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경을 읽는 이들이_ 불경까지는 아니어도 붓다 말씀이 적힌 이런저런 대중서들을 읽는 이들이 주변에 꽤 늘어가는 건 어떤 현상일까 싶다. 번뇌를 다스리는 게 그 순간은 가능할 터인데 페이지를 덮고난 후에도 그 번뇌가 잘 다스려지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질문을 한 적 있는데 언젠가 스님은 그 순간이야 다잡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다 그렇게 다잡혔다면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겠냐고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다잡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갸륵해서 말없이 바라보고는 있지만 순간 무너질 걸 아니까 또 말없이 바라만 보고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불경은 읽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 내 안에 번뇌가 소용돌이치는 순간들이 극히 적다는 반증인 거고. 민이가 상담 중에 너털웃음을 짧게 지으면서 불경 하나 챙겨서 가야겠네요, 마음 수양 꽤 하려면, 이라고 대꾸해서 원장님도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레이첼 야마가타의 옛 노래를 우연히 접하고 찾아 들었다. 스무살 즈음에 자주 다니던 소프트 락부터 시작해서 정통락까지 자주 틀어주던 술집 사장님과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쳐 실례를 무릅쓰고 가서 아는 척을 했더니 정말 사장님이 맞았다. 이제는 은퇴하시고 손녀딸 보살핀다고 하셨다. 하긴 내가 쉰이니 사장님 연세를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그 즈음 이실듯. 그 연세에 롤링스톤즈 앨범 커버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인물이 흔하지 않으니 알아보기도 알아보았지만. 록산 게이 책이 나왔고 주디스 버틀러가 개역이 되어 나왔다. 학원 가기 전에 친구에게 책 좀 보내고 의도치 않게 운동을 사흘 쉬어야 해서 간만에 여유가 생겼다. 벽돌책 들고 나가서 읽어야겠군. 슬슬 집을 찾아보고 있다. 온라인으로 대략 분위기라도 알고 싶어서. 평수는 작어도 해가 잘 드는 곳으로. 몇 군데 알아보고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계약하기로. 이 나이에 방 하나 없이 지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뭐 민이 방 주고 나는 거실에서 룰루랄라 온갖 비밀을 만들기로. 어제는 길을 걷다 꽃을 사고 싶었는데 곧 짐 옮겨야 하는 처지에 가당치 않다 싶어 이사하고 사기로. 아이는 당근으로 이것저것 소소한 자기 물건들을 팔아치우고 있다. 나도 좀 팔아보려고 뒤적여보았는데 책 말고는 물건이 하나도 없더라. 아이구, 이 여자야, 이제 옷도 좀 사고 그래보자, 라고 스스로 헛웃음. 같이 수업을 듣는 여대생들 중에 모태 솔로가 둘 있는데 언니, 연애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라고 물어봐서 말했다. 연애를 막 많이 하면 돼. 라고. 그랬더니 둘 다 까르르르 웃으면서 연애를 막 어떻게 많이 해요! 한 번도 못했는데! 라고 그래서 글을 잘 쓰려면 편지를 많이 쓰고 일기를 많이 쓰면 돼, 그럼 어느 순간 글을 잘 쓰게 돼. 그러니까 진심을 다해서 솔직하게 내 마음을 페이지에 활자로 새겨넣는 거지. 연애도 비슷할 거야, 일단은 플러팅이지. 라고 했더니 둘 다 눈빛이 반짝반짝거려서 귀여워서 다들 머리 쓰다듬어주었다. 귀여운 것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쪽팔려서 미리 입 못 여는 게 한국인 특징이잖아,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말하려고 머릿속에서 난리법석, 그렇다고 해서 만든 문장이 완벽한 문장인가 싶으면 아니야 또. 그럼 또 좌절해요. 그럼 또 침묵하고. 그게 한국애들 가장 큰 특징인데 물론 어렸을 때 나도 그랬고_ 그냥 열어 입을. 실패해도 괜찮아, 쪽팔려도 괜찮고. 그런데 뭐 아주 처음부터 완벽한 연애를 한다고 투철하게 준비를 하시는데 그런 식으로 하지 마. 그냥 깨질 거 각오하고 으스러질 거 각오하고 실패해도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 죽지 않아, 아무리 사랑했다가 헤어져도. 언니가 해보니까 알겠더라. 안 죽어. 그러니까 해, 연애. 하고 싶으면 해. 더불어 오픈 유어 마인드, 오픈 유어 아이즈, 오픈 유어 이어즈 앤 voilà, 오픈 유어 바디! 했더니 선생님이 아주아주아주! 하시더니 엄청 웃으셨다. 몸과 마음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겁니다, 선생님, 그 무엇이 처음인지는 모르겠으나. 라고 말하고 또 잠깐 그의 말이 떠올랐으나 그것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이들 충격 받을까봐. 어느 일러스트레이터가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 그 아래 코멘트를 달았는데 다른 이들이 댓글 단 거 보니까 아니야, 너, 그거, 너 그거 틀렸어, 네 마음 그거 틀린 거야, 라고 가스라이팅하는 늙은 여인들 많더라. 각자 다른 거고 각자 달리 사는 거지, 뭘 또 그렇게 틀렸다고 난리법석일까, 이 언니들은, 싶었다. 니네나 잘 살아, 그렇게 니네 말이 옳으면, 라고 댓글 달까 하다가 관뒀다. 속으로 Peace, 하면서. 암튼 여왕벌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구만. 오프나 온라인이나. 조용히 납작하게 엎드려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조용히 운동하고 책 읽고 맛난 거 사먹으면서 존재감 없이 살아야 돼, 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있다.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불확실하니까. 이사하면 꽃 사야지. 점찍어둔 와인도. 해상도에 대해서 그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책과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_ 아무리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선생님들에게 많이 배우고 그래봤자 당신이 삶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겨우 그 정도라면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 라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다이렉트로 했으니 그가 상처를 받았으리라, 싶은 건 나중에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그 입술을 바라볼 때였던 것도 같다. 삶의 해상도를 달리 만드는 사람을 만나봐, 내가 바라보던 그 해상도 그대로 말고 높이거나 낮추거나 그와 무관하게 말야. 관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꼰대 같다 느껴서 방금 내가 말한 건 꼰대 같았어, 인정해.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파서_ 라고 덧붙였다. 봄에 가장 먼저 출국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아빠언니오빠 다 없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공부 말고 딴 것도. 말하고나니 아 내가 얘 엄마뻘인데 하고 막 웃었다. 이 아이 엄마가 나보다 두 살 더 많은데 그 언니가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알면 나 죽이려 하겠군 싶어서 또 키득키득.
친구가 릴리 킹 계속 이야기해서 내가 11월에는 책 안 산다, 이사 전까지, 했다가 결국 질렀다. 읽어야지. 개인적으로는 가운데 원서 표지가 마음에 드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