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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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한자로 느낄 感, 받을 受, 성품 性 이렇게 쓰는데, 그러니까 남들에게서 영향을 받는 성질의 정도를 감수성이라고 하는데, 나는 왠지 그 수자가 물 水자로 보인다.
마음에 물기를 머금은 사람이 감수성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종이에 붙이는 코팅지를 한 면에만 붙여두면, 습기가 많은 날 종이가 습기를 함뿍 머금어서 코팅지를 가득 휘게 만든다. 나는 그런 걸 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나 반성하는 인간이다.
그런 걸 보면, 내 마음에도 울먹, 하는 수분이 많은 모양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상처를 쉽게 받는다.
상처를 받게 되면 심리적인 기제가 발동하여 우울증이나 방어기제가 등장한다.
그들이 고래를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지만,
번뇌가 깊어져서 꽃이 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많은 경우 깊어진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마음을 잃게 되고 말거나,
그래서 사람들의 세상에서 멀어지거나 심한 경우 스스로 영영 떠나버리기도 한다.

김형경은 '우울'과 '심리' 사이를 부유하는 고래를 찾고 있다.
그것도 그 고래가 비계덩어리인 존재가 아닌, 신화 속의 고래 말이다.
낚시나 투망질이 아닌, 고래를 <사냥>하는 삶 속의 신화를 찾는 이 이야기는 꽤나 멋지다.

"니은아, 니가 시원하게 못 울어서 몸이 아픈 거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들려주는 할머니에게서 정신과 의사 이상의 신화를 만난다. (64)

유난히 물기가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기전에 "압력밥솥"이 등장하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마음 속에 일그러진 거울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마음 속에서 많은 것들이 올라오는데, 압력밥속의 속이 뜨거워지면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면... 잠시도 고요하지 않은 속을 자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92) 이런 걸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쓸 수 없다.

나도 나중에 조용한 곳에 가서 마음이 아픈 이들과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산다.
나도 사실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뭐, 신경과를 다닌 건 아니지만, 마음 속의 물기는 도시에서 뺑뺑이치는 나 자신을 늘 가뜩이나 휘어지게 만든다.

주인공 니은이가 한없이 우울 속으로 빠져들 때, 친구 나무와 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데, 니은이는 거듭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칼날을 느낀다. 그는 나무의 재치에 나무와 할아버지의 즐거운 모습에 느끼는 질투에 해일이나 태풍만큼 힘을 느낀다.(108)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미화원들이 비둘기가 싫으면서 겉으로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하고 비둘기를 위해주는 척 하는 것이 어른일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동원하면서,
마치 상대를 위하는 척 하는 것도 어른들의 습관이었다. (111)

오늘 광안리에서 한 시간동안 불꽃놀이를 구경하였다.
하늘을 붉고 푸르게 수놓는 불꽃더미들을 보면서,
삶이란 것이 저렇게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금세 스러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버린 하늘처럼 말이다.
한 시간 걸어갔고, 한 시간 반 걸어왔는데,
아픈 다리가 현실이라면, 한 시간 동안의 불꽃놀이는
차라리 꿈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어디선가 꽃피는 고래일지언정
우리 삶 옆을 슬몃,
툭,
건드리며 지나칠 때, 나도 보랏빛 얼룽거리는 고래 그림자를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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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2008-10-1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처럼 아름답고 무겁고 아프고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시니,늘 감사.

글샘 2008-10-22 12:51   좋아요 0 | URL
너무 칭찬해 주시면, 진짠줄 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