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노닐다 - 오주석 유고집
오주석 지음, 오주석 선생 유고간행위원회 엮음 / 솔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한때나마 좋아했던 사람이 욕을 먹는 일은 마음아프다. 내겐 유홍준이 그렇다.
그가 제법 호기롭게 비판했던 세상사에 물들어가는지, 무슨 청장이 되었다는 소식 뒤로는 아름다운 소식보다는 영릉에서 고기 궈먹은 잡설이나 숭례문 복원도 같은 그림으로 추하게 비추이는 모습이 싫었다.

아마도, 아마지만 오주석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정치권의 무슨 청장 같은 거 하지 않으셨을 듯 싶다. 그저 박물관장 같은 자리에서 늘상 그림과 음악과 글씨와 문장들을 놓고 씨름도 하고, 말꼬리도 걸고, 술자리에서 허허실실 토론도 하고 하셨으리라.

나는 학자로서 오주석 선생같은 이를 좋아한다.
유레카의 희열을 아는 학자.
오래 궁리하던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언제 올는지 모르는데, 그걸 참을 수 없어 목욕탕에서 뛰쳐나갈 정도로 몰두할 줄 아는 학자적 자세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그런 이들을 왕따시키는 것이 이 세상이다.
변양균처럼 권력자의 손에 빌붙는다면 신정아처럼 비주류였던 인물도 어느 순간 주류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문화'란 이름을 붙인 다른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리는 곳이 그곳인 모양이다.

훨씬 돈되는 자리에 계시다가, 또 일본 문부성 시험에 합격하여 잘 나가는 학자 라인에 줄을 설 뻔도 하시다가... 돈 안되는 국립 박물관 연구관으로, 그러면서도 작품 읽는 즐거움에 시시콜콜 구구절절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쏟고 살았는데...

가인박명이랬던지...
술과 친구를 좋아하며,
솔직하고 따뜻한 성품에 가족 사랑이 지극했던 사람,
그러나 질병과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보이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이렇게 그가 좋아하던 김홍도에 대한 '찬'을 그대로 닮아버린 사람.

아파트에 살면서 참 편리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가장 그리운 것은 낙숫물 듣는 행복을 놓치고 산다는 것이다.
그의 글 속에서, 그리고 그의 글에 담긴 풍정에서 낙숫물 듣는 행복을 느끼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살아있는 이들이 여기저기 신문 같은 곳에 실었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을 나는 참 짜증내는 편이다. 어쩌다 그런 책을 만나면 싫증이 난다. (홍세화, 하종강 씨처럼 안쓰럽게 싸우는 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우려를 했는데, 이 책은 오주석 선생이 생전에 <그림 읽어주는 수필>로 기획하고 있던 글들이 절반가량 실려있어 반갑고 또 반갑다.

글들이 좀 짧고 산만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선생이 퇴고를 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주석 선생처럼 친절하게 그림 읽어주는 사람의 글이니 그만큼 바라는 것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지금쯤 선생은 그림 속에서 김홍도와 술 한잔 기울이며 노닐고 계실는지 모르겠다.
이런 선비같은 사람들을 읽는 일은 행복하고, 또 기꺼운 일이다.
늘상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일이 비루하게 여겨지는 일상일지라도, 간혹 장대비 퍼붓는 날 낙숫물 소리 듣는 광경이 떠오르기라도 할라치면, 삶이란 게 또 그리 비루한 것만도 아니란 평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고인 만큼 다 떨어져야 낙수도 그치겠지?
천상 선비의 대책없는 낙관이고, 꼿꼿하고 강파른 결기가 읽히는 글이다.

그가 '천덕꾸러기 겨레 문화'라고 쓴 것을 읽으면서...
천덕꾸러기란 관형어가 겨레를 지칭하는 것인지,
문화를 수식하는 것인지... 잠시 골똘히 한눈을 팔았다.
아, 이 겨레붙이가 천덕꾸러기였던 것에서 그 문화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은 어찌 다른 것이겠나마는...

뉴스 말미에 툭하면 '한류'의 경제적 논리라는 싸구려 장사치의 말투를 들으면 성마른 나는 짜증이 와락 밀려오는 것이다. 중국 문화에 비겨 얕잡아 보는 어투로 '한류'란 이름을 붙여 주었더니, 그게 좀 돈된다고 좋아라 떠드는 꼴이란... 오주석 선생이 봤더라면 또 두주불사했을 노릇이다.

반갑던 중에 반가운 책을 반갑게 읽었는데,
204쪽에 <이재 초상화>와 <이재 초상화>를 비교한다고 적어둔 데서, 좀 가벼움이 보인다.
분명 <전 이재 초상>과 <이채 초상>으로 이름 붙여야 할 것인데 말이다.
오주석 선생이 꼼꼼하게 고쳐주지 않아서 그랬다 치고, 선생의 다른 글들이 다시 발굴되어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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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4-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혹시 이 책이 유고집이다보니 여기저기 글들이 지나치게 산만하지 않을까 싶어 일단 보류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님 글을 읽으니 다음번 주문에 바로 넣어야겠네요. ^^

글샘 2008-04-28 16:01   좋아요 0 | URL
뒤의 1/4쯤은 고인을 회상하는 글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의 글들은 중복되는 글들이 아니더군요.
원래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쓰신 수필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나저나 제가 알라딘에 기여하는 바가 좀 큰 듯... ㅠㅜ

마노아 2008-04-2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주문 넣었는데 수요일에나 도착한대요. 뭔 배송이 이리 느린지...;;;
근데 변양균 옆의 박정아는 혹 '신정아'인가요??

글샘 2008-04-28 22:58   좋아요 0 | URL
네. 신정안데... 한밤중에 몽롱하니 성희롱을 한 듯 싶네요.
마노아님... 너무 슬퍼말고 희망을 갖고 기다리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