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겪으면 겪을수록 좋은 건 한결 낙천적이 된다는 거다. 나이 많은 이들이 더 천천히 스무스하게 움직이는 건 다 까닭이 있는 것. 작가가 너무 무거운 작품을 쓰다보니 가벼운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썼다는 게 웨딩 피플인데 이 책이 앨리슨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다. 그러니까 100만 명이 읽었다는 거지. 표지만 봐서는 가볍기 그지 없는 서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뻔하지 않아 더 눈에 쏙쏙 들어온다. 한역본이 벌써 나온 줄은 방금 전에 알았다. 아직 초반인지라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감정선이 분출되어 오열했다. 왜 오열했는데? 하면 고양이가 죽어서...... 와인이 급땡기는데 와인이 없어서 몽쉘과 흰 우유를 그득 따라 마시고 아사나를 좀 하고 자야겠다. 아 댈러웨이 부인, 댈러웨이 부인 이야기가 소설 곳곳에 나온다.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버지니아 울프에게 처음으로 호기심이 제대로 일어서 읽어야지, 하고서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난 후에 읽었다는 것만. 그러고 보니 버지니아 울프 완독한 작품이 그닥 많지 않다는 사실도 웨딩 피플 읽다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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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6-08-1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지금 웨딩피플 낭독모임으로 읽고 있어서 반갑습니다. 문학 이야기, 울프 이야기 많이 나와서 좋더라고요. 작가의 다른 책은 안 찾아봤는데, 찾아봐야겠습니다.
 


 




아직 가을은 아니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 조금 더 남아있는데 자꾸 가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까닭은 이른 새벽과 초저녁부터 부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짐승처럼 그르렁거리게 되는 저절로. 옥시토신 덩어리에 불과한. 태어나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러니까 그저 덩치 큰 옥시토신 덩어리에 불과한 게 요구하는 바가 많구나, 그런 뜻으로 그는 말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몸은 가을인가 분명 아직 여름인데 왜 자꾸 가을이 되면 달라지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이상하네_라고 반응을 하고 그렇다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읽게 되는 그 루틴이 다시 시작되는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그 삶의 방식이 가을, 삐용삐용 아직 가을은 아니지만 곧 가을이 다가오니 삐용삐용 이제 가을맞이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삐용삐용 뇌에서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이 오면 많이 먹고 읽고 잘 잤다. 조금 더 기억해봐, 그러니까 교복을 입기 시작하던 때, 그렇다면 중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한창 못생기기 시작한 나의 사춘기 타이밍.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지고.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배불리 먹고 그러하니 좀 느긋해지도록 하자, 라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품지 않아도 좋구나, 룰루룰루, 이런 마음이 저절로 만들어져 빙긋거리며 자주 웃게 되는. 그러니까 가을이 오면 조금 넉넉해지기 마련이다.

친구 생일을 맞아 만났는데 생일선물은 건네지도 않았다. 가을이 되어 만나요, 라는 말만 달랑 해놓고. 인간을 사랑하고 더불어 함께 포옹하고 살결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마주한다는 건 대체 뭘까. 함께 섹스를 할 수는 없지만 섹스에 대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귀하다는 사실을 오늘 다시 알았고.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불륜과 결혼과 이혼과 재혼과 또 다시 이혼과 삼혼에 대해서 농담 섞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 이야기를 오랜만에 하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를 마음에 담아두었는지 스스로 알았다. 때로는 이게 집착인가? 사랑인가? 그냥 몸정인가? 알 수 없어 헷갈릴 때 있었으나 그게 무엇이든지 그 시간과 그 사람이 그때의 내게 필요한 건 맞았으니까 별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시간이 이렇게 흘러 가능한 일이겠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언젠가 아마도 작년 가을쯤이었던 것도 같고 용하다는 곳이 있어서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본인이 삼혼을 해야 하는 건 알죠? 라고 해서 그럴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삶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다고 답했다. 쿨해서 좋네, 라고 했고 쿨해서 싫다는 놈들도 많아요, 라고 말하니 크득거리며 웃었다.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하는, 평소에 거의 입을 대지 않는 탄산을 엄청 마셨고 거기에다 맥주도 마시는 바람에 운동은 쉬기로 했다. 밥이 이슈래 밥이, 라고 친구는 진지하게 걱정했고 밥은 그 후야! 뉴욕이 먼저고 밥은 그 후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정말로 뉴욕에 있는 남자가 실제 인물로 다가왔다. 그냥 저쪽 세상에 살고 있는 셀로판지 인형처럼 무게감이 가벼웠는데 어쩌면 그러할 수도, 라는 느낌이 왔다. 어제는 새벽에 한 번만 일어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눈은 뻑뻑했고 목은 금세 타들어갔다. 어제 수련을 하는 동안 과한 후굴을 하는 바람에 엉덩이 근육이 딴딴해져서 계단을 올라갈 때 힘들어했다. 만져줄 수는 없지만 뚜드려줄 수는 있어, 라면서 친구가 엉덩이를 콩콩콩 두드려줬다. 29금 드립을 날릴까 하다가 참고서 후후후 웃었다.

올해 남은 시간과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할 일들과 하고픈 일들 이야기를 했다. 정말 뉴욕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내 곁에 서 있을 사람이로구나 알았다. 친구와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 들러리로 내 옆에 서있을. 친구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돼지잖아! 다이어트할 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럴 때 언제나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 돼지처럼 나온 게 아니라 돼지가 되어서 돼지처럼 나오는 거야,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라고. 옛날 애인이 다른 저자들과 함께 알라딘에서 북펀딩을 한다고 하더라, 했더니 친구가 웃긴 소리로 피드백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따땃해져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귀에서는 Beck이 흘러 들어오고 늦여름 저녁 공기는 아직 뜨끈뜨끈하기만 했다. 그렇게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거, 이것도 이미 본인이 알고 있는 거 알죠?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알지만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아요, 비탄 어린 절망에 하염없이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일 같은 거 일생에 한 번이면 족한데, 이번에 또 겪고 아 정말 이런 일 그만 하고 싶다 싶어요, 라고 명리학 서적이 그득한 책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분간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두 발 뻗고 편히 자요. 라고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으니까 당분간 그런 마음 고생할 일 없으니. 그때는 나도 모르게 아휴, 정말 고마운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고 두 손 모아 진심으로 인사했다. 불행을 원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해탈을 원한다는 건 결국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고통을 끝내고자 해탈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랜만에 읽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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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허라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 나는 두 종류의 치욕을 경험했다. 선택받는 치욕과 계속 앉아 있는 치욕. 그래, 사제가 되리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26)















두 가지, 그러니까 선택받는 치욕과 계속 앉아 있는 치욕.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도 안 되고. 하지만 계속 있어온 일. 이 주체성이 유별나다 싶게 태어난 별 위에 새겨진 인간일 경우 삶은 고달퍼지기 마련이다. 나혜석 언니가 순간 떠올랐다. 자존심 높게 세워봤자 네 신세만 고달퍼질 일이다, 라는 말을 누구누구한테 들었는지 헤아린 적 있다. 여왕이 되거나 걸인이 되거나 시체가 되기 마련이다. 애매하게 위치를 잡으면 애매하게 살아갈 확률은 그만큼 더 높아지는 거고. 계속 앉아 있다는 건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한 일인가. 세상은 드넓고 싸돌아다닐 곳은 이렇게나 많은데 만나야 할 이들도 많고 할 일은 더 많은데.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편하게 살 수 있잖아, 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편하게 살 수 있어, 라고 하얀 날개를 단 내 분신이 날개를 부산스럽게 파닥거리면서 말했다. 가만히 있기 싫어, 편하게 산다는 건 어떤 건데? 대체? 라고 붉은 날개를 단 내 또다른 분신이 펄럭거리면서 말했다. 둘 다 꺼져,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라고 말하고 두 날개가 없는 걸 아쉬워하면서 미친듯 걸어다녔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어쩌면 시간은 이토록 빨리 흐르는 걸까. 카산드라를 펼쳐서 아침에 운동을 하러 가기 전에 잠깐 읽었다가 마주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선택을 하는 건 내가 되어야만 해. 선택을 받는 입장이라는 건 너무 끔찍해. 쥐죽은 듯 가만히 있어도 보았다. 그리고 남은 생의 나날들 햇수를 대충 헤아려보았다. 사십대 후반이니까 대략 마지막 숨을 헐떡거릴 날이 99세라고 칠 경우 남은 건 오십여 년. 헌데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고? 싫어. 단호하게 싫어, 라는 대답이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이건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내가 봐온 타인들의 다양한 삶을 헤아릴 때부터였던 것도 같고 머리가 커지면서 찾아서 읽게 된 수많은 책들에서 봐온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고 만나서 함께 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영향일 수도. 싫어, 나는. 엄마 승용차 안에서 그냥 살아, 라고 엄마가 말했을 때 싫어,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 딸에게 그냥 살아, 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내 딸이 커서 성인이 되어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라고 말하는 걸 듣지 않을 거야. 나는 엄마처럼 살 거야, 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야. 덧붙여 말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엄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엄마가 생각하는 행복과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다르다고는 여기지 않아. 하지만 행복에는 다양한 무게가 있기 마련이고 나는 엄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복이 이 경우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위선적으로 살지 않을 거야. 지겨워, 이렇게 사는 거. 지겨워서 미칠 거 같아. 이건 내 삶이 아니야. 내 인생이야.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해. 엄마한테 말한 건 엄마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 거지 엄마 말대로 내가 살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난 더 이상 엄마 말을 잘 듣던 말이 적고 조용하고 착한 딸이 아니야. 그런 건 어릴 때부터 지겨웠어. 엄마의 착한 딸 노릇을 하면서도 지겨워,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이런 가면 놀이는.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열넷 더 이상 난 엄마 말 듣기 싫어,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라고 했을 때 엄마한테 두들겨 맞았던 때가. 내 몸이야, 더 이상 때리지 마. 내 몸은 소중해. 라고 말했다. 엄마는 혈압이 올라가 뒷목을 부여잡고 당장 나가, 라고 소리 질렀고. 나는 정말 나가려 했었고 동생들은 내 사지를 붙잡고 울었다. 그날 밤에 엄마가 이제 우리 착한 수연이는 없어, 머리가 커버렸어. 말하니 아빠는 껄껄 웃으면서 고 얌전한 것이 대들기도 하고 정말 컸네, 커버렸어, 라고 말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나는 클 거야. 쑥쑥 자랄 거야. 더 많이. 잠결에 그렇게 다짐했던 기억도. 아빠, 나는 더 클 거야. 그래서 내가 선택을 할 거야. 두 다리에서 힘이 풀려 더 이상 걸어다닐 수 없을 때까지 힘차게 걸어다닐 거야. 선택을 받는 것도 가만히 안온한 곳에 앉아 있는 것도 이제는 하지 않아. 하라는 대로 해, 그냥 있어, 좀 조용히 가만히 있어, 그럼 편해지잖아, 다른 여자들이 사는 것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고생길을 자처해, 라고 엄마가 거듭 당부할 때도 싫어, 더 이상 치욕스럽게 살지 않을 거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데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연기하는 짓도 이제 지쳐. 더 이상 안 해. 빛 속에서 살 거야. 했다. 온실 안에서 가만히 자라. 주는 그대로 받아 먹고 주는 그대로 받아서 소중히 여기며 살면 돼. 엄마의 강한 보호 본능, 그리고 뒤이어 그 보호 본능이 계속 이어진다는 걸 알았다. 싫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주지 않을 거야, 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 그걸 주지 않겠다고 하는 건 무슨 뜻이지? 계속 생각했다. 네가 원하는 걸 줄 수는 없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걸 줄 수는 있어. 그럼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면서 살아가면 돼. 그게 네 운명이야.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이야기한다. 엄마고 아빠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애인들도 다. 아니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받을 거야. 그걸 줄 수 없다면 그건 내게 필요 없는 거야. 그런데 왜 내게 그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거지? 웃기는군, 한참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나니 모든 것들이 환하게 보였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그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람이 왜 가만히 있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라고 했을 때 미친듯 소리를 지르면서 더 이상 그런 짓은 안 해, 불길이 내 살에 닿아 살갗을 지글지글 타오르는 느낌과 똑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아, 왜 그랬는지 다 알겠네. 순한 얼굴 너머로 내 두 눈이 무엇을 다 볼 수 있는지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히려 덜 떨어진 사람 취급을 하면서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라고 할 때 내 뼈들이 덜그럭거리며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그 소리를 들을 길 없는 이들은 언제나 말한다. 하라는 대로 해,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편하게 해줄 테니까. 가만히 웃으면서 속으로 답한다. 너나 가만히 있어. 나는 나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려고 이때까지 참고 살아왔어, 라고. 분노의 지점들은 언제나 한결같다. 언제나 거기였구나. 가르치려 하지 마. 너나 가만히 있어. 바로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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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8-12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4도, 35도, 36도의 뜨거운 서울의 열풍이 느껴지는 뜨거운 글이네요. 말 잘 듣는 착한 딸아이의 선언에 어머니는 많이 놀라셨을 듯.
그 때도, 지금도... 수이님은 뜨겁네요.

책읽는나무 2026-08-13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뜨겁기도 하고 그리고 더 단단한 사람이기도 한 사람.^^
 
맨발의 겐 2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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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 2권을 다 읽고난 후_ 제일 인상적인 대목은 복숭아 관련 에피소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부여안고 자 아가 엄마가 너 좋아하는 복숭아를 이렇게 가져왔단다, 먹어보렴, 하고 껍질도 까지 않은 복숭아를 아들의 시체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장면. 수많은 파리떼들을 쫓아보내려는 겐을 막으면서 하지 마라, 이 파리떼가 내게는 죽은 아들의 혼처럼 느껴지니, 라고 말리며 여성은 복숭아 하나를 겐에게 내민다. 고맙구나 먹으렴, 하고. 허기에 당장 그 복숭아를 입 속에 넣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참으면서 우리 엄마 갖다 줘야지, 우리 엄마 이 복숭아 먹으면 젖도 생길 테고 그럼 이제 막 태어난 내 여동생도 배불리 젖을 먹을 수 있으니, 라고 겐은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우연히 죽은 친누나와 닮은 이를 만나 누나 누나 반가워하다가 친누나가 아닌 걸 알아챈다. 아 맞아 내 누나는 내 눈앞에서 불타 죽었지, 하지만 친누나와 너무 닮은 모습에 아픈 소녀를 외면하지 않고 데리고 구호소까지 간다. 물을 간절하게 찾는 소녀에게 잠깐 주저하다가 누나 물 대신 이 복숭아라도 먹어요, 라고 복숭아를 내민다. 소녀는 고마워하며 복숭아를 감사히 먹는다. 엄마 줘야 했는데 하지만 이 누나도 목말라하니. 아직 2권까지만 읽었으나 비정한 이 세상, 비정한 이 세상 사람들, 이라는 어린 겐의 한탄 어린 말이 자주 나온다. 비정한 이 세상에서 겐은 다정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겐을 살려주는 이들도 낯선 다정한 이들이다.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어마어마하게 생기고. 그 고아들은 자기네들끼리라도 살아보겠다고 뭉쳐서 떼거지로 다니며 힘을 행사한다. 달구지를 끌고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길을 떠나는 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고아들은 중얼거린다. 좋겠다, 네게는 엄마가 있어서. 그러니까 다시 복숭아. 사랑을 많이 받고 살면 사랑을 많이 주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동생 진이와 자주 하곤 하지만 기질도 한몫 한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허기에 내 배와 등이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는 지경에 얻은 복숭아를 다른 이에게 선뜻 내밀 수 있는 성정이라는 건 어떤 건가 싶어서. 효자 겐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스승이 떠오르는데 스승도 어머님에 대한 애정이 그득하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삶이지만 내 엄마를 위해서 수천 번, 수만 번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어, 라는 말이 꽤 인상 깊어 엄마에게 그 말을 한 적 있다. 물론 아내에 대한 사랑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겠지만 내 엄마를 위해서 수만 번, 영겁의 시간 동안 비천한 인간의 삶을 굴레처럼 보낸다 해도 그럴 수 있어, 라고 한다면 역시 어머님에 대한 마음이 제일 깊은 게 아닐까 싶다. 모두 다 같은 사랑이고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유일한 사랑은 유일하고 가장 지극한 마음은 오직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나의 스승이 그리워지는군. 다시 겐에게로 돌아가서_ 계속 읽어보고. 5년 전 이맘때에도 복숭아를 먹으면서 복숭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앤드레 애치먼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올해 여름은 나카자와 케이지의 복숭아, 비정한 세상 속에서 돌고 도는 복숭아, 분홍빛 사랑, 다정하고 그득해 바다처럼 넘실거려 사람들에게 정을 베풀면서 유쾌하게 삶을 짓누르는 고통을 과감하게 이겨내려는 겐, 이 아이가 낯선 이에게 내밀던 복숭아로 기억에 남겠군. 복숭아는 내게 삶을 가르쳐준다. 이 매개체가 남은 내 삶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기대된다. 달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과육을 내 입 속으로 집어넣으면 어느 것이 내 혀이고 복숭아인지 모르겠다. 마치 사랑하는 이와 키스를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거칠게 나를 안고 미친듯 입을 맞출 때 복숭아를 먹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혼자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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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8-11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금방 복숭아 일러스트가 담겨있는 음악을 유튜브로 틀어놓고 가만히 째려보다 점심으로 복숭아를 깎아서 먹었어요.(물론 배가 안 차서 다른 것도 더 챙겨먹긴 했지만요.^^)
그래서인지 복숭아 이야기가 있는 맨발의 겐 리뷰가 좀 더 와 닿네요.
복숭아는 결국 삶이자 사랑이었군요.

수이 2026-08-12 12:34   좋아요 1 | URL
납작복숭아가 그렇게 맛나다는데 아직까지 납작복숭아를 먹어보지 못한 1인은 아니 어떻게 복숭아를 점심으로 대체할 수 있죠? 언니,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발의 겐_은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안겨주고 있어요. 무턱대로 집어들었는데 이것도 선택인가 싶어요. 오늘도 복숭아 많이 드시고 다른 것도 많이 드세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복숭아를 먹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알았어요. 저는 초콜릿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

단발머리 2026-08-12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에는 그 달콤하고 야릇한 복숭아가 왜 도착을 하지 않는 건지요? 서울 성북구 ㄱㅇㄹ 00, ㄱㅇㄴㅌㅇ8단지. 보내주세요, 그 복숭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부모가 가스라이팅의 달인이로구나 그리고 그렇게 어린 시절 내내 듣던 말은 내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하는구나.

우리 엄마 같구만.

엄마의 신념은 나의 신념이 된다. 가장 가까운 이의 가스라이팅은 언제나 심장을 뚫고 들어와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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