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눈물의 반짝임이담겨있는 푸르름이지요.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레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 P17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죠. 다만 한 편의 시처럼 반짝이는 빛을 걸쳤을뿐이었습니다. 비로소 당신에게 말하려 했던 것에 가까이 다가섰네요. 오늘 내가 본 사소한 것, 죽음의 모든문을 여는 것, 바로 결코 멈추지 않는 삶 말입니다. 삶은 결코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 기둥 사이를빠져 달아나는 새처럼, 삶은 우리 앞에서 달아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런것을 신경 쓰지 않죠. 오히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인자인 우리를 자신의 온화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 P19

연못은 하늘 아래 꽃을 피우고, 하늘은 연못을 마주하며 곱게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새는 예언하는 듯한날갯짓으로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어요. 잠시 동안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어리석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화창한 날‘, ‘푸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9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른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우리가 하는 말에는 더 이상 아무런의미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드러내는 겉모습은 우리를 눈멀게 했고, 우리를 불편하게하던 순수한 영혼의 얼굴을 우리 스스로 씻어내 버렸다. 갓난아기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던 신은 이제 우리에게서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집시와 길고양이, 접시꽃은 우리가 더는 알지 못하는 영원한 것에 대해 알고 있다. - P32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 술라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세탁실 빨랫줄에 널린 검은 침대 시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림들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무감각해진 채로 살아 엎드려 있는 거대한 짐승 같다. 하얗게 빛나는 빛이 짐승들의 옆구리를 비춘다. 그들의숨결은 무겁고 더디며 고요함에 젖어있다. 불멸의 검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짐승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홍수보다 훨씬 더 위압적인, 술라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짙은 정적에 휩싸여 몽펠리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 P38

밤과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와 끝을 알려주듯 관리인이 다가와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 몽펠리에의 플라타너스가 하얀 별이 지글거리는 은하수까지 내 머리를 들어 올린다. 누구도반박할 수 없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법처럼 하얗게 불탄 자국들. 나는 다시 스위스 시계 같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매일 밤 그러듯, 내일은 더 아름다운 일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 P40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것은 결코 그 순간이 아니다. 죽음,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은총과 우연에 의해 불시에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주 일찍 시작됐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충분하다. 아주 일찍, 그의 삶에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 P50

나는 내 방식대로 연주합니다. 차갑고도 정열적인방식이죠. 내킨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악보라는 북극으로, 음악이라는 어두운 소나무 밑으로 할 수 있다면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가는 곳으로, 내가 연주하는 곳으로 오직 순백의 음악만이 있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 P50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찍힌 음반만이 나올 뿐이다. 소나타 도입부처럼 생기있고 건조한 이름, 글렌 아다지오의 깊은 전율처럼 좀 - P53

더 둔한 소리의 성, 굴드. 소리의 북극여우이자 마멋인글렌 굴드, 그는 바흐를 연주한다. 연주하고 또 연주하며 바흐에만 매달린다. 사실 그는 어떤 곡이든 연주할수 있었고 그의 매력, 그가 연주하는 음표들의 끝에서나오는 젊은 왕자의 위엄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 P54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대리석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느낀다. 여러 달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충격에뒷걸음질 친다. 더는 세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그나마 덜 부조리한 것은 바로 꽃이다. 꽃은 모든 색들의 외침이다.
가장 작은 데이지꽃조차 자신의 말이 들려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한다. 꽃은 자신의 색으로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꽃에 중독되었다. 집안 곳곳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당신의 죽음으로나와 멀어진 세상은 어둠 속 검은 구슬처럼 느리게 돌아갔으나 그곳엔 화려한 꽃의 오만함과 단조로운 허무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외침이 있었다. 수도원의 수녀들은 도자기 병 안에 있는 장미 한다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 P69

결국 세상은 자기 자리를 전부 되찾는다. 아니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부재 속에서 꽃들이 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듣게 된 것이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창밖으로 개머루덩굴이 보인다. 색색의 숨결이 풀밭을 가로지른다.
꽃은 영원으로부터 내리는 첫 빗방울이다.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너는 이 수첩을 열어볼 테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하늘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 안에 머무는 감동적이고 야생적이며 침범할 수 없는 한밤중의 하늘을 이 푸른 페이지들 위에 담긴 별의 하얀 반짝임도 보게 될 것이다. 소금 결정이나 불꽃에서도 볼 수있는 하얀 반짝임을. 수많은 단어들이 네 두 눈의 아침에, 네 눈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단어들이 영혼,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정성스레개어 놓은 빨래. 검은 테두리를 폭풍우와 오로라의 머리글자로 수놓은 연인들의 잠자리를 위한 금빛 침대보 - P75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책을 쓰고 싶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한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못한다.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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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p91

날 봐요. 날 좀 봐요. 당신은 생각한다. 말(馬)들도 그렇게 애원하지. 나무들도, 미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시간을 잠깐 동안의 시간을통과해 가는 모두가 그렇다. 사방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영광을 애타게 구하는 소리. 사방에 무기력한 망명 생활이, 타인의 시선이라는 진정한 거처에 대한 갈구가 존재한다.  - P64

그러다 어느 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읽는다. 당신이 살았던 유년의 고장,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고향 땅을 산업화로 우울한풍광을 띄게 된 프랑스의 이 소도시를 한 번도 떠나본적이 없지만, 아주 짧은 여행조차 겁을 내지만, 당신에게 러시아는 평생토록 유년의 땅, 꿈의 땅이었다. 그 고요한 설경과 양털처럼 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어김없이 당신의 유년기와 재회하곤 했었다. 엄청난 허기를 담고 있는 두꺼운 책, 삶을 빼닮은 그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얼굴 아래 무수한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말과 몸짓, 편지. 말(馬)과 화재. 영혼의 숲속에 나지막이번지는 불길. - P75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혀 혹은 거의 쓸모가 없다. 사랑이 그렇고 놀이가 그런 것처럼. 그건 기도와도 같다. 책은 검은 잉크로 만들어진 묵주여서, 한 단어 한 단어가 손가락 사이에서 알알이 구른다. 그렇다떤 기도란 무얼까. 기도는 침묵이다. 자신에게서 물러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우리는 제대로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우리 입술은 언제나 너무 많은 소음을 담고, 우리 가슴속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난다. 성당에서는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촛불을 제외하고는.
초들은 피를 몽땅 쏟아낸다. 자신들의 심지를 남김없이 소모한다.  - P77

파스테르나크의 대작을 읽은 뒤 당신에게 남는 건무얼까. 한 얼굴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무수한 겨울을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 남자의 얼굴. 어둠 속에 머무는 얼굴, 남자는 숲속 어느 외딴 나무집, 탁자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편지를 쓴다. 끝이 나지 않는 긴긴 편지다. 종잇장들이 검은 잉크로 물든다. 그게 전부다. 이름들과 사건들은 잊힌다. 모든 것이 지워진다. 연못 같은책장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을 훨씬 흥분은 남는다. 사라지기까지 여운이너무 긴 기분 좋은 무력감이다. 사랑을 나눈 뒤나 산책을 마칠 무렵 빠져드는 그런 상태. 피로감이랄 수도 있지만 특별한 피로감, 휴식이 되는 피로감이다. 책 앞에서, 자연이나 사랑 앞에서, 당신은 스무 살이나 다름없다. 세상도 당신도 막 시작하려고 한다. 당신은 꼼짝하지 않는다. 기차가 하나씩 출발하는 모습을 본다.  - P78

그녀는 밤늦도록 아이를 보살피며 근심의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쓴다. 유년기부터 몸에 밴 방식, 천성보다강한 제2의 천성이다. 온전한 상실인 사랑. 그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도 살아남는 사랑, 사랑이 지나고도 살아남는 사랑이다. 아이는 그녀의 에너지를 받으며 자란다. 첫걸음을 떼고 첫마디를 내뱉는다.  - P85

당신은 그녀에게 반하듯 그녀의 문체에 반한다. 둘은 같은 말이다. 흰 종이와 붉은 드레스 밑에서 같은 강물이 흐른다. 그녀는 전설의 거울 앞에 앉듯 언어 앞에앉는다. 어린 시절 그녀는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응시했었다. 지극히 평범한 한 줄기 빛에도 마음이 홀리곤 했었다. 그녀가 글쓰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서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는 많은 책을, 소설을 읽는다. 책은 샘물 같다. 그녀는 그곳에 얼굴을 갖다 대고 식힌다. 독서와 글쓰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그녀는 그 책의 저자이다. 하지만작품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저자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너는 읽던 책에 싫증이 나기도 한다. 힘들고 버거운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책.  - P87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수첩에 무언가를 적거나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그들에게 뜨겁고도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매혹한다. 그런 무지로매혹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이 귀찮은것 같다. 당신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지친 만사에 지친 모습이다.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향해 돌아서 있다. 스무 살 적에는 검고긴 머리의 여자였다. 어깨 위로 강물이 흐르고 유순함을 갑옷처럼 둘렀던 여자였다. 휴면 중인 노트 안에서그녀가 찾는 것이 아마도 그것이다. 예전의 얼굴, 열린이미지이다. 검은 잉크를 쓸어내리는 말들의 빛. 아마도 그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 혹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 P90

신문 읽기는 진지한행위이다. 진지한 모든 일이 그렇듯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성서의 한 문장은무수알코올 한 방울, 천사들의 눈물 한 방울과 같다. 책을 펴고 책장 속 어딘가를 짚으면 손가락 밑에는 물고기나 양 한 마리, 야자수 한 그루가 있다.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부터 삶 자체로, 단순 현재에서 완료된 현재로 건너간다. - P99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 P108

작가는 일체의 명징함을 제 손에 움켜쥔 자이지만,
성인(聖人)은 제 손에 일체의 어둠을 움켜쥔 자이다. 작가는 빛으로 잉크를 만들지만, 성인은 불순함을 가지고 더없이 순정한 무언가를 만든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가 성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건 분명한사실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다.
목소리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땅과 하늘 사이, 책과 천사들 사이에 자리한, 우레 같은 검은 목소리다.  - P109

광인이란, 자신의 광기를 더 이상 주체하지못하고 단번에 이 광기의 물을 쏟아내는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파탄이 나고 만다. 언어의 고역이나 우스꽝스러운 노동 등, 오로지 자신을 근거로 삼는 일들을 단념해버린다. 세상 전부를 포기한다. 광인은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이 목소리는 아직 무대 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목소리는 말을 한다. 당신의 지성과당신의 봄, 당신의 믿음이라는 게 대체 무언지. 당신의원칙, 당신의 보물창고, 당신의 객설이라는 게 무언지.
당신의 건강 이면엔 폐허가 널려 있다는 걸, 당신의 부부생활 이면에 얼마나 끔찍한 증오심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목소리가 말해준다.  - P11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해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無)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神)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우린 기다린다. 기다림이 스스로 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잠을 자거나 죽는것이 매한가지일 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처음엔 보이지 않고 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랑은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 P120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 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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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 삶이 깨어나는 시기, 두 눈이 처음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시기엔 책을 읽지 않는다. 입으로, 양손으로 삶을 집어삼키지만아직 잉크로 눈을 더럽히지는 않는다. 삶의 시원. 첫 수원(水源), 유년의 개울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겠다는 생각도, 어느 책의 페이지나 어느 문장의 문을뒤로하고 쾅 닫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엔 더 단순하다. 어쩌면 더 실성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진정한 제약이라고는 없는 첫 대륙에속해 있다. 이 대륙은 바로 당신, 당신 자신이다.  - P11

끊김도 찢김도 없는 온전한 당신이다. 쉽사리 헤아려지는 무한한 공간. 그 안에 책은 없다. 책이들어설 자리,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 P12

글을 읽는 첫 경험. 책의한 페이지를 해독하고 어렴풋한 형체들을 감지할 수있게 된 첫 경험. 그것은 행복을 넘어서는 정확히 말해기쁨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다. 기쁨과 공포라 할 만한무엇. 기쁨은 어김없이 공포를 수반하고 책들은 언제나 애도를 수반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 P13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그러니까 언어의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책이든 나쁜 책이든 신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읽는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양식이 되어준다. 요컨대 한쪽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읽기가 전부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돈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경계는 돈의 경계보다 더 폐쇄적이다.  - P15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겐 결핍이 부족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눈에 띄는 벽이자리하지만 이 벽은 유동적이고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사이의 벽은 땅속 깊은 곳, 얼굴 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일까?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은 과묵한 무리를 형성한다.
이 사람들에겐 물건이 말을 대신한다.  - P16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 P17

영혼 없이도 우리는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법석을 떨 필요도없다. 그건 너무나도 흔한 일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도 사물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부재하지만 세상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다. 짐승들을 제외하고, 나무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를 속일 수 있다. 그렇게 모두가 속아 넘어가지만, 그래도 금빛 가을 햇살만은 속지 않는다. 자작나무 껍질과 장미나무 속살을 한없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그 빛은 결코 속지 않는다.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그빛을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삶에 어떻게 가 닿는다지? 단순한 삶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있을까? 프로방스 숲속에 번진 시뻘건 산불처럼 사랑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풀이 다시 자랄 것이다.  - P25

죽음과 잇따른 재생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마치 쓰지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문체에는 관심을두지 않는다. 그 대신 백지 위로 결단코 오지 않을 그것1에 한마디 말에 겁을 집어먹을 그것에 무엇보다 공을들인다. 요컨대 삶에, 발가벗겨진 삶에 가식 없는 단순명료한 삶,  - P27

오랫동안,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즉 아버지의 떠도는 그림자가 있고, 번잡한 날들 속에서 첫 시구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라신과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담갈색 밤이 있다. 사방에서 꿈은 짓밟히고, 자신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글쓰기는 불가능해진다. 불만에 찬 왕,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갈가리 찢긴유년기에 너무 밀착된 상태로는 글쓰기가 불가능하다. - P47

시작은 절름발이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우아함이 깃든다. 이 둘 사이에서 정신은 필연적으로 성장하지만 학습의 성과나 지속성은 오락가락한다. 시작과 끝은 동시에 주어진다는 걸 우린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아이의서투름과 신의 경쾌함, 꽃과 열매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훨씬 뒤에야 알게 된다. 우아함이 우리의 서투름을 몰아내는 게 아니다. 우아함은 서투름을 완성한다.
두 개의 음이 떨리는 순간 음악은 이미 환한 빛을 발하며 그곳에 있다. 미약한 시작 속에 성취되어 있다. 그다음은 단순하다. 잇따르는 습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음악이 자신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느린 걸음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황금 말인 음악을 길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그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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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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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죽음이다. 거침없는 표현과 노골적인 문장으로 시종일관 죽음을 노래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집에서 몸으로 살아내고 버틴 치열한 삶을만났다. ‘그만 쓰자. 끝‘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던, 전 생애를 뛰어넘는 의지가 엿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꿰뚫어 보는 시인의 시선은 실은 따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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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애도와 상실이라는 감정 속에서 미셸 자우너는 묻는다.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음식을 먹이고 한국 문화를 알려주었던 엄마가 없다면나는 한국인일 수 있을까? 그건 정확히 나의 이야기와도 만난다. 내게 주어를 가르쳐준 엄마가 없다면 나의 모어와 문화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가 해주었던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H마트에서 장을 봐 요리를 하며 자기 자신으로 바로 서는 미셸 자우너를 바라본다. 이는 온전히 나의 문화이며 동시에 유산이라고 명명하는 그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가끔 생각한다. 서투른 한국어를 하거나 한국문화의 가장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때로 가장 한국적이라고. 그 낯설고 새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수 있게 된다.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지긋지긋한 구내식당에 가지 않고 몇 주는 버틸 수 있게 해줄 신라면컵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엄마는 의류 스팀기며 보풀 제거 롤러, 비비 크림, 양말 세트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건 좋은 브랜드"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여 보낸 티제이맥스에서 세일할 때 구입한 치마도 카우보이 부츠는 부모님이 멕시코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서사와 음식과 함께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그걸 신어보는데 웬일인지 가죽이 이미 부드럽게 길들여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그걸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신고 다녔다는 거다. 엄마는양말을 두 겹 신은 발로 그걸 신고 매일 한시간씩 걸어다니면서 뻣뻣한 신발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자기 발바닥으로 평평한 밑창까지 모양을 잡아놓았다. 행여 내가 처음그걸 신을 때 불편할까봐 말이다.
나는 기숙사 방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혹시 뭐라도 잘못된 게있는지 죽 훑어보았다. 적절한 복장인지, 실밥이 나와 있지는않은지 샅샅이 점검하면서 엄마의 노련한 시선으로 나를 보려 애썼다. 특히 엄마가 잔소리하던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엄마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컸는지, 엄마없이도 내가 얼마나 잘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 P121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 상봉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내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갈비를 재워놓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냉장고를 채우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몇 주 전에사놓고서 하루 전에 꺼내놓았다. 좀더 익혀서 내가 도착해서먹을 때 적당히 알싸한 맛이 나도록.
참기름, 물엿, 탄산소다에 재운 부드러운 갈비가 팬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면서 내뿜는 달큼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했다.
엄마는 신선한 적상추를 깨끗이 씻어 내가 앉아 있는 거실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연이어 다른 반찬들도 가져다 놓았다. 먹기 좋게 반으로 자른 계란장조림, 파와 참기름으로 무친아삭한 콩나물, 국물이 넉넉한 된장찌개, 딱 알맞게 익은 총각김치였다. - P122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손바닥을 쫙 펴서 거기에 상추 한 장을 올려놓고 내 식대로 음식을 착착 쌓았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갈비 한 조각, 따끈한 밥 한 숟가락, 쌈장 약간 얇게 저민생마늘 한 조각을 차례차례로, 그런 다음 그걸 얌전하게 오므려 입에 쏙 집어넣고는 눈을 감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몇 달 동안 집밥에 굶주린 내 혀와 위는 그제야 깊은만족감을 되찾았다. 밥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재회였다. 밥솥에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은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기숙사에서 생존을 위해 먹던 찐득한 즉석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엄마는 내 반응을 살피려고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맛있어?" 엄마는 김봉지를 뜯어 내 밥그릇 옆에 놓았다.
"진짜 맛있어!" 나는 입안에 아직 음식이 반쯤 남은 상태로연방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 P123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렇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어느 편에 설지, 누구에게 동조할지 결정하는 일은 번번이 남의 손에 맡겨졌지 내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 P188

엄마는 한국 친구 몇 사람과 소규모 미술 수업에등록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카카오톡으로 작업중인작품 사진을 보냈다. 처음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줄리아를연필로 그린 그림은 꼭 뚱뚱한 소시지처럼 생겨 특히나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실력이 점점 늘었다. 나는 엄마가 드디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낸 데 열광했다. 엄마는 집에 있는 장식품, 장식 술, 찻주전자처럼 일상에서흔히 보는 작은 물건을 그렸다. 그리고 명암을 넣어 계란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을 공들여 완성하는 데 완전히 열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연노란색과 라벤더색 꽃에 맑은 청록색 줄기를 물감으로 그려넣은 카드를 내게 보내왔다.
"이건 특별히 너를 위해 만든 카드야. 난생처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카드" 안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 P195

나는 그냥 엄마, 나는 그냥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양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가정신없이 딸꾹질했고, 또 그러다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마구 헐떡였다. 얼굴은 극도의 고통으로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나는 내 방 나무 바닥에서 멍하니 몸만 앞뒤로 까딱였고 그 순간 내 존재가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처음으로 우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는 자신의 격언을 들먹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려도 될 때가 됐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 P203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다잘될 거라는 말을 전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마지막말이 고통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슨 말이든 다 좋았다.
엄마!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반복해서 외치던 그 말. 목구멍 깊은 데서 터져나오는 원초적인 한국식 흐느낌. 한국 영화와 연속극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 엄마가 자기 엄마와 동생을 위해 울면서 냈던 그 소리. 고통에 찬 비브라토로 시작해점점 스타카토로 이어지다 나중에는 작은 돌기에 통통 부딪히며 떨어지듯이 끝나는 그 소리.
하지만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거운 숨만 몰아쉬었고, 들숨소리는 갈수록 뜨문뜨문해졌다. - P259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키우고 나와 18년을 한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85

고기 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합을달리한 갖가지 감자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걸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게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는, 보드라운 죽이 엄마의 갈라진 혀를 살포시 감씨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뒷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 P320

이모 집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 내 생일이었다. 이모ㄴ미역국을 끓였다. 미역국은 영양이 풍부해 원기를 북돋아ㄴ주는 해조류 수로, 본래 아기를 낳은 산모에게 권장하는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생일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 음식을 먹는 전통이 있는데 이제 내겐 이 음식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감사한마음으로 국물을 들이켜고서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미역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 맛은 고대의 어떤 바다 신이 바다 거품 속에서 벌거벗은 채로 해초를 포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마치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 P335

2주간 발효된 김치를 꺼내 먹으니 마침맞게 좋았다. 그것은끼니때마다 내 식사를 완벽하게 해주는 이상적인 반찬이자나의 역량과 수고를 매일매일 상기시켜주는 음식이었다. 그모든 과정 덕분에 김치의 진가를 더 제대로 알게 됐다. 어렸을땐 식사가 끝나고 접시에 김치 몇 조각이 남아 있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김치를 만들어봤기에 남은 김치를 꼬박꼬박 옹기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부엌에 식료품 유리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에 종류별로 담긴 김치는 익은 정도가 제각각 달랐다. 조리대 위에선담근 지 4일 된 총각김치가 새콤하게 익어갔고, 냉장고에선갓 담근 깍두기가 수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커다란 배추 한포기가 반으로 쩍 갈라진 채 소금물에 절여질 채비 - P360

를 하고 있었다.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의 풍미 속에익어가는 향긋한 채소 향이 그린포인트의 작은 부엌에 물씬풍겼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것이 곧 당신이다." - P362

애써 표정을 꾸미지 않은 솔직한 사진들도 좋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서, 은미 이모가 보낸 선물을 열고 있는 내 뒷모습을 예뻐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 의자에 기댄채막 맥주를 한 모금 마시려는 모습. 옛날 집 거실 카펫 위에앉아 무언가를 바라보는 모습. 잠옷이 어깨 한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와 엄마의 어깨 끝에 꼭 라이터 불로 지진 자국처럼 보이는 예방주사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 상처 때문에, 엄마는나도 언젠가 그런 상처를 갖게 될까봐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지키는 일이 엄마의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 결실을 맺지 못한 열망, 처음으로 읽은 책.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난 과정, 온갖 불안과 작은 승리. 엄마는 비할 데 없는 관심으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 P371

나는 발효가 통제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배추는 놔두면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새콤한 맛이 나게 된다. 요컨대 발효는 시간속에 존재해 변화한다. 그러니 발효가완전히 통제된 죽음인 건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니까.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 P372

이모가 터치스크린 위로 차트를 죽 훑어내리더니 <커피 한잔>을 찾았다. 심벌즈를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기타가 바통을 이어받아 즉흥연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멜로디 라인이 나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어렸을 때 다 같이 간 노래방에서 엄마와 이모가 듀엣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긴 전주가 끝날 무렵 화면 위로 천천히 가사가 올라왔다. 이모는 하나 더준비돼 있던 무선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이모는 내 손을 잡아나를 화면 앞으로 끌고 가서 내 얼굴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모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모음 소리라도 따라 내면서 멜로디를 좇아가려 애썼다. 저 깊은 곳에 존재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기억을, 혹은 어떻게든 내가 접했을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모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게느껴졌다. 지난 한주 동안 내가 이모에게서 찾으려 하던 것이었다. 이모가 나의 엄마도, 내가 이모의 동생도 아니었지만, 그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그다음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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