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세계 최고의 석학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일에 은근 자부심을 가진 당신은 언젠가 제게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왜 항상 이상한 책만 읽어? 음, 그러니까 처음에는 농담이려니 생각을 하고 빙긋 웃기만 했는데 뇌과학에 미쳐 그쪽 관련서와 불경만 읽어대던 당신이 두 번째로 이상한 책 읽고 있어, 라고 할 때는 아 농담이 아니구나 알았습니다. 내가 혹여 뭘 잘못했던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당신은 논문을 쓰는 게 아니면 항상 야동을 보고 있잖아,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음 이렇게도 저렇게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내가 친구들과 읽는 책이 왜 당신에게는 '이상한' 책이라고 여겨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그때 정이 확 떨어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정이 떨어진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읽는 책을 두고 나도 '이상한' 책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던가 곰곰 생각에 잠겼습니다. 당신의 이성은 뛰어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당신의 뇌가 갖고 있는 힘이나 당신이 떠받드는 카르마의 법칙은 논리적일지 모르겠으나 당신의 마음은 그렇게 뛰어날 정도로 선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그때 명확히 알게 된 거 같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전 여자친구들에게 잠자리가 끝난 후에 아이참 어여쁘다, 라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게 일종의 버릇이라는 걸 저는 어떻게 해서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가식적인 미소가 참 싫어서 나는 그냥 그때 나도 모르게 좀 비웃음을 흘렸던 것도 같습니다, 의도치 않게. 정확히는 다 같이 늙어가는 판국에 잠자리를 갖고난 후 아이참 어여쁘다, 라니, 너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으스스해서 내가 스무살도 아니고 서른살도 아닌데 같이 늙어가는 판국에 아이참 어여쁘다,라뇨. 아재, 그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비웃음을 흘렸던 것도 같습니다. 원조교제하는 열일곱짜리 소녀가 들어야 하는 말 아닌가, 아이참 어여쁘다, 라는 멘트는, 라는 생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혹시 이 남자가 원조교제라도 했던 경험이 있을까봐. 내가 읽는 책들이 참으로 이상한 책이라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열에 들떠 읽는 그 복잡다단한 책들은 이상하지 않은 책인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어 가만히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의 입술을 바라보았습니다.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이 인간이 술에 취하지 않은 평상시에도 커피를 마시며 주정을 하는 건가? 라는 마음으로. 일이 끝나고난 후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써도 되나? 물었더니 나인 것만 모르면 괜찮아, 라고 대답을 해서 속으로 다른 이들이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모를까? 물론 오롯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들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꽤 세세하게 당신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어느 선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건가 가만히 연필을 굴리다가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가볍게 5키로를 달리고 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나마 살았던 옛동네를 멀리서 바라보며 사진을 한 장 찍고 캔맥주를 하나 따서 조금씩 입술 안으로 흘려넣으며 딸아이가 귀가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저녁식사 준비를 천천히 합니다. 그 전에 잠깐 또 이상한 책을 조금 읽고 그래요, 저는 이상한 책을 읽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 야동을 보며 혼자 도파민에 젖는 인간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냥 계속 이상한 책을 읽으며 살래요. 야호. 당신은 논문을 쓰다가 야동을 보도록 해요, 논문을 쓴다는 것도 참 중요한 일이려니, 후학을 기르는 일도 참 중요한 일이려니 싶지만 나는 다른 이들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한 인간이 좀 더 좋더군요. 당신은 너무 가끔 잔인하고 너무 가끔 차가워서 무섭기도 했어요, 당신은 내게 무서운 여자, 라고 했지만. 그러하다면 이것이 우리의 전생이 지어낸 업보가 아니던가요,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이라고 이상한 책을 읽다 말고 생각해봅니다. 아 궁금한 마음에 구남친에게도 물어봤죠. 너도 그 나이에 아직도 야동 보니? 라고. 구남친은 나와 동갑내기. 그랬더니 머뭇거리다가 응, 보지, 가끔, 이라고 해서 한참 웃었습니다. 인간이려니, 하고 좀 너그러운 마음이 되기도 하더군요, 나도 남자야, 아직! 이런 구남친의 멘트를 들으면서 아니 누가 뭐라고 그랬나?! 나도 여자야! 라고 대꾸하면서 웃음. 마음이 너그러워지니 자꾸 이런저런 소리를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되니까 봄은 오고 잔인한 마음은 조금씩 누그러지는군요, 가끔 확 지랄을 떨고 싶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봄은 한반도에 겨우 한달 머무른다 하고 여름이 바로 시작된다고 아줌마들이 다이어트를 시작하더군요. 덩달아 저도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헛둘헛둘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한 책을 읽다 말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석학 레벨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데서 너는 이상한 책 읽는 사람, 나는 꽤 멋진 책만 읽는 인간, 이러고 다니지 마, 쪽팔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