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편지
루쉰 외 지음, 리우푸친 엮음, 임지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루쉰의 편지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인품이나 정치적 소견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만, 사실 이 책은 루쉰이 그의 제자이자 아내가 된 쉬광핑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옮긴 것이다.

그 앞뒤 상황을 엮어주기 위해 엮은이 리우푸친이 해설을 곁들인다. 리우푸친의 해설에서 남의 연애담을 엿보는 이의 재미있어 죽는 마음이 고대로 드러난다.

루쉰의 글들을 읽으면 엄정한 시대에 꼿꼿하게 대적하는 한 지식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는데, 생각 밖으로 이 편지들에서는 다정다감한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되어 참 반가웠다.

쉬광핑은 그의 수업을 맨 앞자리에서 들을 정도의 열성을 가진 여학생이었는데, 민국 14년(1925년) 3월 11일 루쉰 선생님께... 하는 편지를 보낸다. ... 매주 수요일이면 10시부터 1시까지, 일주일에 거의 한 번 뿐인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맨 앞줄에 앉아서 때로는 당돌하고 거침없는 질문을 즐기던 바로 그 조그마한 학생...이 이 편지를 보냄으로써 두 사람은 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얽히게 된다.

쉬광핑이 학내 문제로 곤란을 겪을 때는 위로의 편지를 보내 주었고, 졸업 후 두 사람이 떨어져 살게 되면서는 편지를 쉽게 주고 받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며 낱낱의 삶의 자투리들을 편지로 전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두 사람의 편지는 연애 편지이면서도 진지한 시국 토론과 사건에 대한 분석이 곁들여져있고, 때로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의논을 편지글 안에 녹여두고 있다.

당시 중국 사회의 부정적 현실을 '중국 사회는 너무 늙어빠진 탓에 사건의 규모가 크건 작건 그 본질은 모두 추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검은 물감이 들어있는 항아리레 아무리 깨끗한 물건을 집어넣는다 해도 모두 검게 물들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암만 생각해도 개혁이 아니고는 별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59쪽)'라는 말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을 한국으로 치환하는 상상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한숨만 나왔다.

그러면서 제자에게 '광핑형, 당신이 지나친 열망을 품지 않길 바랍니다. 열망이 지나치면 실망을 가져오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미래는 분명 나아질 거라는 희망만은 저버리지 않도록 합시다...(98)'라고 하여 희망을 주려고 한다. 이런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부끄러운 선생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그렇지만 때론 사회를 위한 희생에 절망적인 표현을 하기도 한다. '군중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면 군중은 제사가 끝난 후에 그의 살점을 산산조각 내어 뜯어 먹는다...(126)'는 말은 사회 운동의 허망함과 의지가 강해야 함을 되새기게 한다. 지식인들의 운동이 갖는 한계가 그런 것 아닐까? 제 살점을 뜯어먹을 민중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체 게바라도 살점이 뜯기기 전에 콩고와 볼리비아로 도망쳤는지도 모르겠다.

군중 뿐 아니라, 사회에서 개혁자와 반개혁자의 위상에 대한 그의 분석도 탁월하다. '반 개혁자가 개혁자를 독살하는 것은 예로부터 결코 늦추어진 적이 없고, 그 악랄한 수단 역시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단지 개혁자들만이 환상에 사로잡힌 채 매번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중국이 개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앞으로는 마땅히 태도와 방법을 개선해야 한다...(191)'는 의견을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민족의 개조를 위하여 힘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100년 전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독살당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인 정조 임금의 급서와 백범, 몽양, 장준하 선생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도 고통스런 연민이 밀려온다. 이 암울한 역사에...

쉬광핑은 연인으로써 루쉰에게 '당신의 단점이라면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지나친 증오심을 갖기 때문에 절대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가 커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이내 서글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너무 민감하고 열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270)'라는 평가를 내린다.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런 것들이 지식인 운동의 한계를 노정하는 공통점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루쉰이 교직원 친목회에 가서 교장을 칭송하는 아부파에게 비난을 퍼부은 교직원이 곤란해지는 사건을 겪고, 친목회의 무의미함을 회의하는 장면은 많은 교사들이 친목회에 던지는 의문의 눈초리를 떠올리게도 된다. 왜 친목회는 여행을 가고 술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친목이라면 학기초에 직원들이 새로 오면 환영회를 열어 준다든지, 가신 분들을 초청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임이라도 좋지 않을까? 하는...

당시 서양 유학파 교수들은 '고등 인간론'에 경도되어 저급한 인간들의 한계에 치를 떨었던 반면, 루쉰은 평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 시대나 가진 자들과 지식인들은 '중립'을 내세우면서 민중에게 <자기를 배반하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 문제 제기 교육을 외치는 개혁가들은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단지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녀들은 총명하고 지혜롭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고군분투하기로 결심만 한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당신들을 노예로 살도록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들이 평생을 가난에 허덕이며 살도록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습니다...(341)'는 말은 어느 시대에도 패배 의식에 젖게 되는 민중들에게 삶의 비료가 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교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의 편지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고뇌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유의미하다. 특히 이 책에서는 유쾌한 그의 연애 편지 사이에서 건질 수 있는 수확들이어서 유쾌하고도 신선한 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역시 난 사람은 연애 편지 조차도 예술이다.

17쪽의 편지 겉봉은 분명 루쉰의 필적으로 쉬광핑에게 보낸 것인데, 쉬광핑이 보낸 겉봉투라고 실수를 저질렀다. 귀엽게 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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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9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7-01-2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책 자체가 애교로 넘칩니다.^^ 루쉰 선생님이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사랑은 그런 거죠.

달팽이 2007-01-29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시절에 읽었던 루쉰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허나 자신을 시대적 걸음의 디딤돌로 사용했던 마음은 느꼈습니다.

글샘 2007-01-3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루쉰은 결코 읽기 쉬운 작가는 아니죠. 그 유명하다는 아큐정전도 얼마나 비비꼬아서 적어 두었는지... 이 책에서도 루쉰은 자기를 딛고 후배들이 자라는 것을 바라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