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긴 우동집은 별로다. 돈까스도 맛없었고. 롤도 그닥. 우동조차 맛이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돈까스 매일 100개 만들어 100개씩 튀겨 팔던 여자로서 이런 건 용납할 수 없다_ 라는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이건 아니죠. 사장님. 딸아이가 시킨 돈까스와 우동 두 입, 롤 3개 먹고 젓가락을 재빨리 내려놓았지만 역시나 집에 돌아와 체하고 말았다. 체기가 다 가신지 정확히 하루가 지났는데 또 체하고 말다니, 하지만 왜 체했는지 그 까닭은 맛없는 식사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조금만 뒤틀려도 그걸 꼭 티를 내고야 만다, 성격이 저래서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말을 아빠에게 듣고 그럼 불편한데 어떻게 해! 소리를 빽 지르기도 했던 어린 기억도. 맛없으면 남겨, 했으나 민이는 돈까스를 다 먹었고 결국 집에 돌아와 체한 거 같아 맛없었어, 너무, 그래서 그러니까 엄마가 남기라고 했잖아, 그걸 왜 다 먹어, 잔소리 한마디 하고 소화제를 내미니 매실차 마실래 해서 소화제는 내가 먹고 매실차 타주고 나는 힘들어서 샤워 끝내고 얼른 잤다. 새벽 1시 넘어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몇 시야? 물어보니 새벽 1시! 그래서 왜 이렇게 늦게 자?! 또 한소리 하니 소설 잼나, 엄마, 그래서 잠결에도 웃음이 나왔다. 카프카와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아이는 요즘 유행한다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집어들었는데 완전 힐링이라며 저녁을 먹는 내내 그 소설 이야기를 했다. 결국 카프카와 다자이 오사무도 그 소설을 쓴 작가도, 장자도 타자 이야기구나, 아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느꼈다.

마흔에 읽는 뭐뭐뭐, 오십에 읽는 뭐뭐뭐...... 이런 책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데 아직 한 권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서점에서 그런 책이 매대 한켠을 차지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뭘 원하는 걸까? 이 시대의 중년들은 뭘 원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만 적 있다. 마흔과 쉰, 중년 초입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마흔부터 중년이 한창일 때, 이때가 인생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가로지르는 딱 그 지점이다. 성공과 실패를 적절하게 맛봤고 실패만 그득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어도 중년인데 나도, 이제 꿈 하나라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시기로 여긴다면 중년 이후부터라도! 이런 마음인 걸까. 나는 또 내 인생을 대입시켜서 제멋대로 생각하곤 한다. 혹은 무탈하게 앞으로 남은 나날들을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기는 힘들어도 평화롭게 만족하며 보내고 싶어서일까. 아이 키우는 아줌마들 나이는 다 거기서 거기다. 일찍 결혼했으면 사십대 초반, 늦게 결혼했거나 늦둥이라면 오십대 초반, 대개는 내 나이대. 다시 돌아가 젊어질 수 있다면_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다시 돌아가 젊어지고 싶다_손을 드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만큼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젊었을 때 그 난리 부르스를 다시 하라고 한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들. 치열하게 살았건 치열하게 살지 않았건 그때 그 감정의 널뛰기를 다시 겪으라고 한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냐_ 라면서. 뒤라스가 딱 쉰이 되어 한 인터뷰를 짤로 보았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아요. 과거의 나도 좋았지만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더 그럴 거 같습니다. 난 지금의 나에게 만족합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확실히 뒤라스 목소리에는 힘이 있구나, 다시 한번 뒤라스 목소리에 반한 지점이기도 하고. 언니가 한 말 중에 제일 좋았던 건 '앞으로도 더 그럴 거 같습니다' 여기. 뒤라스의 인생 전반을 봤을 때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죽기 전까지, 투병하면서도, 그걸 알고 있는 팬 입장에서는 더욱 더. 얼마 전에 나눈 대화에서 사람들은 결핍은 결핍대로, 또 튀어나온 부분은 튀어나온 부분대로 그걸 가만히 두고 바라보지 않는다_라는 말에 뭔가 발끈해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냥 응응 하고. 결핍은 결핍대로, 저 녀석은 저게 한참 모자란 녀석이지, 그 결핍을 갖고 이야기를 하고 튀어나온 부분을 갖고는 저 녀석은 저렇게 나대고 살지, 그냥 좀 조용히 있어도 좋을 텐데 저렇게 좋다고 나대고 다니네, 얼마나 그 행운이 가는지 보자, 하고 시기하는 마음과 못된 마음을 먹고. 왜 그럴까? 엄마에게 이래서 이래서 이랬어, 하고 이야기를 하니 엄마가 현명하네, 다행스럽게도, 라고 했다. 사람들 사는 게 그렇다. 이 에미도 곧 여든인데 사람들 말소리에 일희일비하기 일쑤인데 그냥 너를 보면 애간장이 탄다, 라고 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하니 너는 그냥 다 말해버리니까, 다 쏟아내버리고, 얼굴에도 그냥 다 드러나고. 엄마 말을 들으면서 그냥 눈동자를 굴리고 말았다. 민에게도 들었던 바, 엄마는 포커 페이스가 안되더라. 해서 너는? 했더니 나는 포커페이스 짱이지,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 들려주어 들어보니 그렇다, 우리딸도 포커 페이스다. 포커 페이스 연습해야지. 아침 간단히 먹고 병원 순례 다녀야 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든 생각, 대붕 이야기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어느 누구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메추라기가 될 때도 있는듯 싶다, 스스로를 메추라기로 만들 때도 있고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자매, 내 친구들, 내 연인, 내 아내, 내 남편, 내 선생님들이 나를 메추라기로 만들 때도 있다. 나는 공적인 관계에서 활동을 해본 경험은 진짜 짧아 공적인 관계를 언급하기에는 그래서. 또 동일한 케이스로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자매, 내 친구들, 내 연인, 내 아내, 내 남편, 내 선생님들이 나를 곤으로 붕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지나고보면 난 운이 좋았던 것도 같다. 물론 그만큼 불행도 겪긴 했지만. 더불어 내 친구나 내 연인이 내 선생님이 나를 하늘로 띄워 날아오르게 만든 바람이라면, 나 역시 그들을 하늘로 띄워 날아오르게 만드는 바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더불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추라기가 아니라 곤으로 붕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여 중년의 나이에 고전을 읽고 그 고전의 구절에 내 인생을 대입시켜보고 거기에서 희망을 찾고 또 신발끈을 묶어보자 싶어 그런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 아니겠는가. 문득 졸혼하고 싶다는 동네 친구들도 떠올랐는데 그냥 거기까지 생각하고 잠들었다. 자신을 메추라기로 만드는 이들은 그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 확실히 끊어버리는 편이 좋다고 여긴다. 마음에 안 들면 칼같이 자르는 거, 좋지 않다고 엄마가 맨날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데. 또 자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아침부터. 아직 어려서 그렇다. 쉰이 뭐가 어려? 켁켁. 아직 어리다고 여깁니다. 쉰이 되어보면 마치 모든 것들을 헤아릴 수 있어서 허허실실 웃기도 많이 웃고 다니고 사람들도 항상 곁에 그득할 줄 알았고 하는 일마다 모두 다 잘 해낼 것이다, 그런 망상과 같은 생각을 스물에 한 적 있다. 곧 관뚜껑 열고 들어가도 될 정도 아닌가 그러하다면. 개인적으로 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곧 죽어 바람에 훨훨 날아갈 정도의 경지가 아닌가 그 정도라면. 스물 즈음에 막연히 그렸던 그 쉰을 곧 마주하고 있노라면 별로 달라진 거 하나도 없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 음 예순 정도 되면 우리 엄마 말씀이 맞았구나 그렇게 칼같이 끊어버리면 안 되는구나 하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끊는 게 답입니다, 라고 말하고 만다. 똥고집이네.

또 어마무시한 꿈을 꾸었다. 이쯤 되면 나의 무의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싶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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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18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캉 프로이트 찍고 강신주에게로 날아간 수이님, 제가 격하게 응원합니다. 먼저, 저 책이 우리집에도 있어서 무척 반갑다는 말씀 드리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

마흔에 뭐뭐.... 하는 책들을 저는 몇 권은 스르르 봤는데... (물론 정독이나 완독은 아닙니다만) 그냥...
허허하고 쓸쓸한데, 그걸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제목이 그러니 끌리는게 아닐까 싶어요. 마음은 그대로잖아요. 어제 제가 유퀴즈에 최민식 배우님편 봤는데 (급고백ㅋㅋㅋㅋ) 그 분도 그러시대요.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구. 마음은 그대로라구. 보통 어르신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시잖아요. 근데 저도 40대 후반으로 달려가다보니(이미 달려왔나? ㅋㅋㅋㅋ) 그런 생각 많이 들어요. 제 멘탈은 그냥 딱 아직도 열아홉 스물 이정도 밖에 안 되거든요. (정신연령 테스트에서 26세 나온 사람) 전 그대로인데 나이는 먹었고. 이걸 어떤 식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할지 모르니깐... 사실 저도 모르겠구요.
알게 되면.... 연락 좀 주세요. 010-1234-5678입니다!

수이 2024-02-18 11:34   좋아요 1 | URL
음 저는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사는 게 답이 아닐까, 라는 쪽으로 확신을 갖고 이쪽으로 오게 된 거 같습니다. 우리도 곧 쉰이니까 공자가 쉰이면 뭐라고 그랬지? 암튼 그게 개뻥이라는 걸 알고 나니까, 뭐 비단 나뿐만 아니라 주변 나이든 선배들도 보면 그렇고 그냥 생긴대로 사는 게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이가 먹어도 마음은 그대로니까 또 나이드는 몸을 저주하는 한편, 그렇게 온갖 약물을 넣어서 억지로 팽팽하게 탱탱하게 만드는 걸 텐데 이게 또 나름의 제한선이 있다는 것 또한 이미 모든 것들을 겪으신 분들이 보여주시니 좀 덜 하게 되고 그냥 편하게 룰루랄라 살도록 하자 이렇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아나키스트의 대답은 한계가 이렇게 명확하네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아, 마흔에 뭐뭐.... 쉰에 읽는 뭐뭐..... 이런 거 읽는다고 해서 다 그 지혜를 흡입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때 읽는 순간 잠깐일 뿐이지, 그리고 또 인간의 특성대로 다시 룰루랄라 그 모드로 돌아가는 거겠지만_ 그리고 솔직히 저렇게 요약해서 유명한 문장들 몇 개 끼워갖다 맞추는 거 별로, 그래서 안 읽는 거겠지만 뭔가 100일만에 영어 귀가 뚫렸어요! 이런 느낌인지라 약 파는 광고 느낌....... 그러니까 음 단발님은 스물여섯 그대로 사시면 됩니다. 정신연령 열아홉으로 나온 사람 올림.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파할 일이 없다"는 것

스피노자 - 기쁨은 지키고 슬픔은 멀게, 만나서 감정이 있어야 마주친 것. 기쁨을 유지하려는 것이 사랑이다. 대상을 가진 기쁨이 사랑.


대상을 대상으로서 기쁨을 지니고 마주할 수 있는 경우는 복되다는 것. 

자신에게 최고인 것들로 바닷새를 대접한 노나라 임금, 사흘 후 바닷새는 죽음, 사랑하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비극, 새는 죽고 내가 사랑하는 새가 죽었으니 노나라 임금은 슬픔을 하염없이 느낀다. 바닷새의 죽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타자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던 장자. 바닷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읽지 않았던 노나라 임금. 사랑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자 한다, 헤아리고자 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 그걸 알려고 하는 것. 나는 그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니 그 사람 역시 나로 인해 기뻐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헤아림.

결혼 이후에 그 헤아림이 멈추는 것은 이미 나에게 포획되었으니까. 도망치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더 이상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는다. 바닷새를 잡아 종묘에 데리고 들어온 순간, 그 순간부터 사랑은 증발된 것이 아닐까.

장자가 말하는 자유란 '떠날 수 있는 힘'

원효 - 내가 생각해서 행하는 그 '선'이 타인에게도 '선'이겠는가.

"타인을 만나거든 타인에게 선을 행하지 마라. "

"타인을 아껴서 선도 행하지 않는데 악을 행해서 쓰겠느냐?"

계속 알아가려는 마음가짐

"10년 지나서 그 사람을 다른 누구보다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 사람은 더 행복해지겠죠."

우리는 타자를 모른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알게 되겠지만 내 기준으로 (그에게) 선을 행하지 말자. 그 선을 행했다 해서 그 선이 그에게 닿았는가. 결국 그 선은, 내가 주는 그 사랑은 그( 바닷새)를 파괴하고 죽게 만들지 않았는가. 나는 선을 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랑을 전달했다. 이건 면피일 뿐이다. 나는 괜찮은 연인이었지. 하지만 실로 괜찮은 연인이었는가. 그게 진실로 바닷새가 원하는 사랑이었는가? 바닷새의 마음을 헤아린, 바닷새가 원하는 사랑이었는가 말이다. 노나라 임금의 입장도 되어보고 바닷새 입장도 되어보도록 하자. 그 생각과 그 느낌들. 사랑이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관계. 누군가를 사랑하거든 절대 그를 우리에 넣지 말라. 선녀와 나무꾼. 나무꾼은 선녀옷을 훔쳐 선녀가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낳는다. 하지만 결국 선녀옷을 찾은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무꾼의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다. 만일 나무꾼이 선녀옷을 뒤늦게 돌려준다 치자.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다. 왜? 선녀는 나무꾼 곁에서 이미 사랑을 느껴 행복하니 하늘이 아니라 그 지상의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자리가 나무꾼 곁이라는 걸 알기에. 사랑의 조건은 상대방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동등해져야 가능하다.

바닷새 이야기는 계속 헤아리고픈 이야기, 살아가면서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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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6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극한 잔소리에 그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샤워를 하고 할 일 하고났더니 좀 나아졌다. 일기를 요즘 아침에 쓰다보니 항상 하는 이야기는 어제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제 극한 잔소리.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를 읽고난 후 클레어 키건을 읽을까 다자이 오사무를 읽을까 갈등하던 딸아이는 다자이 오사무를 택했다. 쎌 텐데_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몇 살에 읽었는데? 물어봐서 나는 열일곱인가 했더니 그럼 뭐 나도 읽을 수 있어 해서 엄마는 다자이 오사무 읽고 한동안 멍했어. 그래서 영향 꽤 크게 받았는데 민이는 어떨까 모르겠네 말하니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면 좋았다는 소리지? 좋았지. 그런 식의 삶이 있다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알았고. 니힐리즘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겠죠. 했더니 읽어야지, 두근두근_ 이라고 답하더니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니힐리즘이 맞던가 다자이 오사무가....... 읽은지 30년 지나서 가물가물하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면서 나는 엄기호 책을 꺼냈다. 클레어 키건이 왜 그리 좋았는지 아이가 물어봤을 때 고통을 나눈다는 건 삶을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 왜 사람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걸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엄마는 종종 그런 생각 자주 해. 왜 내게 사람을 보내신 걸까? 왜 그 사람에게 나를 보내신 걸까? 그런 생각. 소중한 이들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 자주 함. 더불어 인간은 인간 없이는 존재하는 게 불가능함. 다들 각자의 믿음과 생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거라 치지만 공동체에 대해서, 낙원과 같은 공동체와 지옥과 같은 공동체와 결국 그걸 판가름하는 건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어떤 믿음과 불신을 지니고 살아가느냐_ 그거일 텐데 클레어 키건은 그걸 명확하게 보여줌. 어려운 단어 하나 쓰지 않고.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도 더불어 하게 만들고.

아이가 곰곰 생각에 잠겨 심장과 뇌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때 이때가 나는 행복하구나. 아이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심장은 뇌가 돌아갈 때 더 가열차게 펌프질을 하는듯 싶다. 예를 들어 신세계에 눈을 뜰 때 말이다. 책이라는 신세계, 사랑이라는 신세계, 그런 것들.

어제 잠들기 전, 극한 잔소리를 폭탄으로 날리던 장본인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사랑해, 내 딸."

아이가 겨울방학을 잘 보내는듯 싶다. 선행을 최소 3번은 돌려야 한다고, 이번 겨울방학이, 바로 적기라고, 동네 아줌마들은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모임에서 말을 주고받았다. 중2 겨울방학, 하염없이 귤을 까먹으면서 제일 뜨끈한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미친듯 책을 읽기 시작한 기억. 그때 읽으면서 알았다. 책이 나에게 길을 보여주는구나, 나는 그 길목에 서 있구나. 나는 이제 책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인간이 되겠구나, 그런 것들. 활자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 알고 알고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부글부글 아랫목이 들끓는 것처럼 내 영혼을 지글지글 데피기 시작한 그때. 그러니 내 아이도 딱 이맘때쯤 책이라는 신세계에 눈을 뜬다면 좋겠는데 아줌마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 생각을 했다. 아이 입에서 박종대나 배수아나 카프카나 다자이 오사무와 클레어 키건 이름이 나오는 걸 멍하니 들으면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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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13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엄기호 한 권 밖에 안 읽었지만, 저 책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의 곁에 있자...... 수이님, 굿모닝!

공쟝쟝 2024-02-13 13:08   좋아요 2 | URL
저는 엄기호 책을 시중에 나온 것은 다 읽은 사람입니다만 (왜죠?) <고통..>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책예요.
영혼을 지글지글하게 데펴버린 책 읽기. 나는 그 지글지글 열독모드 35살쯤에 왔어요. 그러고보면 중2병이 35살에 왔던 걸까나. ......... (한숨)... 수이님 굿 앱터눈~!

단발머리 2024-02-13 13:10   좋아요 2 | URL
앗! 엄기호책 이렇게 많았네요. 그걸 다 읽었단 말입니까!! @@
저도 한 두권 더 읽어야지 했는데 가는 길에 또 훌륭하신 분들 몇 분 만나가지고 자꾸 미뤄지네요.
35살에 중2면 이제 곧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하는 중3? 파릇파릇 16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2-13 13:54   좋아요 1 | URL
저는 엄기호 누구더라 같이 누군가랑 쓴 책 읽었던 거 같은데 가물가물합니다. 이 책은 제 베프가 한동안 엄청 읽고 있을 때 오 나도 읽어야지 하고 구입하고 한동안 내팽개치다가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의 곁에 있자, 이 말 좋네요. 고통은 확 줄어들고 기쁨은 배가되는 거겠죠? 사람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게.

수이 2024-02-13 13:56   좋아요 1 | URL
중2병 쟝님이 오셨다 하니 영혼 나이 최고령자로 나오신 분이 하실 소리인가 싶습니다 푸훗, 날이 따스해졌다가 다시 추워졌다가 그러네요. 얼른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레알 중2가 유투브 보고 다시 한번 반하셨다고 합니다. 근데 조끼는 진짜 벗자, 이모...... 라는 말도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2-13 13:57   좋아요 2 | URL
저 조끼 이야기 한 4년은 간다.....에 500원 겁니다.






공쟝쟝 2024-02-14 16:55   좋아요 0 | URL
검색해봤는데 다 읽진 않았고 여덜권 읽었더라고요 (자진납세 ㅋㅋㅋ) 뭔 책이 왤케 많으심?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그런 차가움이 공기 속에 감돌고 있지만_ 그러니까 입춘이 지나긴 지났다만 아직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애매모호한 봄의 경계에 있다. 봄이 곧 오실 거라는 건 알지만 아직은 몸을 감싸는 냉기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어제 도서관에서 따뜻하다고 패딩을 잠깐 잠깐 벗었는데 그새 몸이 오슬오슬거리는 게 섬뜩해 다시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열람실 안에서 나오는 히터 기운에 몽롱해지면서 책 몇 권을 빌려 왔다. 집에 오면서도 추웠고 보일러를 틀어놓아도 추웠고 샤워를 할 때는 벌벌 떨면서 뜨거운 물을 콸콸 틀었고 머리를 말리면서 헤어 드라이어로 목과 어깨에 끝없이 뜨거운 바람을 갖다 댔다. 온수매트를 미리 틀어놓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이불을 덮고 아 추워 추워 추워 내가 미친년이야 아까 패딩을 벗지 말았어야 하는데 식당에서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패딩을 벗지 말았어야 했는데 계속 자책을 하면서 벌벌 떨면서 잠들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냉기가 몸을 전체적으로 감싸면 아 그때는 뼈까지 으슬으슬거려서 감기가 오시는구나 싶어 미리 유난을 떤다. 이때 유난을 떨면 감기에 된통 걸리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물론 냉기가 몸을 침범하는 순간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어제 또 방심하고 말았다. 볕이 하도 좋아서. 나는 추위에 약한 인간인지라 한겨울에는 항상 온몸을 두꺼운 천으로 감싸고 다니는데 이렇게 애매할 때 한없이 감싸기에도 애매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코트를 입거나 가볍게 입고 다닐 때 나만 패딩을 벗지 못할 때 이때가 제일 춥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몸을 풀고 음성을 남기고 요거트에 꿀과 견과류를 넣어 뜨거운 커피를 내려 번갈아 먹는다. 내 루틴이다. 일부러 몸에 열기를 내려고 반복 횟수를 늘리니 체온이 올라갔다. 가디건을 걸치고 커피를 내리고 있노라니 평상시보다 아이가 일찍 일어나 사과를 깎아달라고 해서 사과를 하나 깎아 접시에 담고 폰을 보니 3년 전에 썼던 오늘 일기와 5년 전에 썼던 오늘 일기와 7년 전 오늘 일기가 알림판에 떴다. 하나씩 읽어보고 웃음이 나왔다. 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7년 전에도 도서관에 다녀온 이야기였다. 도서관에 갔다. 날씨가 애매모호하다. 좀 추웠지만 버틸만 했다. 패딩을 입고 자판기에서 뜨거운 밀크커피를 뽑아 벤치에 앉아 마셨다. 봄이 곧 오실 거 같다. 기분이 좋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엄마들은 아장거리는 아이들 뒤를 쫓아다닌다. 새가 지저귄다. 불행은 도서관에 출입이 불가하다. 안온하게 존재하고 싶다. 언젠가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봄이 곧 오실 테니 내 인생에도 봄날이 오지 않겠는가. 김윤아는 봄날은 간다고 노래를 했지만 살아가는 내내 봄이 또 오시리라 믿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봄날은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도 오고 겨울이 시작되고 또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7년 전에도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명절증후군을 앓을 여동생들 걱정을 잠시 했다. 방어 기제에 대한 구절들을 읽고 그렇지, 인간이 다 그런 거지.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러긴 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내가 제일 끔찍하다고 여기는 인간 유형들, 그런 행동들. 그런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기장을 펼치고 문장들을 하나씩 적어가던 아주 오래 전 기억도 떠올랐다. 시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야. 책 하나씩 들고 딸아이랑 오후에는 엄마 집으로 간다. 번잡스러움을 온통 물려버리고 1961년에 녹음된 음에 몸을 맡기고 어젯밤 남은 식재료를 꺼내 밥을 볶을 준비를 한다. 구정이다. 게으르게 보낸 2024년 1월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렇지! 2024년 1월은 내일부터 시작인 거지, 비로소! 개구지게 웃는다. 많이 웃고 많이 웃어서 눈주름도 한가득, 팔자주름도 한가득 깊이 만들래. 그럴래.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거니까. 어릴 때부터 내가 원한 자아상도 그런 거였으니까.

봄이 곧 오시지 않겠어요.

그러니 서서히 준비를 하도록 합시다.

1961년 녹음된 음들이 속삭이는 전언. 민이 책 도착.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소피의 세계]를 같이 읽고 있다. 만화책으로 된 소피 1권을 갖고 있기에 2권이 언제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걸 알고 재빨리 주문. 봄을 기다리는 동안 두껍고 두꺼운 책을 하나씩 깨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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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09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보다 으스스한 추위를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에요. 어제 4도라고 하더니 나가니 바람 불어 춥더라구요.
오늘도 기모 청바지에 패딩 입고 나갔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데우시고 뜨거운 물을 부어주세요. 감기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이제 막 들어왔어요. 1부, 2부, 3부 마치고 왔고요. 오늘 대망의 4부 마치고 나서 글 쓰는 단발머리로 돌아오겠습니다!
계속 데우고 있어요!!

수이 2024-02-11 08:38   좋아요 0 | URL
저도 기모 청바지에 패딩 입고 외출할 준비 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노노. 그저께 어제 고생하셨으니 오늘 해피 모드로 푹 쉬시기를 바랍니다. 아 일요일이네! 오늘까지 고생하시고 내일부터 푹 쉬세요!

hylaw2 2024-02-19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좋네요. 이 글 제목을 인용해서 저도 블로그 한편 올려야 겠어요. 작성하면 공유해 드릴게요.

수이 2024-02-19 17:04   좋아요 0 | URL
작성하시면 보여주세요! :)

steal0321 2024-02-2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힘이 강해요. 봄은 부드럽고. 제가 참가하는 독서모임에서 소피의 세계 함께 읽기가 계속 언급되어도 시큰둥했는데,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라니, 흥미가 올라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이 2024-02-21 20:25   좋아요 0 | URL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도, 소피의 세계도 모두 좋아요.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은수달 2024-02-2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피의 세계가 만화로도 나왔군요! 꼭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수이 2024-02-28 08:14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하시길 바랍니다 은수달님 :)
 















마음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중년에 대해서 중얼거리고 있노라니 열여섯 딸아이가 가소롭다는듯 웃으며 기어코 한마디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집에서 주인공들이 대부분 중년이야. 얼마나 쓸쓸하던지. 청춘도 아니요 노년도 아니야, 이도저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경계. 그 경계선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 너무 쓸쓸해. 간단하게 소감을 말하니 아이는 푸후후후 웃었다. 왜 웃냐_ 묻지는 않았다. 웃기시겠죠, 님 보시기에는. 열일곱 영혼이 지금 무슨 중년 이야기를 같잖게 하고 있냐, 지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말하지 않아도 아니 다행이다, 엄마야 라고 딸아이가 말했다. 하지만 열일곱이라고 해도 쉰이 가까워오는 육체를 지니고 있고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변명조로 대꾸하니 아이는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성이 좋은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모든 불행을 겪어도 끄떡없이 열일곱일 수 있는 거 아닐까? 미숙한 중년이라고 봐야 할까. 욕심은 콧구멍 언저리까지 그득 차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어마무시한데 숨이 깔딱깔딱 거릴 무렵이면 아 별 거 아닌데 이러려나. 혼자서 볕 좋은 도서관 벤치 지정석에 앉아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중년이 되어 바라보는 저 너머는 대개 과거와 미래 그 풍경 속 애매모호한 시간대의 세계다. 소설 속 등장 인물이 이야기한다. 



"이게 나라니 믿어지니? 마야는 썼다. 내가 얼마나 평범해졌는지 봐. 그 옛날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63) 



원하는 자아상이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 청춘이 한창일 때는 중년 무렵이 되면 이렇게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바 꿈꾸는 바, 하지만 막상 중년이 되고 보니 어리둥절하기만 할뿐이다. 정독도서관에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열일곱부터. 휴대폰 녹음기를 켜고 중얼거렸다. 열일곱에서 바로 며칠이 지난 거 같아. 이렇게 여기에서 고등학생 때 혼자 바람을 쐬러 나와 발목을 까딱거리며 눈을 쉬어주곤 하던 그 공간은 그대로인데 나만 갑자기 30년 이상 늙어버렸다는 게 신기하기만 해. 믿기지 않아. 중늙은이가 되어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리는데 정말 그대로야, 30년 시간이 느껴지지 않아, 며칠이 지난 거 같아. 그런 느낌이야. 라고 말을 했다. 친구들은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미친듯 하며 얼굴에 보톡스나 필러를 넣고 비싼 돈을 들여 리프팅을 하며 젊음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도 늘어간다. 완경이 찾아왔다는 친구들도 서서히 생기고 호르몬 변화로 인해서 불면과 우울증이 찾아오면서 괴로워하는 이들도. 어쨌거나 젊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잘 늙을 것인가. 미를 넘어서서 이제는 노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자유로울 줄 알았고 어른이 되면 다른 이들만큼은 살아야 하니 평균 이상이 되기 위해 애쓰고 청춘이 흘러 중년이 되면 좀 편해질 줄 알았건만 결혼을 하건 결혼을 하지 않건 무관하게 그닥 자유로워보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보통 이상, 그래야 평균이고 그래야 평범한 건데 그조차 지키기 쉽지 않다. 나는 이미 그 평균, 그 노선을 탈피했다. 그러니 대한민국 중년의 평균, 그 이하라고 봐야 한다. 서글프거나 괴로운 부분은 없다. 마지못해 그랬다면 또 괴롭고 서글퍼 흑흑 눈물 방울을 떨굴지도 모르지만 뭐 그닥. 노년을 대비하는 중장년이 된 동년배들과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아직도 왔다갔다 갸우뚱거리는 나는 딸아이 말대로 몸만 늙은 열일곱이긴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다. 하루에 한끼는 제대로 먹지만 두끼는 좀 부실하다 싶을 정도로 먹는다. 몸이 이미 그에 적응이 되었고 두끼를 제대로 먹으면 속이 좀 더부룩한듯해 평소보다 더 움직인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으니 이제 하루에 만보 이상은 걸어줘야 한다. 팔다리를 수시로 휘두르며 엉뚱한 쿵푸 자세를 취하면서 거울 너머로 웃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깔깔거린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책에 고개를 파묻지 않으려 애쓰고 명상이란 걸 좀 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잘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정 보고 싶은 이들이나 보자고 하는 이들이 있으면 약속을 잡는다. 술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 마시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혼자 와인이 땡길 때는 와인잔을 찬장에서 꺼내 화이트 와인을 담아놓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니나 시몬의 목소리나 빌리 할리데이 목소리나 엘라 피츠제럴드 목소리를 틀어놓는다. 사람들은 나를 괴롭힌다. 왜 괴롭히는지 그 까닭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래서 귀찮고 성가셔 인간관계는 더 좁아지기만 한다. 언젠가 딸아이와 딸기케이크를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마 엄마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그닥 많지는 않을 거 같아. 하지만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가 사랑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조촐한 장례식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아. 노년을 대비하는 것도 모잘라 장례식 풍경까지 미리 구상해놓는다. 딸아, 엄마 장례식에는 한쪽에서 재즈 음악이 나와도 좋을듯해. 그리고 국밥 같은 건 하지 말고 핑거 푸드로 간단한 먹거리만 준비해줘. 소주와 맥주 그리고 와인도 준비해줄래? 했더니 장례식이 파티야? 파티니? 그래서 깨갱했다. 깨갱하면서도 적당히 슬퍼해줘, 적당히 애도하면 돼. 과하게 슬퍼하지도 말고 쓰러질 것처럼 울지 않아도 돼. 마음 속으로 그렇게 나머지 못한 말을 이어서 했다. 그리고 또 종알종알, 죽을 때까지 열일곱이면 좋겠다. 명징한 정신으로 아 나는 열일곱인데 이렇게 몸이 늙어버렸네,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이제 더는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겠네, 투덜거리면서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간다면 유쾌하겠구나. 아 너무 갔네. 하지만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제목은 [사라진 것들]이다. 중년이란 시기 자체가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갑자기 확 찾아오지 않는 나이도 아닌지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 언제 중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이제 너희는 중년이야, 여기 이 라인에 서도록 해, 지시를 할 때부터 중년이 되어버린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 방황하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와중이지만 한편으로 그 방황이 다른 컬러를 지녔을 뿐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서글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파편들, 살아가기에 살아가고 있기에 살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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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09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중년이란..
저도 이책 읽고 아 중년이다...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마음은 젊은데 외모부터 주위까지 다 세월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어서 좋았던 책~!!

수이 2024-02-11 08:40   좋아요 1 | URL
현실은 직시하고 싶지 않아도 항상 알려주는 거 같아요. 왜 젊을 때보다 중년이 더 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끝없는 중년의 활동들....... 그 와중에 아 중년! 정말 새파랑님 말씀대로 그걸 깨닫게 해줘서 소중히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