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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한문 공부 한답시고 대학과 중용을 들여다보던 때가 있었다. 철도 없게도.
선생님 없이 한문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이 책에서처럼 책으로 설명해주는 선생님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훈고학이란 것이 있었다고 배웠다. 난 그저 문맥에 맞는 글자 풀이와 원문 주해에 빠진 비실용적 학문이라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다.
훈고학이란 옛날의 경전에서 배우는 것으로, 온고이지신할 수 있는 한 방법인 듯 하다.
옛날 경전을 재해석하고 현실에 맞게 옮기고, 후학에게 가르치는 일, 그것이 바로 <철학>이란 것 아닌가.
이아무개 님은 그래서 훌륭한 철학자이시다.
물론 그분의 풀이에 예수님 말씀이 들어가지만, 나도 교회기피자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좋아한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비근한 예를 들어가며 풀어가는 것은 또다른 온고이지신의 하나일 것이다.
<대학>은 큰 공부의 시작이다. 그런데 실로 이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격물 치지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격물, 물로써의 세계에 대한 궁구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인간 세계를 풍미하고 있으며,
수신 하나도 못하여 세상은 혼미하기도 한 것을 보면, 여기서 종교가 나오기도 한 것이다.
참으로 작은 근본을 건드려 큰 세계를 흔드는 말이다.
이 개념들은 단계적이고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근본과 말단의 개념이라고 한다.
예수님 비유에서(123) 포도나무에 몇 년 동안 열매가 달리지 않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했을 때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열매는 가지 끝에 열리지만, 가지 끝이 아니라 그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한다는 원리.
참 간단하고도 심오하다. 한 아이가 앙상한 모습으로 삶의 근원을 잃었을 때, 그 가지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근원에 거름을 주어야 하는 것이 '군자'로서의 교사 모습임을 본다. 부끄럽다.
이것들이 기계적인 단계가 아님을 <아이기르는 법을 모두 배운 뒤에 시집가는 일은 없다.>는 비유를 쓴다. 공자나 예수나 뛰어난 사람들은 비유의 달인들이다.
군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하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혈은 헤아린다는 듯이고, 구는 잣대라는 뜻이다. 반듯한 자로 헤아리는 도란 의미다.
헤아림의 근거를 '마음'에 둔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을 헤아리는데 자기 마음으로 잣대를 삼는다.
윗사람의 행동이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효력이 빠른 것은 그들이 동일한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수신의 근본이 제가, 치국, 평천하의 말단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현란한 말末 쪽으로 치달리는 우리의 눈길을 어떻게든지 단순하고 소박한 본 本쪽으로 향하게 하려는 옛 스승의 깊은 뜻이 참으로 간절하구나!>하는 저자의 맺음말로 대학은 철학의 근본을 더듬는 책으로 거듭난다. 이런 풀이가 없었더라면, 나같은 범부는 어리석게도 대학은 배울 것도 없는 책이라는 둥,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계론적 이야기만 반복되더라는 둥 했을 테니 말이다.
<중용>은 몇 번은 읽었는데, 쉽지 않은 경전이다. 그래서 겁을 먹고 있는데, 첫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가의 심오한 철학이 여기에 담겨있다 하거니와 미리부터 겁먹을 것까지는 없다해도 마음으로 신중할 필요는 있다> 쿡, 찔렸다.
중은 天이요, 용은 人이라. 그래서 중용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란다.
이 둘 사이를 제대로 맺어주는 것이 <성誠>이라는데 성의 의미는 중용보다 더 어렵다.
내가 날마다 쓰는 가르칠 교(敎) 자에 대한 설명이 중용에 잘 나와 있다.
천명을 성이라 하고, 성을 좇음을 도라하고, 도를 닦음을 교라한다. 이것이 중용 첫머리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도>인데, 이 도를 닦음이 <교>인 것이다.
당연히 <교>는 지난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하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하며, <인생의 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어야지, 엉뚱한 삽질을 하면서 <교>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생 노릇 할 바에야, 똑바로 올바르게 해야겠다.
인생의 도는 5륜에 담겨있다는 것이 맹자의 풀이다. 의, 친, 별, 서, 신의 다섯이 오륜이다.
인생길을 제대로 걷게 해 주는 것이 <지, 인, 용>이다. 지는 길을 잘 아는 것, 인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 용은 굽히지 않고 나아감이다. 이것이 <인생의 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덕을 도로 갖추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誠>이다.
성하지 못한 지는 <술수>로 빠지고, 인은 <마르고>, 용은 <폭력으로 바뀌>고 만다는 것.
별 논리적이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성>이란 개념은 돈오 점수의 점수하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이 <성>의 중요함을 이렇게 비유한다. 성실하지 못함. 이 한 마디 말은 수학에서 0과 비슷하다.
아무리 많은 정수라도 영을 곱하면 없어져 버린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고, 실천력이 강하고, 굽힘이 없는 지,인,용의 사람이라도, <誠>이 없다면 0이란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결정적인 무엇>이 없어서 결정적으로 결함이 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런 것을 통틀어 성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배울 때는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물을 때는 <무지함을 그냥 두지 않고>, 바랄 때는 <얻지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가릴 때에는 <밝지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행할 때에는 <착실치 못함을 그냥 두지 않는>,
그래서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 한다.
이것이 <성>이란 개념을 설명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요즘 피아노를 뚱땅거려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처음에 쉬운 것은 없다는 것. 손가락을 바꾸어야 하고, 리듬을 부드럽게 타야 하는데, 남들보다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연습을 덜 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 천 번 연습하지 않고 어렵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는 것.
공자는 요순과 문무의 뜻을 따라 살았고, 천명의 도를 걸으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에게 의(사사로운 뜻), 필(반드시 하려는 뜻), 고(단단한 고집), 아(나)의 네 가지가 없었다는 '논어'의 증언에서 그가 얼마나 빈틈없이 <성>을 이루며 살려 했던지를 읽을 수 있겠다.
고전을 읽는 일은, <나>를 읽는 일이다.
옛사람들의 글이 제시하는 하늘의 별을 우러러 보면서, 이 자리에 선 나의 좌표를 둘러보는 일이며,
간혹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항로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이며,
성경, 불경, 각종 철학서들이 뱉어낸 말들에 휘둘리는 내 마음의 밭에 근본은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게 하는 일이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그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엄두도 못낼 책들은 아니라는 '조금은 건방진' 생각을 먹기도 한다. 그래야 백분의 일이나마 성인들의 삶 변두리를 산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