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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이 책이 나올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이 글의 저자 중 한 분의 대학원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비슷한 종류의 레포트도 제출한 적도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러나 이 책이 잘 팔릴까? 하는 의구심은 이 책을 사면서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이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올라가는 걸 보고 심장이 뿌듯해 옴을 느낀다. 영어공용화 논쟁이 불거진 지 5년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 이 책은 어느 한 사람의 능력으로 종합하기 어려운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있다.
영어공용화가 줄 혜택이 많다, 폐해가 많다를 논하지 않고, 충분히 일어날 만한 상황을 픽션으로 처리하면서 논쟁을 벗어난다. 그러면서도 절반은 자료로 처리함으로써 그 픽션이 넌픽션임을 역설하는 기막힌 방법을 쓴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산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복거일과 대등한 비중으로 논의되었던 것 같아 불쾌했다. 이제 그 논의의 불합리함이 명확히 드러난 기분이다.
나도 몇 년 전에 정보화 사회에 발맞춰서 홈페이지를 하나 만든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결국 정보화라는 것은, 뭐 하나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배우는 게 아니었다. 기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컨텐츠(내용)였다. 꼭 필요한 홈페이지라면 몇 만원만 주면 대행해 주는 회사가 천지로 깔려 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건 영어라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 문화, 우리가 가진 것의 내용이다.
남북 공동 문화 행사를 할 때 늘 좀 부끄러운 것은, 그들은 아직도 한복(개량되긴 했지만)을 입고, 한국식 미인들의 쪽찐 머리에 어울리는 웃음을 달고 나오는데, 우리쪽은 늘 서양의 드레스를 입고, 우리도 알아듣지 못할 조수미식 노래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우리가 영어가 중요하다고 기를 쓰고 난리 법석을 치지만, 우리의 영어 실력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이런 컴플렉스를 영어공용어화로 이겨낼 수는 결코 없다.
우리처럼 어려운 역사를 가졌던 나라도 드문 현실을 인식하고,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재기를 위해 각국의 언어 교육을 폭넓게 시킬 일이다. 제1외국어 외에도 독일어, 프랑스어도 살리고, 일어, 중국어는 물론 널리 가르치고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도 재미나게 학습할 수 있는 풍토 조성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수학 학원을 다시 가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세계인을 기를 수 있는 풍토, 이런 것이야 말로 과거 한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던 퇴영적 민족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길이 아닐까.
우리 나라가 힘을 가지는 유일한 길은 우리 민족의 머릿속에 다양한 지적 재산이 가득한 길 뿐이다. 언어같은 도구는 그 다음 문제이며, 지적 재산이 풍부하다면 어느 나라에서인들 우리 말을 배우려 하지 않으랴. 다시 문제는 컨텐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