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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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편은 전혀 아니고, 문학적 감수성이 강렬한 쪽은 더더욱 아니고, 소설을 줄창 살펴가면서 읽는 것도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유명짜한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아이들의 독후감을 읽어낼 수 없어서 읽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생겼고, 알라딘에서 비비댄 후로는 이런저런 리뷰들을 읽다가 너무도 맛깔스런 리뷰에 매혹되어 소설을 읽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이 소설도 드팀전님의 리뷰를 읽었던 것 같은데(요즘엔 내 기억력을 도통 믿을 수가 없음 ㅋㅋ) 정말 오랜만에 맛깔스런 소설 한 편에 매혹되어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읽고 만 것 같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다가 아직 한 열 장 남았는데, 거기서 해설이 툭 튀어 나왔을 때의 심사란... 왜 그리 해설이 밉살스러워 보이던지... 아직도 부용각 언저리에 휘감기는 광목 자락의 바람 가득 받은 흰빛을 해설피 쳐다보고 싶었건만...

이현수란 작가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정말 짠한 이야기들을 푸짐한 말의 밭에서 모락모락 피워올린 수작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맛보았던 쫄깃쫄깃한 겨울 꼬막맛과도 같은 말뽄새가 이 작품이 한 권의 장편인데도 대하소설이 아님을 아쉬워하게 하는 맛이 있다. 정말 이 책이 열 권짜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불처럼 열 권은 지겨운 소설도 있건만...

조선의 기생은 무엇이었을까? 기생은 여느 술집 작부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기생의 세계는 술집 작부의 음淫을 뛰어넘는 락樂이 있었던 것 같다. 낙이불음이라고... 즐기지만 음란하진 않은...

그리고 기생들의 세계에선 춤기생, 소리기생 같은 예인의 전통을 갖추고 있다. 그저 얼굴만 예쁜 꽃기생도 있는 모양이지만, 기생의 원류는 아닐 것이다.

조선 시대는 꽉막힌 유교의 시대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분리되었고, 아내란 존재는 정지용이 향수에서 노래한 것처럼 쳐다봐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일꾼 내지는 자식 생산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대부들은 울타리 밖에서 '여성'을 찾았고, 거기엔 대화가 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춘 여성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저 섹스 파트너로 기생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굳이 예인의 소양을 갖출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여럿이지만, 우선 그 푸짐한 말맛에 있다.

기생은 흥을 먹고 태에 사는 법... 처럼 멋진 말들을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왼갖 비유가 달착지근허니 귀에 앵겨붙는다. 이 작가, 시 써도 꽤 괜찮겠다.

채란의 죽음을 보고 '한 사랑에 목맨 기생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고쳐 생각해 봐도 풀잎에 벤 것처럼 마음이 쓰라린' 사람.이라는 둥

오마담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타박네의 말, 삼베와 명주를 모아쥐고 한 시간만 비벼 보아라. 거친 삼베야 아무 상처가 없지만 보드라운 명주는 글세 올이 나가거나 실밥이 터지고 만단다...

사랑은 가루비누랑 똑같은 거다. 거품만 요란했지 오래 쓰도 못 허고, 생각없이 그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마 살 속의 기름기만 쭉 빼묵고 도망가는 것도 글코, 그 물이 담긴 대야를 홱 비아뿌만 뽀그르르 몇 방울의 거품이 올라오다가 금세 꺼져뿌는 기 똑 닮었다... 캬, 가루비누...

요시로는 아고 어른이고 철딱서니가 없어놔서 큰일이라카이. 말세가 따로 있나, 어른없는 시상이 말세지...

행패부린 손님을 보고는, '괜찮다. 왜냐면 나는 기생이니께... 내가 손님에게 멱살이 잡혀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것도 잊고, 니가 받고 싶지 않은 손님을 대신 받은 일도 잊어버려라. 넌 그걸 수모로 생각하고 내게 대드는 모양이다만, 그건 수모가 아니야. 기생인 인생이 심심할까봐 덤으로 열리는 이벤트라고 생각하렴.' ㅋㅋ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행패 부리는 학부형에게, 교사 인생 심심할까봐 덤으로 열리는 이벤트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이벤트 참 많이 겪었네..

그리고 묘사도 돋보인다.

처음에는 목을 씻느라 깔깔하던 소리가 곧 자기 자리를 찾는다. 다른 기생의 청아한 소리가 먼저 소리에 얹힌다. 한번 꺾어올리고 두번 문지르다 떨어지는 두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고, 소리를 밟고 선 미스 주의 몸이 움찔 곡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싸목싸목 소리를 따라 흐르던 몸이 대청 그늘 속으로 스며들고 흰 한삼 자락의 한 끝이 허공을 베어물면 세로로 면이 갈라지고 손끝으로 쳐서 띄운 다른 자락은 중동에 쏠린 힘으로 바람을 머금어 팽팽하게 펴진다. 면이 모였다가 흩어지면 선이 되고 힘을 주어 후리면 날개를 펼친 새 한마리 후드득 날아 오르는 형상이 된다. 엇나가게 내지른 두 자락의 한삼, 팽팽한 기운으로 잡아당기면 끝면만 탈싹 무너지다 어니새 하나의 꽃이 되어 난분분 떨어진다. 후리고 꽂고 치고 빠지는 손길을 바라보던 미스민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들썩인다.

바람에 한껏 배를 부풀린 무명이 하늘로 치솟아올르 때 사향내가 코를 덮치고 이어 여자의 굿불이 보였지. 손긑이 저릿한 게 숨이 쉬어지질 않았어. 또다른 무명이 바람에 펄럭 하늘로 솟구칠 땐 쪽을 찐 옆얼굴이 보이더군... 무명 뒤로 여자의 실루엣이 어른어른 비치는데도 볼 수가 없으니 입이 타더군...누가 저 무명들을 확 걷어줬으면 좋겠어... 늘어진 무명천 밑으로 꽃 자수가 놓인 비단 고무신이 왔다갔다하는 게 보였거든...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찰지고 달콤한 말들을 이현수에게서 얻게 되어 흐뭇하다. 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은 마치 기방으로 가는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접해도 금세 익숙해지고 마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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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지고 들쩍지근하게 엉켜드는 말들, 소리내어 읽으면 감칠맛도 나더군요. ^^

글샘 2007-03-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참 재밌죠? 말도 정말 찰지구요. 리뷰 같은 거 오랜만에 쓰는 거 같네요. 이제 책도 슬슬 읽어얄텐데... 학기초에 감각을 잃어버리니... 그래도 피아노는 열심히 다니고 있답니다.^^ 일주일이 한 두어번 빼먹기도 하지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