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대담 시리즈 2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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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리'란 단어가 있다. '문+열다'에서 파생된 말인데, 한 배에서 나온 여러 마리의 새끼 중 첫번째 놈을 뜻하는 말이다. 무녀리는 많이 부족하게 된다는데...

서양 철학을 전공한 김용석과 동양 철학을 전공한 이승환이 좌충우돌 폭풍우 속의 키잡이처럼 철학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 문화를 바라보는 이야기까지를 자유롭게 나눈 책이다. 현대의 학문이 통합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철학도 서양과 동양의 대화를 통하여 이해의 폭을 넓힌다는 의도처럼 두 분의 대화가 신선하기 그지없다.

매끄러운 학자들의 겉핥기가 아니라, 서로 쿡쿡 쑤시고 생채기를 낼지도 모를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이 꼭 무녀리 그대로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의 분위기가 이 책의 신뢰도를 뒷받침해 줄 수도 있으리라.

대학을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라는 정의가 새롭다. (46) 총체적 사회적응 능력을 길러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영어나 자격증을 따고,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되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대학에서는 논리적 사고, 치밀함, 감수성을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어야 하는 소양이라고 했다.(49) 옳다.

한국의 풍토는 '교수'를 놀고 먹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승환 교수는 <자식에겐 절대로 교수라는 직업을 권하지 않겠다>고 한다. 살인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란다. (57) 옳은 교수라면 이런 소리가 나와야 한다. 내가 다닌 대학원의 한 교수는 노래방 아가씨가 못생겼다고 투덜대기나 하는 인간이었다. 퉷, 이다. 우리나라의 교수는 수평적 유대보다는 수직적 유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단다. 그래서 이런 솔직한 논쟁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게 될 것이란 김용석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77)

철학이란 '지'에 대한 '사랑'인데, 그 '지'에 대한 개념이 동서양이 상당히 다르다. 동양의 실천적 지와는 달리 인식론의 발전이 서양의 특징.(91) 이렇게 두 개념은 부딪힌다.

서양 문명의 오만함을 이승환 교수가 지적한다. "어디 자연을 인간이 제 맘대로 보호하거나 보존할 수 있는 겁니까? 자연은 스스로 자기의 길을 따라 운행하고 있는데..."(138) 무엇이든 서양이 보편이고 동양은 종속적이란 생각을 질타하며 내뱉는 말이다. 동양의 의학을 '대체 의학'이라 하듯, 동양의 철학도 '대안'은 아니란다. "동양학이 서양학에 대한 대안은 아닙니다. 대안이란 현대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을 내다버리고 전통 동양의 것으로 바꿔치기해야 한다는 뜻. 저는 서로의 보완이라는 개념을 쓰고 싶습니다. 근대와 유학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고, 비판해 주며, 서로를 풍부하게 해 주는 것."(144) 역시 낱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들이 철학자다. 그런데, 사진들은 참 촌스럽고 편안하게 찍혔다. 필름 많이 날렸겠다. ㅋㅋ

억압된 동양(오리엔탈리즘)과 왜곡된 서양(옥시덴탈리즘)을 다루면서 "열린 시대일수록 자아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열림이 아니라 <엶>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뇌수를 둥~~ 울린다. 열린은 열다의 피동형, 수동태가 아닌가 말이다. 능동적인 자주적인 <엶>이라야 주체적인 철학이란 뜻이겠다. 낱말 하나라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고수들의 스파크가 감지된다.

E.H.카나 움베르토 에코처럼 한국에서 스타가 된 학자들에 대한 편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독교의 편향에 대해서는 두려움에 지나치고 만다. 하긴, 한국의 독특한 크리스차니즘은 둘이서 죽을 때까지 떠들어도 결론내기 어려우리라. 불신지옥이라니깐.

동양이란 것의 정체성을 논하기 전에,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억'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한국인에게 남은 '기억'은 어떤 것일까? 빨갱이 사냥의 매커시즘의 추억, 살인적 이승만의 반공에 대한 추억, 4.19가 피에 물든 5.16 쿠데타의 기억, 박정희의 핏빛 기억의 시대, 광주의 봄과 피의 80년대의 기억, 문민정부의 혼란과 미국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기억...(마치 남미에 개입한 미국처럼...) 이런 비겁한 것들이 들쥐와 같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만들게 된 것들이 아닐까... 생각하면 두렵고 무섭다. 그저 동양이 아닌 한국은 동양 속에서도 극히 한정된 일부분이 아닌가 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 철학자의 논쟁은 <열린> 구조로 막을 내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1막이 내렸을 뿐이다. 서양에 대하여 더욱 탐착하고, 동양에 대하여 더욱 집중하여 대화를 나누고 이해를 구하는 인문학의 토론의 장이 앞으로 넓적한 판 위에서 푸지게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무녀리는 부족하지만, 똘똘한 뒷놈들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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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역시. 저도 별다섯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김용석 교수와 이승환 교수 두 분 다 만만치 않은 분이죠. :)

글샘 2007-05-2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나마 읽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