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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이황, 유성룡,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는 익히 듣던 이들이고,
백광훈, 이식, 박세당, 강세황은 역사 노트 한 구석에서 있었던 듯 마는 듯... 했던 사람들 이름이다.
주로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로 묶인 이 책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편집자가 정민이기 때문이다.
정민 선생은 한국에 꼭 필요한 학자다.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이 없다.
좀더 세밀하게 말하면 한국인들의 미래에는 한국이 없을 것이다.
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국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 세력이 없기 때문에 미구에 한국적 특성이란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부정을 하여왔지만,
미군정 이후로 이 땅을 휩쓴 온갖 아름다운 것들은 오로지 <미국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거나 그 문학, 문화사, 복식, 제도 등을 연구하려는 학자들을 양산하여야 하는 대학의 임무를 방기하고, 오로지 딴따라 양키 복제에 여념이 없는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 땅은 겉노랗고 속하얀 '바나나 제국'으로 변모하고 만 것이다.
하긴 바나나 제국에 한국학이나 한국의 특성이 무에 필요하랴 마는...
억눌림 속에서 블루스를, 뒷골목에서 농구와 힙합을 일구어낸 흑인들의 창의성과는 달리,
일본식 혀짧은 영어 나부랭이를 노래라고 씨월렁거리고, 흑인들의 주크박스를 침튀기며 연습하는 한국인의 미래가 나는 자못 궁금하곤 하다.
학교의 교육과정에 자국어보다 영어가 훨씬 많이 편성되어 있는 나라도 보기 드물지만, 진학에 자국어보다 외국어가 훨씬 비중있게 반영되는 현실도 몹시 씁쓸하다.
이젠 광풍을 넘어 일상이 되어버린 토익, 토플, 텝스에 대한 공부와 어학연수란 미명하에 치러지는 대학생들의 놀이 문화 정착을 보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조선조... 그 시절에 아비들이 자식들에게 가장 많이 남긴 말은...
바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공부해서 출세하라. 하긴, 그것이 공자님 말씀이었으니...
소학에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공부하여 입신양명함으로써 부모 이름을 현저케 함이 효의 근본으라 그릇되게 가르쳐 왔던 것이다. 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달고 있는 현실은 그 연장선인지... 공무원 시험이 입신양명일까? ㅎㅎㅎ
아비들이 따스한 인정을 읽으려던 나를 가장 당혹하게 했던 것은 바로 <아비들의 요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들의 편지 속에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욕심>으로까지 보이는 대목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자식에 대해 애끓이는 나의 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요즘 아이들은 배가 고프지 않다. 자신의 미래에 밥벌이를 위하여 죽자살자 공부하는 녀석이 별로 없다. 오히려 부모가 어려서부터 오로지 공부공부만을 주입한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잘 한다. 우리 아이는 스스로 하기를 기다렸더니 맨날 속만 끓인다. 소음인인 나의 마음과 태음인인 아들의 마음은 애비와 자식으로서는 상극이다. ㅠㅜ 천하태평 아들을 보는 내 마음은 늘 부글부글 용암이 끓듯 끓어대지만, 아들 녀석은 여전히 싱글벙글 느긋하다.
아버지들이 자식들의 공부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이 '처신'이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말을 조심하라. 침묵하라. 과묵하라...
나는 이제부터 벙어리가 되어 다시는 너희 일에 관여하지 않으련다. 다만 너희가 뭇 사람의 입길 가운데 있게 될까 걱정이고, 그 허물이 네 아비에게 설상가상 될가 염려스럽다. 모름지기 십분 경게하고 삼가야 한다. ... 자신에게 말해야 할 책무가 없다면 단지 고요히 살피고 때에 따라 스스로를 감추어야 할 뿐이다. .. 사람의 마음이 순박치 않아 나라에 말이 낭자하다... 사대부의 반 마디 말은 화를 부르기에 충분한 법이다. 비방이야말로 가장 두려워할 만하다. 온 세상이 어둡다면 뜻있는 선비는 혹 바른 말로 시비를 밝히고, 이해를 떠나 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저마다 안다하고 누구나 말을 한다. 내가 다만 아첨하지 않으면 그 뿐이지, 어찌 낯빛이나 말로 드러내야 하겠느냐...(이식의 편지에서... 120)
하필이면 남의 말 듣지 않기로 유명한 교감 선생과 두어 시간 남의 말 좀 들으라고 설전을 벌인 뒤에 이 글을 읽었던지... 주변에서 다들 말 잘 했다고 하지만, 나도 후회했다. 뒷담화로 비방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듣지 않을 사람에게 한마디를 했으니 그 꽁한 성격에 무슨 소문을 퍼뜨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선조에서만 말이 사람을 해친 것은 아니다. 어차피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교사는 공인중의 대표격이니...) 말을 조심하란 말을 깊이 새겨 들을 일이다.
편지들은 간결하고 몇줄 되지 않지만, 그들이 겪었을 인생 역정에 비추어 본다면 그 행간에 적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지... 그 행간을 문학적 감수성과 함께 제목을 엮고 도움말을 덧붙여 주신 정민 선생께 감사드릴 일이다.
13000원이란 돈이 결코 싸지 않은 돈이나, 정민 선생처럼 옛것에서 새로운 생각들을 두레박질하는 학자들의 책이야 많을 수록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