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영희 선생님, adieu~~~

[문학] 당당한 희망과 긍정의 이름, 영문학자 장영희 별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인간의 영혼에도 빛깔이 있다면... 사람마다 아주 다를 것 같은 이도 있고, 자꾸 끌리면서 비슷할 거라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이라면 나랑 영혼의 방향이 많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던 분이 장영희 선생님이셨다. 

그이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옆자리 선생님이 읽는 걸 우연히 보고 만나게 되어서, 그이의 책은 모두 읽고 있었는데... 평생 다리를 쓰지 못한 불편함도 부족해서 하느님은 그이를 우리 곁에서 거두어 가셨다. 그것도 말년을 암으로 고통받으시다가 말이다. 

장영희 선생님과 선의 굵기와 색이 전혀 달라보이는 김점선 선생님도 얼마 전에 고인이 되셨는데... 김점선 선생이 그려 주신 '장영희에게'란 그림을 보고, 아, 장영희 선생의 마음을 이토록 잘 읽을 수 있는 이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에 어울린 그림들은 하나하나 참 이쁘고 정감넘치는 그림들이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글의 감칠맛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리신 선생님 생각이 자꾸 나서 이쁘기만 한 그림들이 괜스레 미워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바이올린의 앙징맞은 곡선들을 사랑했을 법한 생전의 선생님이라면 몰라도, 힘겨운 삶을 마감하신 선생의 유작이 되어버린 이 책과 왠지 그림들이 따로노는 느낌이다.  

장영희 선생의 글을 읽으면, 세상이 힘겹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사실 세상은 날마다 버겁고 힘든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는 공간이고, 그 시간들은 인간의 육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반복하곤 한다.
그럴 때, 어디선가 바삭바삭 잘 건조된 수건처럼 은은한 햇살 입자의 향까지 뽀송뽀송 담고 있는 글들을 읽는다면, 그리고 그 글을 쓴 이가 참으로 겸손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면, 그 친절함에 기대어 피곤한 하루를 포근한 이불 속에서 마무리할 수도 있을 노릇이지만... 

그런 글을 만나긴 쉽지 않다.
내가 선생님과 영혼의 빛깔이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내가 선생님만큼 재주를 가졌다거나 비슷한 영혼의 밝음을 가졌다는 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진중권의 까칠한 글보다는 장영희 선생의 포근한 글에 끌린다는 그런 표현이다. 물론 내 글은 까칠한 진교수의 글에 어금버금갈 거란 생각도 들지만, 원래 같은 극끼리는 척력이 작용하는 셈이랄까. 

유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제목을 붙이는 데 그렇게 많은 생각들을 덧붙이지도 않으셨을 거다. 그리고 글 하나라도 더 붙여 주셨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왜 자꾸 좋은 글 남기는 이들은 하늘나라로 불러 올리시는 걸까.
오주석 선생을 데려 가시고, 이제 장영희 선생도 올라 가신다.
마치 유작을 준비하시듯, <이제 생명과의 이별을 저마다 다소곳하게 순명으로 준비>하는 나무들이 선생의 눈엔 비치곤 했다. <있는 날가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다고 떠나고> 싶어하던 선생은 아프다 갔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란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인용하셨으니, 이젠 자기란 감옥에서 벗어나 홀가분 하실지도 모르겠다. 

어제 어머니의 외도로 앞날을 접고 귀국한 제자에게, 사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단 말을 들려주는 따위의 훈시는 하기 힘들어서, 주소를 물어 이 책을 보내 주었다.
누구든, 삶이 팍팍하다고만 느끼지 말고, 이런 책도 좀 읽을 노릇이다.
세상을 까칠하게만 산다면,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나서, <졸업장>하나 끌어안고 명문대 진학하는 왕따 모범생처럼 하늘나라로 들어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천국이라면 별로 가고 싶지 않다. 

마음이 복잡하고, 육신은 피로하고, 정신은 산란하고, 할 일은 밀려 오고, 그리고 건강도 여의 찮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부담스럽고,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눈도 못마땅할 때, 장영희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한번씩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을 바라보며 웃는 이쁜 마음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독립영화 <똥파리>를 보았다. 가정 폭력으로 파괴된 관계들을 잔혹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난 속에서 관계들의 잔혹함 사이사이에도 가녀린 햇살이, 은밀한 햇살, 밀양마냥 번지고 있었다.  

삶이란 그런 것일 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오염되어가고, 빈부의 격차를 벌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한 경우엔 내전으로 온세상이 파괴되어버리는 나라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바라보는 하늘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파란 하늘 같은 것.
그래서,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것이 삶이란 이름의 여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