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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늙어간다는 것 - 80대 독일 국민 작가의 무심한 듯 다정한 문장들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유영미 옮김 / 북라이프 / 2025년 5월
평점 :

유치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나는 항상 달리기에서 꼴찌를 도맡았다. 100미터에 24초. 100미터에 14초 기록을 달성한 육상 선수를 준비하는 친구와 나란히 비교되곤 했다. 꼴찌와 1등은 언제나 서로 비교대조군이 되는 법이니까.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80키로 거구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고 기분이 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마주하니 30년 만이다. 몸에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던 그 아이의 고등학생 모습과 겹쳐져.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로구나 싶었다. 숨쉬기 운동만 하면서 체육 시간이면 진저리를 치던 교복을 입고 항상 뚱하게 있던 시니컬하고 뚱뚱한 내 얼굴도 겹쳐졌고. 40년 동안 60키로를 잘 유지했는데 갑자기 늙는 동안(이라고 하지만 10년 동안) 10키로가 확 찐 까닭을 찾을 수 없노라고 작가가 이야기한 구절에서 언니, 운동을 안 하셨네요_ 라고 속삭였다. 동생과 통화를 하는데 언니 나 살쪘어, 갱년기 온 거 같아, 잠도 하나도 안 와, 막 먹어, 우울해, 라면서 고통을 호소하길래 운동해, 라고 단칼에 이야기하는 내 입을 보면서 운동이 모든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닐 텐데_하기도 했다. 본가에서 유일하게 어릴 때부터 운동하던 막둥이가 얼마 전, 이혼녀는 그래도 운동을 꾸준히 해서 마음이 놓이는데 작은 누나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아 걱정이다, 늙어서 고생 엄청 할 텐데_라고 했다며 엄마가 빙수를 드시는 동안 이야기했다. 앞으로 40년 동안이라. 꾸준하게 몸을 움직이고 뇌를 움직이면 40년은 거뜬하게 삶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욕심을 내면 50년? 삶의 만족도와 행복이라는 면모에서 따지자면 나이 오십이 될 즈음이라면 무슨 일을 할 때 누구를 만날 때 어디를 갈 때 행복한지 만족도가 올라가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영혼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한층 낮아진 까닭은 내 안에서 찾을 일이고.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달리 나는 이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현상 그대로. 어차피 그 모습이 신기루라고 한다면 허황된 거고 실체라면 그곳에 존재하기 마련인지라 더 이상은 영혼 같은 거 그닥, 이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니 나이를 먹고 유물론자 속성이 더 강해졌다 볼 수 있겠지.
애플힙을 가지면 나이들어 유용하대, 고생 덜 한대, 엄마_라면서 딸아이가 이 살덩이를 모두 근육으로 만드는 거야, 라고 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뒤에서 말랑말랑 몰랑몰랑,이라며 엉덩이를 조물락거리며 웃겼다. 어제 원장님이 타고난 피지컬, 3년 꾸준히 하면 된다, 라는 말을 옷 갈아입는 동안 하셨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도 체육 선생님에게서 그 말 들었다. 타고난 피지컬에 안에는 온통 솜덩어리.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보며 모두 각자만의 생각을 투영하는구나.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기분일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너는 이렇네, 너는 저렇네, 하고 지레 짐작하고 지레 판단하고, 보이는 그대로 그 모습을 보고 짐작하고 판단하는 건데 뭐가 틀린 거냐고 물어본다면 물론 옳고 틀린 제한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설거지 다 하고 빨래 너는데 아이가 엄마 근데 새아빠가 운동 안 하는 뚱뚱이면 어떻게 할 거야? 물어봐서 네 새아빠가 운동을 안 하는 사람은 아닐 거 같은데? 하니 그래도 만일 그러면! 물어봐서 음 데리고 달려야지, 아니면 요가를 같이 하러 다니든가, 뚱뚱해서 옆에 데리고 다니는 거 별로, 라고 말하고난 후 아 난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알았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다른 인간이 되어버렸구나. 새로운 사랑을 꿈꾸기에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아예 그쪽 영역에 해당되는 게 제로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뻔한 거짓말. 가능하면 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랑의 행위를 하며 노년을 누려야겠다라는 플랜은 갖고 있으니까. 나이 쉰이 되어 섹스리스의 삶을 가지게 된다면 섹스에 그닥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가능하면 오래 더 자주 향유하고싶다는 플랜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저절로 뭉크의 절규와 동일한 포즈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키케로는 말했다. 욕망이 덜 하다면 그로 인한 결핍감도 거의 느끼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이런 식. 욕망을 더 느끼는 자들은 그로 인한 결핍감이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하고. 개개인의 얼굴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개개인의 욕망의 크기 또한 다르다. 여기에 어떤 기준점을 두는 것만큼 우스운 일 또한 없고. 친구와 나의 30년 전 청춘의 한창때 육체와 중년의 최고봉에 다다른 지금의 몸을 겹쳐보니 시간과 흔적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몸에 나이테를 두르며 새겨진다는 사실. 어느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한가_따위의 잣대는 필요하지 않다. 각자가 택한 순간들로 이루어진 과정이고 결과물이니까. 삶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 눈빛과 그 표정과 그 몸짓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체성이라는 거. 어떻게 살아가는가_가 노년의 많은 것들을 좌우하겠구나. 상투적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지만 삶은 온전하게 나만의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의도치 않게 상투적으로 흘러갈 수도. 거기에 내 뜻이 있다면 뭐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눈치 보고 사느라 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은지라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이게 더 유독 강한듯. 몸을 믿기로 한 것이 숨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걸 영혼과 결부시켜서 요가 철학에서는 논하는 건데 당분간은 그쪽으로 들춰볼 생각은 들지 않아서 숨과 몸에 집중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