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는 스물을 갓 넘겼을 때. 비디오 가게에서 알바로 일하던 고등학교 후배 녀석이 언니 이 영화 끝내줘요, 봐봐요, 라고 내밀어서 빌려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여름밤에 봤다. 미성년자는 보지 못한다 해서 부모님과 동생들이 모두 자고 있는 틈을 타 야밤에 소리를 잔뜩 죽이고. 미친듯 라디오헤드를 반복적으로 들었던 기억도. 때마침 라디오헤드가 흘러나와서 맥락 없이 떠올랐다. 네 평 골방에서 거의 항상 문을 잠가놓다시피 하며. 지나고 보면 옥상에서 빨래를 널 적마다 담배를 몰래 태우곤 했는데 엄마나 아빠나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게 엄마 입장이 된 지금 생각해보니 놀라울 지경이지만. 옷을 벗고 있는 나를 보고 뭐라뭐라 하는 할머니들 시선을 뒤로 하고 안경을 벗고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엄마랑 마주쳤다. 엄마, 하고 부르니 할머니들이 박여사 따님이야? 그래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세신사 언니와 40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맥주를 한잔 했다. 소주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막걸리도 싫어 맥주를 주문해 엄마와 알콩달콩 음식점에서 나눠 마셨다. 음식점 사장님은 지금 그 자리에서 30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는 애들도 다 컸고 이제 그만 가게를 접자고 해도 할망구가 두 다리 성하고 두 팔 성할 때까지는 해야 한다고 못 닫게 한다고 하지만 고관절 수술에 인공관절 수술도 두 다리 모두 하고 어깨 수술도 한 마당에 이게 어디 성한 다리고 성한 팔이냐 말을 해도 수술을 했으니 성한 거다, 그러니 해야 한다 무작정 고집을 피우는데 지겹다, 정말 그만 하고 싶노라며 단골인 엄마에게 계속 말말말. 하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 곱창을 즐겨 먹었으니 실로 30년이다, 신기하기만 하구나 맥주를 마시면서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는 맥주도 곱창도 잘 먹는 나를 보며 왜 이렇게 잘 먹어? 딸, 하고 또 놀라워했다. 뜨거운 물에서 놀다 나와서 그런가 잘 들어가는군 하지만 새벽 한 시에 장 꼬여서 응급실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심하던 지난 밤의 나와는 너무 다르구먼 허허허 하면서 신경성이 도졌나 싶었다. 장 꼬인 건 실로 오랜만인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이 식은 땀이 갱년기 증상인가 아니면 신경성인가 가만히 매트 위에 엎드려서 고심했다. 한 시간 지나 멀쩡해져서 둘 다 동시에 왔다는 걸 인지했다. 이게 다 내 업보구나 싶기도 한데 아까 만 번 다시 태어나 죽고 태어나 죽고 이걸 그래도 해보겠노라 하는 게 두 가지 마음에서 비롯되어 하나는 전생에 만 번의 환생을 할 정도로 죄가 깊고 깊으니 그 죄를 만 번의 생을 통해서 갚아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런 식으로 강렬하게 알고 느끼고 싶다는 것. 탐구심이 끝없다는 게 어느 정도로 무모한지 알 수 있다. 체력은 되지 않고 욕심은 그득해서 너덜너덜. 공중부양 되는듯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 유투브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못하는 건 없다, 스승이 있으면, 대신 만 번은 그래도 반복해야 가뿐하게 행할 수 있을듯, 이라는 댓글을 보고 말똥말똥해졌다. 열 번도 아니요, 백 번도 아니요, 천 번도 아니요, 만 번이다. 허허허허허허허 하고 웃음이 나올듯. 없던 두통이 생긴 건 카페인의 과다 섭취 때문이다, 알아채서 하루 두 잔으로 다시 카페인 조절. 저녁에는 무조건 커피는 금지하기로. 저녁을 과식하는 바람에 뜨끈하게 매실차를 타서 호로록거리고 있다. 인도철학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 아마 낯선 용어들 때문에 더 그런듯. 노트에 정리를 하며 봐야 할듯. 스크린타임을 가지지 못한지 너무 오래 되어 영화 하나 보고 싶은데 동시에 책 읽고픈 마음도. 5월 들어 오늘 처음으로 3000보 찍었다. 다음주에도 내내 비가 내린다. 한국 날씨가 이상하게 변하는구만. 카페에서 옆 테이블에서 중년 여성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말끝마다 이재명 그 새끼가 민주당 그 새끼들이 라고 흥분을 하시며 젊은 여성이 고함을 내지르다시피 그래서 결국 헤드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렇지 이런 세계에 살고 있지, 이게 바로 삶이지, 라는 걸 다시 느낌. 저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걸까. 내가 삶을 택해서 끌고 가는 것도 있지만 이 생이 나를 톡톡 치며 내 사람들에게로 내 공간으로 이끌고 가는 것도 동시에 행해진다, 이걸 다시. 오랜만에 초코쿠키 먹어 맛나 엄마, 아이가 말해서 므흣. 6월에는 밀가루 좀 의식적으로 덜 먹어보기로. 아이가 돌아오려면 두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이런 마음. 자정 넘겨 수시로 귀가하던 젊었던 나는 미쳤군 미쳤던 거였어.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책을 완독. 이미 했던 이야기들이 진리가 아니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다른 표현방식을 찾는다는 것. 이미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시공간을 넘어서서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그것이 틀릴리 없다. 조금 더 관찰하고 조금 더 골몰할 것. 내가 할 일은 그곳에 있을지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완독. 책에서는 broken people 이라고 명명되는데 독자 입장에서 나는 이 모든 이들이 브로큰 피플이라고 보았다. 확대해서 보자면 시간을 이어 공간을 넘고 내내 이어가는 과정 자체가 broken 일지도 모른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그런 부서져버리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고통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기쁨 자체도 어쩌면 부서져버리는 순간들의 연장선상일지도. 그렇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고. 부서지고난 후에도 다른 관계로 치유가 되고 이미 새로운 살이 돋아 그저 아주 자그마한 흉터가 되었을 뿐인, 허나 몸이 썩어 없어지기 전까지는 내내 이어져있을 상흔을 마주하면서 주름은 깊어지고 몸의 감각은 서서히 퇴화된다. 소설 속에서도 명시되어 있지만 그러니까 타인을 위해서 어떤 모션을 행한다는 것 말이다. 낯선 이가 내 생 안으로 들어오고 내가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된다는 것. 소설 안에서 이 모션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행위를 뜻한다. 루시와 밥의 관계도 감동적이지만 밥과 맷의 관계가 심장을 둥둥둥거리게 만들었다. 바로 이어서 다른 소설을 시작하고 싶지만 숨 고르기 하고 이론서로 잠깐 이탈한다. 5월을 숨쉬게 만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