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잔소리에 그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샤워를 하고 할 일 하고났더니 좀 나아졌다. 일기를 요즘 아침에 쓰다보니 항상 하는 이야기는 어제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제 극한 잔소리.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를 읽고난 후 클레어 키건을 읽을까 다자이 오사무를 읽을까 갈등하던 딸아이는 다자이 오사무를 택했다. 쎌 텐데_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몇 살에 읽었는데? 물어봐서 나는 열일곱인가 했더니 그럼 뭐 나도 읽을 수 있어 해서 엄마는 다자이 오사무 읽고 한동안 멍했어. 그래서 영향 꽤 크게 받았는데 민이는 어떨까 모르겠네 말하니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면 좋았다는 소리지? 좋았지. 그런 식의 삶이 있다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알았고. 니힐리즘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겠죠. 했더니 읽어야지, 두근두근_ 이라고 답하더니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니힐리즘이 맞던가 다자이 오사무가....... 읽은지 30년 지나서 가물가물하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면서 나는 엄기호 책을 꺼냈다. 클레어 키건이 왜 그리 좋았는지 아이가 물어봤을 때 고통을 나눈다는 건 삶을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 왜 사람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걸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엄마는 종종 그런 생각 자주 해. 왜 내게 사람을 보내신 걸까? 왜 그 사람에게 나를 보내신 걸까? 그런 생각. 소중한 이들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 자주 함. 더불어 인간은 인간 없이는 존재하는 게 불가능함. 다들 각자의 믿음과 생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거라 치지만 공동체에 대해서, 낙원과 같은 공동체와 지옥과 같은 공동체와 결국 그걸 판가름하는 건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어떤 믿음과 불신을 지니고 살아가느냐_ 그거일 텐데 클레어 키건은 그걸 명확하게 보여줌. 어려운 단어 하나 쓰지 않고.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도 더불어 하게 만들고.

아이가 곰곰 생각에 잠겨 심장과 뇌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때 이때가 나는 행복하구나. 아이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심장은 뇌가 돌아갈 때 더 가열차게 펌프질을 하는듯 싶다. 예를 들어 신세계에 눈을 뜰 때 말이다. 책이라는 신세계, 사랑이라는 신세계, 그런 것들.

어제 잠들기 전, 극한 잔소리를 폭탄으로 날리던 장본인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사랑해, 내 딸."

아이가 겨울방학을 잘 보내는듯 싶다. 선행을 최소 3번은 돌려야 한다고, 이번 겨울방학이, 바로 적기라고, 동네 아줌마들은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모임에서 말을 주고받았다. 중2 겨울방학, 하염없이 귤을 까먹으면서 제일 뜨끈한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미친듯 책을 읽기 시작한 기억. 그때 읽으면서 알았다. 책이 나에게 길을 보여주는구나, 나는 그 길목에 서 있구나. 나는 이제 책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인간이 되겠구나, 그런 것들. 활자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 알고 알고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부글부글 아랫목이 들끓는 것처럼 내 영혼을 지글지글 데피기 시작한 그때. 그러니 내 아이도 딱 이맘때쯤 책이라는 신세계에 눈을 뜬다면 좋겠는데 아줌마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 생각을 했다. 아이 입에서 박종대나 배수아나 카프카나 다자이 오사무와 클레어 키건 이름이 나오는 걸 멍하니 들으면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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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13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엄기호 한 권 밖에 안 읽었지만, 저 책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의 곁에 있자...... 수이님, 굿모닝!

공쟝쟝 2024-02-13 13:08   좋아요 2 | URL
저는 엄기호 책을 시중에 나온 것은 다 읽은 사람입니다만 (왜죠?) <고통..>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책예요.
영혼을 지글지글하게 데펴버린 책 읽기. 나는 그 지글지글 열독모드 35살쯤에 왔어요. 그러고보면 중2병이 35살에 왔던 걸까나. ......... (한숨)... 수이님 굿 앱터눈~!

단발머리 2024-02-13 13:10   좋아요 2 | URL
앗! 엄기호책 이렇게 많았네요. 그걸 다 읽었단 말입니까!! @@
저도 한 두권 더 읽어야지 했는데 가는 길에 또 훌륭하신 분들 몇 분 만나가지고 자꾸 미뤄지네요.
35살에 중2면 이제 곧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하는 중3? 파릇파릇 16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2-13 13:54   좋아요 1 | URL
저는 엄기호 누구더라 같이 누군가랑 쓴 책 읽었던 거 같은데 가물가물합니다. 이 책은 제 베프가 한동안 엄청 읽고 있을 때 오 나도 읽어야지 하고 구입하고 한동안 내팽개치다가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의 곁에 있자, 이 말 좋네요. 고통은 확 줄어들고 기쁨은 배가되는 거겠죠? 사람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게.

수이 2024-02-13 13:56   좋아요 1 | URL
중2병 쟝님이 오셨다 하니 영혼 나이 최고령자로 나오신 분이 하실 소리인가 싶습니다 푸훗, 날이 따스해졌다가 다시 추워졌다가 그러네요. 얼른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레알 중2가 유투브 보고 다시 한번 반하셨다고 합니다. 근데 조끼는 진짜 벗자, 이모...... 라는 말도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2-13 13:57   좋아요 2 | URL
저 조끼 이야기 한 4년은 간다.....에 500원 겁니다.






공쟝쟝 2024-02-14 16:55   좋아요 0 | URL
검색해봤는데 다 읽진 않았고 여덜권 읽었더라고요 (자진납세 ㅋㅋㅋ) 뭔 책이 왤케 많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