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그건, 이 책이 담고있는 세계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편지글이란 형식의 느림과, 긴급한 일들은 전보로 배달되던 느림의 시대가 주는 햇살과,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글 속에서 믿음에 기초한 애정들이 역시 문자의 한계로 말미암아 빚어내는 약간의 오해와 상당한 이해 사이에서 미소를 부풀리는 이스트 같은 소설이랄까. 

엊그제, 무료 쿠폰을 이용해서 <박쥐>란 영화를 보았다.
박쥐의 세계는 '음습'한 세계이며, 거꾸로 매어달린 세계다.
박찬욱의 문법은 세상을 바로보지 않고 '상징'으로 보려는 그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낳고, 그 악마들이 서로를 먹여살리는, 마치 자본주의의 생리와도 같은 장면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그저 눈꺼풀만 부르르 떨면서 눈물지을 도리밖에 없는 존재가 두눈 부릅뜨고 바라본다.
박찬욱은 억지스럽게도 음습한 세계에서 거꾸로 매어달려야 할 존재들을 밝은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신부님이 억지스럽게 강요하던 '신성함'조차도 훌러덩 벗어버린 속곳 사이로 질질 흘려버리고, 더이상 신성함을 갖지 못한 거짓된 악의 세계는 태양과 바다의 정화 앞에서 자멸을 선택하는 좀 억지스런 결말을 맺는데... 역시 손가락만 하나 까딱하는 무기력한 존재는 두눈 부릅뜨고 바라볼 뿐, 역할이 없다. 

현실에 좌절하고, 미래가 답답할 때, 희한한 제목인데, 사람들의 리뷰가 좋아서 읽어본 이 소설은... 순정만화를 좋아할 여인들이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 법도 한 소설이고,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겠다. 

건지 섬의 과거는 밝지만은 않다.
그러나, 과거의 엘리자베스와 현재의 줄리엣, 그리고 둘의 가교 역할을 하는 꼬마 키트를 둘러싼 이야기는 환하고 환해서, 데미안이 나눈 밝은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재미있는 추리 이야기도 둘이나 들어있다.
하나는 귀중한 자료를 빼앗길 뻔한 이야기인데, 그 조마조마함을 역시 <람세스>적인 긍정의 힘으로 쉽사리 이겨내고 악인은 소멸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아슬아슬한 오해를 둘러싸고 어긋나길 반복하던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에서 절묘하게 줄을 탄다. 

편지란 형식이 주는 단절성,
편지 안에 담을 수 있는 제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을 뜻하는 기대와 우정,
여러 사람의 편지 형식이 자유자재로 보여주는 편지 숫자만큼의 홑눈의 모자이크...
이런 형식적인 것들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재미의 잭팟을 터트려준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의 번역에서, 사회는 클럽으로 번역되는 게 좋을 뻔 했단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소설 제목은 클럽이어서 좀 만족이지만, 아무래도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성>이 제목에서 빠진 것은 또 좀 불만족이다. 

이 소설의 다양한 인물들의 홑눈들이 얼룽덜룽하게 그려내지만,
결국 하나의 모자이크로 이뤄내는 이야기의 기저엔 <문학에 대한 사랑>이 시점이 이바지하는 주제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지 섬의 리터러리와 포테이토 껍질파이 클럽...이란 제목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소녀 시절에 문학깨나 좋아했던 여성들이라면 일단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또는 창작의 길에서 모범을 찾는 이들이라면 무조건하고 읽어 보면 좋겠다.
아니면, 나처럼 어두운 세상에 좀 바삭한 글을 찾아 떠도는 유목인 노마드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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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5-11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바삭바삭한 이야기였어요.
어두운 과거마저도 빛으로 변하는 마력이 있더군요.
글샘님, 재밌게도 박쥐 이야기가 중간에 ^^

순오기 2009-05-16 09:54   좋아요 0 | URL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왔어요. 기대만땅이에요.^^

글샘 2009-05-16 22:33   좋아요 0 | URL
우, 박쥐는 말도 마세요. ㅠㅜ
친한 여선생님께 이 책을 '선생님 취향에 딱 맞을 거'라고 권해 드렸더니, 어쩜 이렇게 좋은 책을 권해 줬냐고 오늘 인사하시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