뼛속까지 짜릿하게 전율이 올 일인데,
프랑스 혁명이란 무서운 일은 급기야 일어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연하게 여겼던 사치가 사실은 피눈물나는 민중의 소산을 빼앗은 것이었음을 바라보는 것은 역사책을 배운 우리의 시점일 따름이고, 그 당시 귀족의 삶만을 살았던 인물이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더러운 민중의 삶은 같은 것으로 여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치 '충성'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조선의 선비들의 의식 세계와 유사한 것들로 보이는 의식들이 이런 옛날 이야기를 읽는 동안에는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게 된다. 

현대 인간의 시점으로 사람을 보아서는 도저히 그 당시의 삶을 재구할 수 없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태는 예쁘고 품위있으며 황홀한 용모와 기품이 넘치지만, 지능은 높은데도 생각하려 들지않는, 그리고 대상을 깊이 꿰뚫어보지는 않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텐데도, 아무 것도 진정으로 하려고 하지않는 성격상의 위험을 작가는 깔끔하게 그려낸다. 그렇지만, 앞부분보다도 마리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대목에서 작가의 집필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괴테가 "비극의 비단 휘장은 끝없이 살랑거리고" 있다고 그렸듯,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는 프랑스 혁명에 맞물린 비극의 휘장에 목을 조르려 달려들고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위엄을 갖춘 왕비의 모습으로 소생하고 있어 보인다. 

역사라는 거미집에서 시작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은,
극히 작은 바퀴라도 정교하게 조합된 역사의 장치 속에서는 엄청남 힘을 내게 하고,
아주 작은 동기에서도 엄청난 결과를 전개시키는 것은 위대하고도 기묘한 역사의 가려진 비밀 중의 하나임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 운명의 그물에 낚였지만, 결코 조잡스럽게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단한 모습을 통하여, 온갖 세설들이 그의 명예에 덧씌우는 험한 모습을 벗겨 내는 데 작가는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섬세하고 깨지가 쉬운 악기를 다루듯이 자신의 생을 연주했다.
어느 시대에서 보더라도 인간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는 대신 그녀는 자기 시대의 특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123)...
아, 그녀를 작가가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수 있는 구절이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도 '무서운 파멸의 순간에도 편안하게 음식을 먹어치우고 잠이 들 수 있으며, 명예보다도 자신의 배를 더 염려하는 남편의 위엄 없는 무기력'을 혐오스럽게 그려내는 대목에서 더욱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사랑이 대비되어 강조된다. 

작가의 글은, 이 작품을 소설로 읽든, 역사서로 읽든 관계없이, 상황을 시적인 접근으로 이끌어 독자를 상황에 푹 젖어들게 한다. 마치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로 압제의 시대를 표현했듯이, 루이 16세가 죽는 날 아침을 온갖 소리로 그려 낸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기나긴 밤이, 그리고는 마침내 날이 새더니 준비하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의장마차의 육중한 바퀴 소리를 들었다. 층계 위아래로 계속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행군해 오는 연대의 북소리가 둥둥 들렸다...그때 아래층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왕이 떠난 것이다... 이렇게... 

마리의 진정한 모습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재판정에서의 당당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판사석을 향해 웃으며 사형 선고를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면서, 너희같은 정권의 시녀들이 무슨 판결을 하겠냐며, 역사의 판결을 기다리겠다던 시국사범들 처럼...
변호사, 재판관, 경찰, 서기가 아닌 단 하나의 현실적인 진정한 재판관, 곧 역사를 향한 대답을 당당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를...
작가는 이렇게 쓴다. 하얀 돌로 된 자유의 여신의 시선을 빌려서...
인간의 거칠고 어리석은 행위... 였다고...
자유의 이름으로 저지른 어리석은 행위들...
아, 역사란 혁명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치장하는 데 급급하지 않은가.
그 혁명의 미명으로 자행하는 어리석은 행위들을 밝히는 일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한국의 사극 중에 '장희빈'을 뛰어넘는 재미가 없듯이,
유럽의 뒷담화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것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자료들이 '조작'되었고, '윤색'되었으며, '모함'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알려졌을 것인데, 작가는 그 많은 자료들을 곧이곧대로 활용하지 않는 데 힘을 기울인다. 

사실로 알려진 많은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그녀를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한 땀방울이 이 책으로 엮인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단한 저작들을 읽노라면... 인간의 삶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생각하게 되고, 나의 지난 날과 앞날을 곰곰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번에 시도하다가 말았던 같은 작가의 '발자크 평전'도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볼 일이다. 

책이 두꺼워 그런지, '잘못된 표기'가 제법 눈에 띈다. 눈에 띄는 것만 몇 개 적으면 아래와 같다. 

177쪽 한호성은 '환호성'으로
209쪽 고적을 불며...의 고적은 '고적대' 의 그것인데, 북과 피리, 곧 타악기와 관악기이므로 분다기 보다는 '울리며, 연주하며' 가 적절할 듯.
같은 쪽의 '베겨나가겠습니까'는 '배겨'로 
227쪽 보석상을... 보석상'은' 
464쪽 공과국은 '공화국'으로
498쪽 언제가 되야...는 '돼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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